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묵상시 ] 글자 너머에 계신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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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57 윤홍선 [hsyoonrda] 스크랩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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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너머에 계신 당신 / 윤홍선
— 성경을 읽으며
책장을 다물고
검은 문자들이
밤의 정적 속으로 몸을 누일 때,
나는 비로소
낱말의 단단한 테두리를 넘어
당신이라는 깊은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말씀의 자음과 모음 사이,
굳게 닫힌 글자의 껍질이
조용히 숨을 쉬기 시작하면,
거기,
나지막이 스며드는 당신의 숨결이 있습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와
먼지 묻은 발을 감싸시던
그 밤의 조용한 손길이 있습니다.
당신은
저 멀리 찬란한 보좌 위에 계시지 않고,
내 영혼의 가난하고 나지막한 방,
그늘진 구석에 다정히 앉아 계신
가장 따뜻한 어둠입니다.
이제 나는 눈을 감고
내 안의 가장 조용한 거처에서
책이 아닌
당신의 마음을 읽습니다.
그곳에는
세상을 오래도록 품어 온
당신의 침묵만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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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책을 다물고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비로소 진짜 대화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종종 텍스트라는 견고한 성벽 안에 스스로를 가두곤 합니다. 구절구절을 외우고, 낱말의 뜻을 파헤치며, 정교한 신학의 틀로 진리를 설명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빽빽하게 적힌 글자에만 집착할 때, 마음은 점차 차갑고 단단해집니다. 어느새 선명해진 문자들은 타인을 잘라내는 서슬 푸른 잣대가 되거나, 스스로를 죄어오는 율법의 사슬이 되어 영혼의 호흡을 막아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남기신 흔적은 서늘한 법전이 아니었습니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앞에서 돌을 쥐고 서 있던 사람들의 당당한 정의보다, 떨고 있는 한 영혼의 깊은 두려움을 먼저 읽어내셨던 그 눈빛이었습니다. 화려한 성전의 높고 찬란한 보좌가 아니라, 먼지 날리는 길가에 앉아 낮고 그늘진 이들의 곁을 가만히 지키시던 따뜻한 손길이었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글자의 껍질이 조용히 깨어질 때 찾아옵니다. 검은 문자들이 밤의 정적 속에 몸을 누이고, 선명했던 경계들이 무너져 내릴 때, 비로소 말씀 뒤에 가만히 숨 쉬고 계신 그분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분은 저 멀리 도달할 수 없는 높이에 계신 엄격한 재판관이 아닙니다. 내 가난하고 조용한 영혼의 방,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늘진 구석에 찾아와 조용히 곁을 내어주시는 '가장 따뜻한 어둠' 이십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낱말의 조합이나 지식을 좇는 행위가 아니라, 그 언어 너머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그분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입니다.
이제 눈을 감고, 내 안의 가장 깊고 조용한 거처로 들어갑니다. 그곳에는 세상의 거친 소음도, 나를 짓누르던 당위의 무게도 없습니다. 오직 세상을 오래도록 온전히 품어 온 그분의 거룩한 침묵만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삶에 조용히 흐르고 있을 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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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성경읽기, 복음 묵상, 가톨릭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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