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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10월 5일 (월)연중 제27주간 월요일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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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함승수 신부님 [연중 제27주일 가해]

192286 박영희 [cornelia2] 스크랩 2026-10-04

[연중 제27주일 가해] 마태 21,33-43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탐하다가 오히려 큰 것을 잃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작인들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포도밭 주인에게 바쳐야 할 ‘도조’는 자기들이 주인 덕분에 얻은 풍성한 결실에 비하면 아주 적은 양일 뿐입니다. 그러나 악한 소작인들은 배은망덕과 탐욕으로 그 얼마 안되는 재물마저 자기 것으로 만들려다가 자기 지위를 잃고 멸망하게 되었으니 ‘자업자득’이지요.

 

오늘 비유 속 소작인들은 밭 주인으로부터 참으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땅을 빌려주기만 할 뿐 관리는 소홀히 하는, 그러면서도 많은 소작료를 요구하는 여느 지주들과는 달리, 그 밭 주인은 제 손으로 직접 흙을 뒤집어 엎고 크고 작은 돌들을 골라내며 거름도 듬뿍 주었습니다. 그렇게 잘 준비된 밭에 좋은 포도나무들을 정성스럽게 심었고, 야생동물의 침입으로부터 작물을 지킬 ‘울타리’를 둘러쳤으며, 추수한 포도를 모아 즙을 짜낼 ‘확’을 만들고, 도둑의 침입에 감시하며 대비할 수 있도록 ‘탑’까지 세워주었습니다. 그러니 소작인들은 수확 때까지 웃자란 가지를 쳐주고 벌레를 잡아주며 잘 관리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입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정당한 소작료를 지불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더 갖고 싶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주인의 몫까지 탐냈고, 그 잘못된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 사달이 나고 만 것이지요.

 

소작인은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으로부터 밭을 ‘빌려 쓰는’ 사람일 뿐이지요. 주인의 것이기에 주인의 뜻에 맞게 써야 합니다. 또한 밭을 빌려서 썼으면 당연히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소작농들은 자신이 빌려 쓴 토지의 주인에게 수확한 것의 3분의 1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습니다. 물론 세금을 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 양이 너무 과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작인들은 상황이 다르지요. 밭 주인이 포도를 재배하기 위한 준비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주었고, 그들이 주인 눈치를 보지 않고 맘 편히 일하도록 멀리 떠나주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이 주인으로부터 받아누린 큰 혜택과 배려들을 생각하면, 소출의 3분의 1만 받겠다는 주인에게 오히려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올려야 할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감사’를 잊었고, 주인에게 소작료 바치기를 거부했습니다. 자기들이 열심히 일해서 얻은 소출을 주인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조건이 갖춰진 복된 자리에 부름 받았음을 감사하지 않았기에 기뻐하지 못했고, 기뻐하지 못했기에 주인에게 마땅히 바쳐야 할 소작료를 기꺼이 내어드리지는 못할 망정 주인의 명을 받고 온 종들에게 무자비한 폭력까지 휘두르게 된 겁니다. 바로 그런 자세가 그들이 ‘자녀’가 아니라 ‘소작인’으로 밖에 살 수 없는 이유이지요. 오늘 복음 속 비유에 등장하는 ‘소작인’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유다인들 가운데서도 핵심 권력층에 해당하는 그들을 ‘소작인’에 비유하신 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권한을 그분 뜻에 맞게 잘 사용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신앙의 열매를 맺도록 이끌어야 할 중요한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소명을 충실히 잘 수행했다면 ‘탈렌트의 비유’에 나오는 성실한 종들처럼 주인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더 깊은 신뢰와 사랑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를 넘어, 하느님의 복된 자녀라는 지위로 들어높여졌을 것입니다.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아들을 보낸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당신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그들에게 그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비유 속에서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자기 아들을 보내면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라고 말하지만, 탐욕에 사로잡힌 그들이 그러지 않을 것임을 이미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 잘못을 바로잡고 구원받을 기회를 주기 위해 아들이 죽임 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보낸 겁니다. 즉 주인은 자기 아들을 소작인들을 응징하기 위한 ‘심판자’로 보낸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구원자’로 보낸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 마지막 기회마저 제 발로 걷어차 버렸습니다. 목 끝까지 차오른 탐욕을 끝내 비워내지 못하고 그 탐욕에 사로잡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저질러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 죄악이 스스로에게 심판과 징벌이라는 커다란 재앙을 불러오고 맙니다. 자기들 손으로 구원자이신 주님을 심판자로 만든 꼴이지요.

 

하느님께서는 당신 나라를,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소작인들처럼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은총의 선물들로 제 욕심을 채우기에만 급급한다면, 그러느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회개와 선행, 사랑과 자비라는 소출을 내지 못한다면, 소작인이라는 제한적인 지위마저 박탈당하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하며 내가 가진 재물을 이웃과 기쁘게 나눈다면, 내 능력과 시간 중 일부를 기꺼이 하느님 몫으로 내어드리고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잘 사용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는 그분의 복된 자녀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소작인으로 부리려고 부르신 게 아니라, 당신 자녀로 삼으시려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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