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ㅣ체험
- 전삼용 신부님_단식은 잃어버린 신랑을 되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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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37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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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는 불편한 시비가 하나 등장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따지듯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 9,14 참조)
이 물음을 가만히 뜯어보면, 겉은 순수한 신학적 질문 같지만 속에는 독한 교만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굶어 가며 법을 지키는데, 저 먹고 마시는 무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저들과 수준이 다르다.' 곧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선민의식입니다. 오늘 우리라고 다르겠습니까. 금육재를 지키고 사순 절식을 하면서 속으로 은근히 목에 힘을 줍니다. '나는 금요일에 고기도 끊고 미사도 빠지지 않는데, 저 냉담자들은 왜 저 모양인가.' 자기를 거룩한 예외로 여기며 남을 판단하는 그 마음, 그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낡은 가죽 부대의 냄새입니다. 이 교만한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본질을 통째로 뒤집는 대답을 던지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참조)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내가 얼마나 거룩한지 보여 주는 훈장'에서, '신랑을 빼앗겼을 때의 몸부림'으로 완전히 옮겨 놓으십니다. 단식은 과시가 아닙니다. 단식은 내 영혼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잃어버렸을 때, 그분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갈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다 신랑을 빼앗깁니까. 내 마음이라는 부대 안에 세상의 쾌락과 자존심과 탐욕을 꽉꽉 채워 넣었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들어오실 자리가 한 뼘도 남지 않으니, 그분이 튕겨 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단식이란, 신랑을 다시 모시기 위해 내 안에 쌓인 것들을 비워 내는 일입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요괴 가오나시를 떠올려 보십시오. 본래 형체도 목소리도 희미하던 이 요괴는, 소녀의 사랑을 얻으려 온천장의 탐욕을 이용해 사람과 음식을 마구 집어삼키며 집채만 한 괴물로 부풀어 오릅니다. 그러고는 금덩이를 내밀며 구애하지만, 소녀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절대 줄 수 없어." 사랑을 빼앗겼다고 느낀 가오나시는 폭주하며 모든 것을 부숩니다. 이때 소녀가 그를 구원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쓴 경단을 억지로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삼킨 가오나시는 몸부림치며 집어삼켰던 모든 것을 토해 내고, 다시 본래의 작고 얌전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텅 빈 그 모습이 되어서야 비로소 평온을 찾습니다. 이것이 신랑을 빼앗긴 자가 겪어야 할 단식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금덩이와 인정을 삼키며 자아를 거대하게 불려 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오물로 부푼 괴물 곁에 머무시지 않습니다. 신랑을 되찾는 길은, 쓴 경단 같은 십자가의 단식으로 그 찌꺼기를 전부 토해 내는 것뿐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식의 본질을 가장 뼈저리게 보여 준 이가 다윗입니다. 그는 밧 세바를 범하고 충신 우리야를 죽이는 큰 죄를 지었고, 그 죄의 열매로 태어난 아이가 병들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왕의 체면을 모두 벗어던지고 맨바닥에 엎드려 식음을 끊고 단식합니다. 신하들이 일으켜 세우려 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의 단식은 거룩함을 보이려는 쇼가 아니라, 죄로 인해 신랑이신 주님의 은총을 빼앗긴 영혼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끝내 숨지자, 다윗은 훌훌 털고 일어나 몸을 씻고 음식을 먹습니다. 의아해하는 신하들에게 그는 말합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 단식하며 운 것은, 주님께서 혹시 나를 가엾이 여기시어 아이를 살려 주실지도 모른다 여겼기 때문이오."(2사무 12,22 참조) 보십시오. 다윗의 단식은 제 뜻을 관철하려는 투쟁이 아니라, 빼앗긴 주님의 자비에 매달려 자기를 온전히 그분 처분에 내맡기는 순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정해지자 그는 미련 없이 단식을 멈춘 것입니다. 구약은 이 진실을 나라 전체의 이야기로도 들려줍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이라는 신랑을 저버리고 우상과 탐욕으로 제 부대를 채웠을 때, 예언자 요엘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제라도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며 나에게 돌아오라."(요엘 2,12 참조) 단식은 곧 돌아옴이었습니다. 빼앗긴 신랑께로 방향을 되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단식하면서도 마음이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가포식 없이 굶기만 하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내 마음은 새 부대입니까, 낡은 부대입니까. 성당에 나와서도 남을 평가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분노하며, 내 기도와 희생을 청구서처럼 내민다면, 우리는 아직 바리사이의 낡은 부대를 껴안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늘 메마르고 불평만 가득하다면, 그것은 이미 삶에서 신랑을 빼앗겼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단식은 다이어트가 아닙니다. 단식은 내 영혼을 좀먹는 예외 의식을 도려내는 수술이며, 가오나시처럼 삼킨 세상의 오물을 토해 내어 신랑이 머무실 방을 닦는 거룩한 노동입니다. 오늘 성체성사 앞에 나아가며 이렇게 청합시다. "주님, 제 안의 세상 것들을 철저히 비워 내오니, 오직 신랑이신 당신 하나로 이 텅 빈 부대를 가득 채워 주십시오." 이렇게 비움의 단식으로 잃어버린 신랑을 되찾아, 참된 기쁨과 구원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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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4일 토요일 / 카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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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04.토 / 한상우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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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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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신부님_ 언제나 청춘이시며 영원한 새로움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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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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