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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7월 14일 (화)연중 제15주간 화요일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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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이병우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190611 최원석 [wsjesus] 스크랩 10:01

이병우 신부님_"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11,20)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오늘 복음(마태11,20-24)은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은 고을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 곧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많은 기적들을 보고도, 하느님의 은총을 크게 입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11,22ㄴ.24ㄴ)

 

하느님이신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본질)은 '회개'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회개'입니다.

'구체적인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돌아가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신구약성경 73권 전체가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이며, '하느님의 큰 기쁨이자, 우리의 큰 기쁨'입니다.

 

날마다 '바로 지금'이 '회개의 때'요,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어느 수녀님께서 제게 이런 팝송을 보내주셨습니다.

팝송의 제목은 'One moment in time'(삶의 한 순간)입니다.

'힘든 삶을 사는 모든 이에게 위로가 되는 팝송'이라고 합니다.

노래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난 나의 삶에서 한 순간을 원해요.

(I want one moment in time)

내 삶의 그런 한 순간을 주소서.

(Give me one moment in time)

만약 그 한 순간을 꼭 쥔다면 당신은 인생의 승자입니다.

(If you seize that one moment in time, You're a winner for a lifetime)

내 생애의 최고의 날을 위해서 그 한 순간을 주소서.

(Give me one moment, for my finest day)

나는 자유로워질 겁니다.

나는 영원히 자유로워질 겁니다.

(I will be free)

(I will free eternity)

 

나에게 있어 그 '한 순간(one moment)'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주어진 '바로 지금'이 '회개의 때'이고. '터닝포인트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경기도 용인땅(한덕골성지)에서 태어나, 일반대학교를 졸업하고 짧은 직장 생활을 하다가 1995년 32살(만30살)의 늦은 나이에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서울가톨릭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서, 성 프란치스코처럼 살고 싶어서.

그리고 2004년 6월 28일, 서품 동기 중에서 제일 많은 나이(41살)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2026년 올해는 저의 사제서품 22주년의 해입니다.

늦게 사제가 되었기 때문에, 늘 남들보다 두 세배로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복음적 자유 안에서 '보다 더(radical)'를 살고 싶어서, 2019년 3월에 수도회를 떠나 마산교구로 이적했습니다.

수도회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교구로 이적해 와서 최근까지도 저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그리고 저의 영원한 사부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보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저의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돌아가신 이정숙사비나 어머님의 '열정(땀)'과 이종만마태오 아버님의 '급한성격'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

저의 그 열정과 급함이 좋은 결과도 가져왔지만,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빌어 그동안 제가 살아오면서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 상처받은 모든 형제자매님들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저는 '지금(now)'이 저에게 주어진 '한 순간(one moment)'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일은 참으로 힘들었지만, 많은 분들의 기도로, 그 간절한 기도의 힘으로 3일 만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마산가톨릭우리농을 떠났지만,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다시 태어나는 '회개의 때'요,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의 시간'으로 생각하면서, 나의 자유(부활)와 나의 영원한 자유(영원한 생명)를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한 순간(one moment)'을 꼭 잡겠습니다.

 

'지금(one moment)'은 저에게 주어진 매우 값진 '쉼의 시간'입니다. 이 쉼의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겠습니다.

육체적으로도 잘 쉬고, 그래서 영육이 함께 다시 부활하는 은총의 기회로 삼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서두르지 않고 잘 쉬어가면서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겠습니다.

 

고난의 때처럼 여겨지는 '지금. 이 한 순간(one moment)'은 '은총의 시간'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사도18,10)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7,9ㄴ)

 

(~ 시편90,17)

 

이병우 루카 신부

 

김건태 신부님_회개 없이는 불행

구약성경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모습을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예언자 하면 흔히 ‘미래를 말하는 사람’ 또는 ‘미래에 관심을 쏟는 사람’ 정도로 인식할 때가 많으나, 사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 곧 ‘하느님의 대변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니, 예언자들 가운데 예언자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취하시는 모습, 더 정확하게 말해서 복음 저자들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서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모습을 자주 인용하는 경우를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답지 못한 왜곡된 삶을 지적하고 비난하고 고발할 때의 예언자들, 저주 또는 불행을 주제로 말씀을 선포하면서 결국 회개의 길로 이끄는 사명에 충실한 예언자들의 모습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 곧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을 대상으로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이다.” 이 고을들 모두, 지금은 폐허의 상태로 성지 순례객들이 즐겨 찾아드는 곳이기는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꽤 이름이 알려져 있던 장소들, ‘기적을 많이 일으키신 것을 보면’ 예수님도 자주 찾으셨던 장소들로서 모두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코라진’은 가파르나움과 매우 가까이 있으며, 회당 터가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크기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어부의 집’을 의미하는 ‘벳사이다’는 문자 그대로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베드로와 안드레아 등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한편, 이 두 고을과 비교해볼 때, ‘가파르나움’은 더 심하게 비난받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가파르나움에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 치유, 중풍 병자 치유, 회당장 야이로의 딸 소생, 백인대장의 종 치유 등 정말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티로나 시돈 수준이 아니라, 저주받아 사라진 소돔에 비교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난의 정도를 대변해 줍니다.

당신의 집 이상으로 자주 찾아와 그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신 목적은 오로지 하나, 회개에 있었음에도, 회개를 통한 구원에 있었음에도, 이 세 고을은 회개를 거부했기에, 이제는 존속할 가치가 없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교도 지역을 잡신들이 득실거리는 지역, 따라서 구원이 도저히 불가능한 지역으로 단죄해 온 유다인들이 그 지역의 사람들만도 못한 처지로 격하되어 버리니, ‘불행’ 또는 ‘저주’의 강도는 결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를 위해 정성을 다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거부는, 곧 회개 없는 삶의 끝은 불행임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회개의 삶, 주님께 등을 보인 삶을 정리하고 다시 그분을 향해 마주하는 삶임을 가슴에 새기며,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그분의 뜻에 걸맞은 것인지 조심스럽게 살피며 신앙인다운 발길을 재촉하는 하루, 할 수 있다면 이웃을 도와 함께 걸어가는, 의미 있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회개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을 향해 탄식하시며 말씀하신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21절)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은 주님의 직접적인 은혜와 기적을 목격했다. 벙어리가 말하게 되고, 눈먼 이가 보며, 다리 저는 이가 걸었으며, 죽은 이가 살아났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굳어져 회개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에 깊은 슬픔과 탄식을 표현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하느님의 은혜가 풍성한 곳일수록 회개의 책임도 크다. 큰 은혜를 거부하면 더 큰 심판이 따른다.”(Enarrationes in Psalmos, 36,7 요약) 즉, 받은 은혜만큼 우리의 응답도 중요하다. 은혜를 무시하면 그 책임은 더욱 무겁다 

 예수님께서는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24절)라고 하시며 교훈을 주신다. 티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사도들의 가르침을 믿고 회개하였다.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주님을 직접 보고 은혜를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큰 책임을 지게 된다. 이처럼, 은총의 깊이와 책임은 비례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빛을 본 자가 그 빛을 거부하면 더 큰 어둠 속에 남게 된다.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를 단죄하는 길이다.”(Homiliae in Matthaeum, 61,3 요약) 

 우리는 매일 수많은 은혜를 받고 있다. 생명, 가족, 일상, 믿음 공동체, 성사 등. 그 은혜에 감사하며, 마음을 돌이켜 회개와 순종으로 응답해야 한다. 믿음의 선물은 그만큼 행동과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 주님의 기적과 사랑을 경험하면서도 마음을 굳게 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식은 우리를 향한 사랑과 경고이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통해 우리의 삶을 회개와 성숙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의 불신과 회개하지 않음은 우리에게도 경고가 된다. 은총을 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와 기적을 마음에 받아들여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선택을 해야 한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하면서도 늘 회개하고, 믿음 안에서 행동으로 응답하는 삶을 살도록 다짐하여야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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