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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8월 26일 (수)연중 제21주간 수요일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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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함승수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191426 박영희 [cornelia2] 스크랩 2026-08-25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마태 23,23-26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유다인들에게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법규였습니다. 레위 27,30에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 주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대로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처럼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신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창조주 하느님께서 굳이 피조물인 우리로부터 뭔가를 받으셔야 할 필요는 없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십일조를 바치라고 요구하신 것은 당시 유다 사회의 작고 약한 이들을 돌보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십일조로 걷어진 양식과 재물들은 사제 직무에만 충실하기 위해 곡식을 재배할 땅을 할당받지 않은 레위지파 사람들, 경제활동을 할 수 없어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과부들, 그리고 외국에서 귀화하여 아직 삶의 터전을 제대로 잡지 못한 이주민들을 돕는 데에 사용된 것입니다. 즉 십일조의 근본정신은 하느님 사랑을 통해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비난받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런 십일조의 근본정신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박하와 회향, 근채처럼 짜투리 땅에 아주 소량만 심어 굳이 바칠 필요 없는 채소들은 철저히 양을 따져가며 십일조를 내면서, 정작 유다 사회의 작고 약한 이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 단지 무관심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게 어려워서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그들을 ‘죄인’이라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며, 그들을 통해 자기들의 상대적인 의로움과 신실함을 드러내어 과시하려고 든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삶 어디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인 의로움, 자비, 신의 같은 중요한 가치들은 찾아볼 수 없었기에, 주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른 그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하신 것이지요.

 

사회의 온갖 기득권을 누리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이들이 바치는 ‘십일조’의 규모는 그러지 못하는 이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바치는 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겁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이 바치는 십일조의 액수에 은근히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모습에 안타까움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 “많이 맡기신 이들에게 많이 청구하시는” 분이심을 모르지 않았을텐데도, 자기들이 세상에서 누린 그 많은 혜택과 명예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마음의 십일조’는 바치지 않고, 그저 자기들이 가진 재물들 중 일부를 내어놓는 것으로 할 도리를 다한 것처럼 여기는 나태하고 안일한 모습이 그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가진 재물 중 일부를 신자의 ‘의무’라고 하니까 마지못해 내어놓는 건 참된 봉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나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시는 우리 사회의 작고 약한 이웃들을 돌보기 위해, 자기가 가진 재물, 시간, 능력을 기꺼이 나누는 것이 참된 봉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봉헌을 기쁘게 받으시고 더 큰 축복으로 돌려주실 겁니다. 이런 ‘사랑의 순환’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깨끗이 하여 우리의 겉모습까지 하느님을 닮은 자녀의 모습으로 변화시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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