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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 :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하는 목숨에서 '목숨과 생명'은 어떤 의미 차이인지?

191115 강만연 [fisherpeter] 2026-08-10

 

모처럼 복음묵상을 해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목숨이라는 단어와 생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두 단어의 의미를 가지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목숨이라는 말과 생명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의미를 단순히 국어적인, 사전적인 의미를 가지고 논의를 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저 역시도 하느님의 말씀을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 수 있겠으며 또 안다고 해도 그 내용이 이렇다고 하는 형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조차 교만에 가까운 행동일 것입니다. 다만 저는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이런 의미로 전달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 추론은 맞는 추론이라고 주장도 하지 않습니다. 저의 추론이 맞다는 확실한 근거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추론을 하는 건 저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를 해서 이렇게 받아들이고 이해를 한다면 저한테 신앙적으로 유익할 거라고 생각을 하며 그렇게 해서 앞으로의 신앙에 적용해 실천하려고 한다면 그런 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의 이런 생각이 일면 일리가 있다고 공감이 가시는 분이 계시면 그분 역시도 이를 참고해 신앙에 유익이 된다면 그야말로 참으로 좋은 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설령 그 과정이 미비한 부분이 있지만 그 결과가 긍적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면 저는 저의 묵상글이 좋은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내용 한 부분인 25절을 보면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전혀 와 닿지 않는 내용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또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자기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오늘은 이 구절을 바탕으로 해서 나름 저의 개인적인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인간은 누구나 생존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고 싶은 욕망, 욕구를 말합니다. 인간의 이런 기본적인 본능을 거스른 말씀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서 주십니다. 우리의 목숨은 인간적으로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 말에도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미 성경에서도 우리의 목숨을 관장하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 손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목숨과 생명의 원어의 의미를 가지고 얼마든지 설명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오늘 묵상에서는 제외하겠습니다. 저는 평신도이기 때문에 평신도 수준에서만 묵상하려고 합니다. 국어의 사전적인 의미만으로도 하느님의 말씀을 성경의 문맥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깊이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맥 상호간의 관계를 잘 파악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의미를 잘 이해하면 오늘 복음의 의미가 좀 더 잘 와 닿을 수 있을 거라 사료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목숨이라는 이 표현은 인간적인 한계치가 설정된 생명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목숨이라는 건 숨이 나간 상태에서 다시 들어오지 않는 순간이 있다면 이는 더 이상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그런 것만을 상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목숨이라는 것도 인간의 의지에 따라 연장을 할 수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역시도 최종적으로 관장하시는 분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왜 그렇다면 자기의 목숨을 미워해야 영원한 생명인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하셨는지는 거대한 신학이나 성경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오늘 복음은 문맥에서 어느 정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사람인 인간도 세상적인 일을 이치에 맞게 해석하고 생각을 하는 존재인데 하물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그런 원리를 역행해서 말씀하신다는 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25절 후반부의 내용을 잘 보면 여기에 힌트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장난을 하신 게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잘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자기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고 하신 말씀 앞에 전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라는 전제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는 숨을 쉬어야 합니다. 한 번 나간 숨이 다시 들어오는 이 과정이 계속 무한반복이 되어야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느 순간 되지 않으면 목에 숨이 들어가지 않는 상태가 되면 그 상태가 죽음입니다. 언어논리로 보면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해 줄 수 있는 목숨을 가지게 될 것이다"는 말씀인데 표면적으로는 논리가 맞지 않지만 사실 여기에는 우리가 아는 개념으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을 겁니다. 목숨과 생명은 밀접한 관계를 맺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생명은 단순히 지금 현재의 목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좀 더 넓은 광의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주로 영원한 생명과 같이 영생을 언급할 때 많이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목숨이 끊어지면 생명도 끊어졌다고 생각을 하기 십상입니다. 그런 논리로 오늘 복음을 접근하면 비논리적인 접근이 될 것입니다. 만약 목숨이 끊어졌다고 해도 생명은 끊어지지 않았다는 논리로 설명이 되어야 이 문맥이 합리적인 논리로 명제가 성립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될 수 있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의도로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묵상하는 게 어쩌면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암시와 힌트가 바로 24절에 이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전체를 보면 다른 성경에서 말고 이 부분에 한정해서 묵상을 해보면 이 내용에서 이때의 목숨은 단순히 사람의 목숨을 의미할 수 있지만 좀 더 나아가서 보면 ‘자기애‘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면 이해가 좀 더 잘 될 수 있고 또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자기애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럼 자기를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그건 그렇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자기애라는 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왜 이런 논리로 접근해야 하는가 하면 복음이나 성경은 단 두 말로 압축할 수가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사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이웃 사랑을 하느님 사랑과 차등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차등을 둔 것처럼 표현되지만 사실 원어적인 표현으로 보면 동등한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건 의미상 동급이라는 뜻이 아니고 사실 우열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이웃사랑도 그만큼 하느님 사랑만큼 중요하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하는 게 정통적인 성경상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상 이웃사랑의 의미를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한 게 바로 자기의 몸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것처럼 사랑을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의 몸을 사랑하는 것과 자기애는 좀 더 다른 의미가 될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정도를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만큼 사랑할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근데 그 사랑의 방향이 자기를 향할 때는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걸 경계하신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 될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려면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삶처럼 살아야 그게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자기만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 목숨에 애착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저 이 세상 현세만을 위한 생명으로서의 가치만 가지지만 그게 아니고 자기의 목숨만큼이나 다른 생명의 목숨까지도 사랑하려고 하려면 자기애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필히 자기의 목숨을 미워해야만 할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선 자신의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오늘 복음을 접근하면 좀 더 잘 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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