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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 : 혼인잔치에서 선택된 사람은 왜 선택됐는가?

191320 강만연 [fisherpeter] 스크랩 11:33

 

오늘 복음은 흔히 잘 아는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아들의 혼인잔치를 통해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한 내용입니다. 잔치라는 건 경사 같은 일이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가톨릭 인준 영어 성경 세 권과 주석을 일일이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 주해서도 참고했지만 이건 여기서 생략하겠습니다. 그동안 오랫동안 이 복음을 강론을 통해서 들은 내용이 아마 주를 이룰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일반적인 주해의 범위 안에서 새로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사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그러면 복음이나 묵상하자고 해서 밤새 묵상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새벽에 오늘 복음에 대해 다른 가톨릭 버전 영어 성경을 참조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걸 참조한 묵상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혼인예복에 있습니다. 혼인예복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강론을 통해서 많이 들어보셨겁니다. 좀 더 생각해봤습니다. 여기서 왜 임금은 아들의 혼인잔치에 처음 초대를 한 후에 잘 응하지 않자 그 상황에 대해 종들에게 한 말을 잘 묵상해봤으면 합니다. 8절에 보면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히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이렇게 해서 초대를 거절한 사람도 있지만 이 문맥을 보면 초대를 했더니 초대에 응했던 사람도 있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근데 그 사람들이 마땅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실 문맥상 보면 이 구절은 혼인 예복을 입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한 후에 이 내용이 왔다면 좀 더 자연스러운 게 되는데 왜 먼저 언급을 하셨을까를 엄청 고민했습니다. 6절과 같은 내용인 역사적인 배경도 생략하겠습니다. 

 

여기서 '마땅하다'라는 표현은 '응당, 당연하다'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영어성경과 국어사전 둘 다 비교를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땅하다'의 의미는 '어울린다'의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한국 성경만 봐서는 솔직히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영어를 참고하면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잔치에 초대가 돼 오긴 왔는데 그들은 혼인 잔치에 있어야 할 손님으로서의 자격이 맞지 않다는 그런 의미를 일차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왕은 잔치라는 건 좋은 경사이기 때문에 하객이 많이 있는 게 좋은 일이 될 겁니다. 처음엔 기득권 세력을 초대해 기회를 줬지만 그 기회의 공이 많은 사람들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기득권이 배제된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모두에게 문호가 열렸다는 걸 암시할 것입니다. 

 

문맥상 '아무나'라고 한 표현을 보면서 정말 '아무나'라는 뜻은 아닙니다. 신분이나 계층에 조건이 없는 그런 상태의 '아무나'인 것이죠. 그러니 모든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야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아들 결혼식이라고 해도 하객이 없다고 해서 어중이떠중이까지 들여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잔치의 의미가 무색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임금은 아무튼 초대받은 사람들을 살펴볼 필요은 있었을 겁니다. 꼭 그래서 그랬다고는 볼 수 없지만 사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복을 입은 사람이 공교롭게도 한 명입니다. 

 

왜 마태오 복음사가는 굳이 한 명으로 설정을 했을까 하는 것도 흥미를 끌어내는 대목입니다. 아마도 좀 더 강한 의미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그냥 혼인 예복을 좀 안 입었다고 그것도 경사로운 아들 혼인잔치에서 그럴 저주 같은 표현까지 하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고 생각하면 이해를 하기 좀 어려운 내용인 것처럼 보이지만, 역으로 발상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오히려 반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상에도 계시록이라든지 이런 걸 보면 옷이 상징하는 게 무엇인지 계시록 외에도 나오지만 단순히 옷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서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이건 성경적인 배경을 좀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입고 온 예복은 그들이 직접 집에서 입고 오는 옷이었다면 상황은 다를 것입니다. 요즘처럼 말입니다. 예식이 있으면 집에 있는 정장이라든지 그에 맞는 옷을 입고 가는 그런 상황이 아닌 것입니다. 그당시에는 왕실에서 이미 그런 잔치가 있으면 구비를 해 놓고 그 옷을 입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황이 맞는 것입니다. 아무나 거리에 가서 초대를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옷까지 구비를 해오지 않고 왔다고 그렇게 한다면 그게 초대의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해보면 이때 왕이 그런 사람들을 저주 아닌 저주 같은 말을 한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사실적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복음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표현을 하자면 하늘나라 혼인잔치이지만 잔치에 참석할 땐 그에 합당한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법도는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왕실에서 주면 입으면 되는 것이죠. 문제는 그런 예법조차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상징하는 복음적인 의미가 바로 순종이 될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옷의 본질을 봐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옷을 교체하는 것처럼 환복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옷은 천상 잔치에는 그에 맞는 옷을 입어야 되는데 그냥 세상 옷을 입은 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옷은 단순히 옷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는 자기가 살아온 삶 그 자체로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석이나 주해를 보면 옷은 회개의 의미라고도 나오기도 합니다. 단순히 그런 의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맞는 의미이지만 교부들의 생각을 보면 좀 더 포괄적으로 나옵니다. 그런 것까지 포함하면 이런 식으로 오늘 복음을 이해하면 좀 더 괜찮을 듯하기도 합니다. 

 

결국은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옷이라는 것으로 비유를 했지만 단순히 환복을 한 그 자체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삶대로 순종하지 않는 삶, 다시 말해 바로 초대에 왔긴 왔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상태를 말하겠죠. 바로 그게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의 말씀이라든지 이런 것을 무시하는 태도를 말한다고 해도 무리는 안 될 것입니다. 바로 이건 신앙과도 직결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결국은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변화가 없는 신앙은 결국은 초대를 받았지만 이때 초대는 넓게 해석하면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불림을 받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하느님 나라에 입성할 수 있게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복음 말미에 불림을 받은 이는 많지만 선택된 이는 적다고 했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선택권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는 오늘 복음에서 혼인잔치의 잔치는 하늘나라에서 있을 잔치일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신앙에 변화가 없다면 바로 혼인 예복을 입는 걸 거절한 사람과 동일한 것입니다. 결국은 변화가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변화가 되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사람과 같다는 걸 오늘 복음은 다시 한 번 더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는 듯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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