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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6년 8월 22일 (토)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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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묵상]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는 자리 _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을 준비하며..

191347 서하 [nansimba] 스크랩 2026-08-21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독서 에제키엘 43,1-7ㄷ / 복음 마태오.23,1-12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

에제키엘 43.7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는 자리

에제키엘이 본 환시 속 성전은 그 무엇도 하지 않습니다. 제사도, 찬양도, 몸짓도 없습니다. 다만 동쪽을 향해 열려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고 있었다"(에제 43,2)

그 영광이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성전이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텅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을 모실 자격을 '무엇을 함'에서 찾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더 많이 증명해야 그분이 오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제키엘의 성전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영광은 채워짐이 아니라 비워짐 속으로 들어옵니다.

 

성모님, 존재로 응답하신 분


성모님은 이 빈 성전의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천사 앞에서 그분이 하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한 문장,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38)뿐입니다.

이 말은 성취의 언어가 아니라 수용의 언어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열어드렸습니다. 에제키엘이 본 환시가 돌로 된 성전에서 이루어진 예언이었다면, 마리아 안에서 그것은 살로 이루어졌습니다.

 

높은 자리를 사랑한 사람들의 존재를 잃은 행위

 

복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것이다...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한다"(마태 23,5-6).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무언가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보이기 위해' 했습니다. 기도의 술, 옷단, 칭호 — 이 모든 것은 존재의 결핍을 행위로 메우려는 몸짓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할 때, 사람은 자리와 이름으로 자신을 세우려 합니다.

여기서 근본적인 대비가 선명해집니다. 성모님은 '있음' 자체로 하느님을 모셨고, 바리사이는 '보여짐'으로 자기 자신을 모셨습니다. 한쪽은 비워서 채워졌고, 한쪽은 채우려다 텅 비었습니다.

 

을 낮추는 사람, 다시 마리아에게로

 

복음은 이렇게 끝맺습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이 문장은 성모님의 마니피캇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분께서는 비천한 당신 종의 처지를 굽어보셨습니다"(루카 1,48).

낮아짐은 패배가 아니라 통로입니다. 자기를 비운 자리에만 영광이 머뭅니다. 에제키엘의 성전이, 그리고 마리아의 몸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나에게 묻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무엇을 '해서' 인정받으려 하는가, 아니면 그분이 머무실 자리로 그저 '있으려' 하는가. 그리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처럼 그저 열려 있는 존재가 되어보려 합니다. 증명하지 않아도, 채우지 않아도, 그 자리에 이미 영광이 머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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