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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생활묵상 : 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내 몸처럼 여겨져야 가능할 겁니다.

191343 강만연 [fisherpeter] 스크랩 2026-08-21

 

오늘 복음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이 세상 종교나 도덕을 떠나 수많은 철학자 위인들이 남긴 수많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 끌어모아도 사랑이라는 걸 설명하기가 좀처럼 힘들 때도 많을 것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 인류애로서 나누는 아름다운 사랑, 엄마와 아들, 아빠와 딸 기타 등등 수많은 관계에서 벌어지는 사랑 그런 많은 사랑을 말할 때 하나로 어떻게 표현하면 딱 들어맞는 표현이 있을까요? 사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랑의 2중 계명의 본질에서도 벗어나지 않을 표현이 있습니다. 사실 가장 정확한 표현은 예수님이 3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둘을 언급하셨지만 이 둘은 차등이 나는 순서가 정해진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원어에서 표현하는 서수의 개념도 우리가 표현하는 서수의 개념과 다를 뿐만 아니라 원어까지 아니어도 국어적인 표현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39절에 둘째도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명제로 봐서는 둘은 등식이 동일하다고 성립이 안 되지만 수학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의미론적으로 그 말씀이 내포하는 의미는 동일한 의미입니다. 다만 그 사랑이 하느님을 향해서 할 때랑 이웃을 향할 때랑 표현의 방식이 좀 다를 뿐이지 사랑의 본질은 동일합니다. 


여기서 복음에서는 이웃이라는 표현으로 나오지만 이때 이웃의 개념은 단순히 국어적인 의미에서 이웃의 의미로 보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다 아실 겁니다. 이때 이웃은 물리적인 거리로 표현된 이웃이 아닙니다. 만약 정말 국어사전에 냐오는 그 의미로의 이웃만을 의미한다면 이건 완전 이상한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범위가 한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실제 이웃이라고 표현했지만 여기서 이웃은 좀 더 폭넓게 봐야 할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예수님의 질문에 있는 그 이웃과는 좀 문맥상 다릅니다. 그럼 과연 어떤 대상이 이웃이 될까요? 이 이웃은 사실 종교랑 국적, 인종 그 어떤 제약 조건도 없는 사람이 다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톨릭 신자가 됐든 불교 신자가 됐든 그 어떤 것도 초월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나와 같은 존재처럼 여겨지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럴 때는 그냥 상대를 위해 배려하는 것 정도 수준의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타인을 그렇게 사랑하려면 두 존재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로 여겨져야 그게 가능할까요? 단순히 그냥 느낌이나 감정이 좋아서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수준으로는 한다고 해도 일시적이거나 오랜 시간 항구적으로는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항구적인 사랑이 되려면 그 조건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상대를 나와 같은 존재로 동일시할 만큼 여겨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형제 사랑도 이래야 하는데 이런 형제 사랑을 한다는 건 솔직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완전 불가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럼 과연 어떤 사람이 그런 불가능에 가까운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런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 가능할 것입니다. 이때 희생은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희생이어야 됩니다. 이때 이 대상이 조건적인 의미가 될 때는 이미 그게 형식적으로, 표면적으로는 희생처럼 보일 뿐이지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희생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해서 하는 희생에는 그 어떤 조건도 없어야 하지만 계산이 들어가면 그건 거래이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조건적인 사랑이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개 보면 타인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하지만 자기가 베풀어야 하는 사랑에는 조건을 달려고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 본성을 깨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한쪽만 희생한다고 해서 그게 될까요?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게 가능하려면 거의 성인 수준을 초월해야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십자가 성 요한이 하느님께 한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에게 만약 어떤 희생을 했다고 해도 그게 희생이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하지 않을 정도의 마음이 되어야 바로 그게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나의 희생을 알아줬으면 하는 내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건 상대를 향해 보여주기 위한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그런 것조차도 뛰어넘는 사랑 정도가 되어야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 그 둘 사이의 관계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사랑할 때 하는 희생은 내가 좀 더 몸을 아끼지 않고 타인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게 많이 있는 경우에도 할 수 있을 여력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희생은 신앙으로 교육으로도 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내와 연습'입니다. 인내는 기본이겠지만 희생도 선천적으로 착한 사람이 더 많이 하고 악하다고 해서 못한다기보다는 그게 잘 안 되는 것은 어려워서 안 되는 것도 있지만 힘들어도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연습을 하면서 내가 이만큼 사랑을 했으니 당신도 이만큼 해야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들면 그때도 그런 생각을 앞으로는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또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연습을 하고 또 연습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몸이 그냥 자연 반사적으로 계산을 하지 않는 몸으로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상대가 내 몸처럼은 좀처럼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노력을 하게 되면 이건 분명할 겁니다. 그런 정도 수준의 사랑을 한다면 사람의 수준에서는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은 할 수 없을 사랑을 한다고 말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입으로만 하는 형식적인 사랑도 못할 때도 많습니다. 속으로는 미워하면서 겉으로는 미워하지 않는 것처럼 표정을 지어야 할 때도 살다 보면 많이 있을 겁니다. 이런 수준은 당연히 벗어나야 할뿐만 아니라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장 큰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복음에는 이어서 이에 대한 결과는 설명이 없습니다. 굳이 결과가 없다고 해도 분명한 사실은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우편에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을 지킨 사람이라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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