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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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79 조재형 [umbrella] 스크랩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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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설립 50주년 준비위원회에서 ‘간담회’를 마련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은총의 50년, 희망의 50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무엇을 준비했는지 보고하고, 조별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50주년 기념 책자는 예전처럼 역사와 사건만 기록하는 책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진이 살아 있는 잡지 형태로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물론 본당의 역사와 중요한 기록도 소중하기에 그것은 전자책으로 만들어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간담회에서는 잘되고 있는 점도 이야기하고, 아쉬운 점도 이야기했습니다. 행사와 프로그램, 준비위원들의 열정은 잘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왜 50주년을 기념하는가”라는 의미가 더 분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더 많은 신자가 참여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세대 간의 대화, 학생들과 젊은이들의 참여, 영어권 신자들의 참여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재정을 위한 홍보도 더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고,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간담회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열매는 어느 날 갑자기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기다리고, 함께 가꾸어야 열매가 맺힙니다. 많은 분이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2027년 본당 설립 50주년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우리에게는 ‘추석’이라는 말이 더 정겹게 다가옵니다. 특별히 고향을 떠나 멀리 타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추석은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어린 시절 추석이 되면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심부름은 주로 제가 했습니다. 고모님 댁에도 가고, 외할머니 댁에도 선물을 가져다드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단순히 물건을 주고받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정’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면서 서로서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제가 된 뒤에는 추석이면 가족들이 함께 모여 가정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어머니에게 가정 미사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조상들을 위해 연도를 바치고, 미사를 봉헌하고,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추석의 밤은 깊어졌습니다. 이제 부모님도 하느님 품으로 가셨고, 저도 멀리 타향에 있으니, 가족들과 함께 모여 추석을 지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과 조상들을 기억하며 연도를 바치려고 합니다.
추석의 둥근 달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감사하고, 기억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감사할 이유를 알려줍니다.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주신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농부가 아무리 열심히 씨를 뿌려도 햇빛과 비가 없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건강도 은총이고, 가족도 은총이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공동체도 은총입니다. 우리 본당의 지난 50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 이름 없이 봉사한 신자들, 아이들을 신앙으로 키운 부모들, 성당을 지키고 가꾸었던 어르신들의 기도와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먼저 하느님의 은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50주년은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자랑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감사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재산 자체를 나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재물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창고를 더 크게 짓고, 더 많이 쌓아놓았지만 정작 하느님 앞에서는 가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것을 남기려고 합니다. 돈도 남기고, 집도 남기고, 업적도 남기고, 이름도 남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제2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참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설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은행 통장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명예도 아닙니다. 우리가 베푼 사랑, 어려운 이웃에게 건넨 손길, 용서한 마음, 말없이 감당했던 희생, 공동체를 위해 흘린 땀과 기도가 우리를 따라갈 것입니다.
한가위의 보름달은 혼자만 밝지 않습니다. 자기 빛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다. 부자에게도 비추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비춥니다. 고향에 있는 사람에게도 비추고 타향에 있는 사람에게도 비춥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러해야 합니다. 본당 설립 50주년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50년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은총을 다음 세대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어르신들의 신앙이 젊은 세대에게 이어지고, 한국어 공동체와 영어권 공동체가 서로 손을 잡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이 성당은 나의 성당이다.”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50주년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건물도 중요하고, 책자도 중요하고, 행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유산은 사람과 신앙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다음 세대를 품어주는 공동체,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공동체를 남길 수 있다면 우리의 50주년은 참으로 풍성한 결실이 될 것입니다.
한가위는 수확의 축제입니다. 봄에 뿌린 씨앗이 가을에 열매가 되었음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언젠가 수확의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시며 “참 좋은 열매를 맺었구나.”라고 말씀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밝게 떠오르는 둥근달처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떠난 부모님과 조상들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지금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누며, 우리보다 뒤에 올 다음 세대에게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풍요로운 한가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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