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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10월 21일 (수)연중 제29주간 수요일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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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연중 제29 주간 목요일

192566 조재형 [umbrella] 스크랩 06:52

‘Margin Ma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경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 완전히 속하기보다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경계인은 때로 외롭고 불편합니다. 그러나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양쪽을 모두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계인에게 필요한 것이 ‘메타인지’입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돌아보는 능력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적응력과 호기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면 ‘Risk-taking’, 곧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입니다. 새로운 길은 언제나 익숙한 길보다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위험을 전혀 감수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가능성도 열리지 않습니다. 경계는 불안한 자리이지만 동시에 혁신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제 친구 신부님 가운데 그런 ‘경계인’이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신학생이었지만 수원교구에 있는 성당을 다녔습니다. 신학교에도 곧바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재수해서 들어갔습니다. 군대에서도 일반적인 보직이 아니라 방위병으로 복무했습니다. 돌아보면 한쪽의 길만 걸어온 것이 아니라 늘 조금씩 다른 경계를 경험한 것입니다. 삶에는 내가 계획하지 않았던 우회로가 있습니다. 실패도 있고, 기다림도 있고, 다른 사람과 다른 길을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집니다. 실패해 본 사람은 실패한 사람을 이해하고, 낯선 곳에 있어 본 사람은 낯선 이를 이해합니다. 위험을 감수해 본 사람은 새로운 길을 걷는 이의 두려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의 삶도 돌아보면 경계인의 삶과 비슷합니다. 서울대교구 사제이지만 오랫동안 해외에서 지냈습니다. 캐나다에서도 살았고, 뉴욕에서도 살았고, 지금은 달라스에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익숙한 한국을 떠나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의 Risk-taking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문화도 알고 미국 교회의 문화도 경험합니다. 처음에는 이런 경계가 불편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경계에 있다는 것이 은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쪽에만 있었다면 보지 못했을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우리를 안전하고 익숙한 자리에서 불러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고, 베드로에게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때로 안전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한 발 내딛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민자들은 모두 어느 정도 경계인입니다.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을 잊을 수 없고, 새로운 땅에서 살아가지만,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말을 하면서 영어를 배우고, 한국의 문화를 간직하면서 미국의 문화와 함께 살아갑니다. 이민 자체가 하나의 Risk-taking입니다. 익숙한 것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선택입니다. 물론 두려움도 있고 실패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경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두 언어를 알고, 두 문화를 이해하며, 서로 다른 사람을 이어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저 사람은 나와 다를까”라고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에게서 내가 배울 것은 무엇일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호기심이 경계를 넘게 하고, 적응력이 그곳에서 살아가게 하며, Risk-taking의 용기가 새로운 길을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경계를 넘으셨고, 그 과정에서 위험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이 되셨습니다. 유다인이셨지만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셨고, 사람들이 외면하던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미셨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와 종교의 기준으로 보면 모두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 위험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큰 Risk-taking을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불은 우리의 안일함과 두려움을 태우는 복음의 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위험을 받아들이셨고, 바로 그 십자가 위에 부활의 꽃이 피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모든 위험을 피하면서 안전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받을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복음을 위해 때로 손해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모하게 위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메타인지로 자신과 현실을 살피고, 호기심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적응력으로 변화에 응답하며, 필요할 때는 믿음으로 Risk-taking을 하는 것입니다. 경계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십자가도 끝이 아니라 부활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경계를 넘어 우리에게 오셨듯이 우리도 두려움을 넘어 사람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벽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다리를 놓는 사람, 안전만을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 십자가 너머에 피어날 부활의 꽃을 믿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오늘,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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