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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5년 9월 28일 (일)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가톨릭 성인/축일
    성녀 막달레나 (Magdalene)
    같은이름 마들렌 , 막달렌 , 막딸레나
    축일 9월 28일
    신분 3회원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나가사키(Nagasaki)
    활동연도 +1634년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Laurentius Ruiz)와 성 도미니코 이바녜스 데 에르키시아(Dominicus Ibanez de Erquicia)와 성모 마리아의 성 야고보 큐세이 토모나가(Jacobus Kyushei Tomonaga de Santa Maria)와 13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일본 나가사키(長崎) 지방에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1633년, 1634년, 1637년에 모두 순교하였다. 그들은 체포된 이후 잔혹한 고문을 당했고, 그 시신마저도 불태워진 후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의 유해를 공경하지 못하도록 나가사키 바다에 뿌려졌다. 이들 16명의 순교자를 출신 국가별로 보면 일본인 9명, 에스파냐인 4명, 프랑스인 1명, 이탈리아인 1명, 필리핀인 1명이다. 신분으로 보면 9명은 도미니코회 사제, 2명은 협력자(수련자) 형제, 2명은 제3회원, 그리고 3명은 평신도였다. 도미니코회 3회원이었던 오무라(Omura)의 성녀 마리나(Marina)와 성 안토니오 곤살레스(Antonius Gonzalez) 신부를 제외한 모든 순교자는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는 니시자카(西坂, Nishizaka) 언덕에서 순교하였다. 이곳은 1697년에 일본 최초의 순교자들인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2월 6일)와 동료 순교자 25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던 곳이며, 또한 1617년에서 1632년 사이에 순교한 205위의 복자 중 다수가 순교했던 곳이었다.

       에스파냐 출신의 도미니코회 사제인 성 도미니코 이바녜스 데 에르키시아가 1633년 8월 14일 처음 순교한 이후 필리핀 마닐라(Manila) 출신 평신도인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가 1637년 9월 29일 순교할 때까지 이들의 순교는 계속되었다. 총 16명의 순교자 중 13명이 도미니코회 사제이거나 수련자 또는 3회원이고 나머지 3명도 그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성녀 막달레나(Magdalena)는 1610년경 일본의 나가사키 또는 나가사키 인근 마을에서 순교한 그리스도인 귀족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 부모가 순교한 후 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성장해 일본어를 읽고 쓸 뿐만 아니라 라틴어와 에스파냐어와 포르투갈어도 배웠다. 1624년에 두 명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 선교사가 도착하자 성녀 막달레나는 그들의 통역자 겸 교리교사로 봉사했다. 박해를 피해 숨어다니며 선교활동을 돕던 중 선교사들의 심오한 영성에 관심을 두게 되어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3회원으로 입회하였다. 그 후 자신의 영적 스승인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선교사들이 순교한 후 도미니코회 신부로부터 교육받으면서 도미니코회의 3회원 입회를 제안받았다. 성녀 막달레나는 이를 수락하고 서원하며 수련을 시작했으나 지도 신부가 체포되면서 수련을 마치지는 못했다.

       성녀 막달레나는 자신의 영적 아버지인 선교사들이 모두 체포되어 순교하자 관리들 앞에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기로 했다. 1634년 10월 체포된 후 감옥으로 끌려가는 길에 그녀는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이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임을 드러내고자 검은 수도복을 입고 허리띠를 착용하였다. 목격자들은 그녀가 감옥 안에서도 성가를 부르며 다른 수감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고 증언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일본 당국은 그녀에게 신앙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며, 그녀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이유로 결혼을 조건으로 풀어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녀 막달레나는 자신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했다고 대답하며 관리들의 배교 권유와 고문에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당시 가장 끔찍한 고문이자 처형 방식인 ‘아나츠루시’(Ana-tsurushi) 형을 받았다. 이는 죄인을 밧줄로 묶어 거꾸로 매달고 관자놀이에 작은 구멍을 내 머리로 쏠린 피를 조금씩 빼내며 더러운 오물로 가득한 구덩이에 몸통을 집어넣는 잔혹한 고문으로 여성으로서는 그녀가 처음으로 이 형을 받았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성녀 막달레나는 성가를 부르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성녀 막달레나는 보통 3~4일도 힘든 아나츠루시 고문을 받으면서 무려 13일을 버텼다. 그리고 1634년 10월 15일 순교의 월계관을 쓰고 주님께 돌아갔고, 그의 시신은 불태워진 후 재까지 모두 바다에 버려졌다.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와 성 도미니코 이바녜스 데 에르키시아와 성모 마리아의 성 야고보 큐세이 토모나가와 13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981년 2월 18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에 의해 순교자 대부분과 인연이 있는 도시인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복자품에 올랐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 밖에서 거행된 시복식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1987년 10월 18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5일 목록에서 일본 나가사키에서 동정 순교자인 성녀 막달레나가 신앙을 전파하고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 쇼군이 통치하던 시대에 13일간 교수대에서 고문을 견뎌낸 강한 정신력을 지녔다고 기록하였다. 개정 “로마 순교록”은 ‘일본의 16위 순교자들’이 순교한 날에 그들의 행적을 기록해 기념하도록 하고 있는데,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와 15명의 동료 순교자들’로서 16위 순교자 모두를 함께 기념하는 날은 9월 28일로 정해졌다. 나가사키의 성녀 막달레나는 같은 해 11월 11일 순교한 오무라의 성녀 마리나와 함께 일본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성인품에 올랐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경비병들에게 성가를 불러주어 ‘일본의 성녀 세실리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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