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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6월 21일 (일)연중 제12주일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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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전삼용 신부님_근심 중에 성체 영하지 말기를

190202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6-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급소를 찌르는 말씀을 단호히 선포하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 6,24.34 참조) 나는 오늘 이 말씀을 한 가지 초점으로 좁혀 묵상하려 한다. 곧, 근심하며 성체를 모시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을 근심하는 그 마음이, 아버지께서 생명처럼 내어주시는 유산의 맛을 우리 입에서 앗아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명백한 말씀을 교묘히 비틀며 산다. "신부님, 돈이 있어야 하느님 일도 하고 이웃도 돕지요. 넉넉히 채워주시는 것도 축복 아닙니까?"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하느님과 돈이라는 두 주인을 한 손에 움켜쥐려는 탐욕이다. 거룩한 성체를 모시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주식 창을 열어 한숨짓고, 집값이 내려갈까 밤잠을 설친다. 온전히 의탁하라는 말씀은 현실 모르는 옛이야기로 치부하고, 제 입맛대로 "적당한 타협"이라는 덧칠을 해 버린다. 하느님의 법을 제 탐욕에 맞추어 뜯어고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가 이를 날카롭게 보여 준다. 농부 바흠은 "땅만 넉넉하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는 탐욕에 사로잡힌다. 마침내 그는 한 부족에게서, 해 뜰 때 출발하여 해 지기 전에 제자리로 돌아온 만큼의 땅을 모두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규칙은 단 하나,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흠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욕심을 부리다 그 한계를 넘기고 만다. 지는 해를 보고 미친 듯이 달려 가까스로 출발점에 닿았으나,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는다. 탐욕의 대가로 그가 얻은 땅은, 시신을 묻을 두 평 무덤이 전부였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하신 그 선을 넘어 제 식대로 달리면, 영혼이 이렇게 피를 토하며 죽는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내일 걱정을 하지 말라 하셨는가. 탈출기의 만나 사건이 그 알레고리를 환히 밝혀 준다. 하느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날마다 만나를 내려 주시며 한 가지 율법을 주셨다. "아무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마라."(탈출 16,19 참조) 그러나 내일 굶을까 두려워진 사람들은 이를 어기고 만나를 몰래 숨겨 두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전한다. 거기에 구더기가 끓고 악취가 풍겼다(탈출 16,20 참조). 바로 여기에 오늘 묵상의 심장이 있다. 만나는 날마다 내려 주시는 아버지의 양식이요, 훗날 내어 주실 성체의 예표다. 내일을 걱정하여 만나를 움켜쥐는 행위는, 나를 먹이시는 아버지를 믿지 못하는 가장 지독한 불신이다. 그리고 그 불신은 양식을 썩혀 버린다. 어제의 만나는 더 이상 양식이 아니라 구더기였다. 이것이 곧 우리 이야기다. 근심을 품고 성체를 모시는 것은, 어제의 만나를 숨겨 두는 일과 같다. 성체는 본디 영혼의 양식, 아버지께서 오늘 내게 내려 주시는 하늘 만나다. 그런데 내일의 주식과 집값과 노후를 근심하며 그것을 모시면, 그 거룩한 양식의 맛을 우리는 도무지 느끼지 못한다. 근심이라는 구더기가 성체의 단맛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같은 성체를 모셔도, 어떤 이는 하늘의 생명을 맛보고 어떤 이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 채 돌아선다. 양식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받는 마음에 근심이 끓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예전에 본 한 영상이 그 마음을 절절히 보여 준다. 고등학교 삼 학년 수험생들에게 물었다.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이냐?" 아이들은 저마다 즐거운 꿈을 적어 냈다. 이어서 물었다. "네 수명이 딱 일 년 남았다면, 그 일 년 동안 꿈을 이루겠느냐, 아니면 오억 원을 받겠느냐?" 아이들은 하나같이 답했다. "당연히 제 꿈이 중요하지요." 이번에는 그 아이들의 아버지들을 불러 똑같이 물었다. 아버지들의 꿈도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가족과 떠나는 배낭여행, 시골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아내와 사는 것. 그런데 "당신의 수명이 일 년 남았다면, 꿈과 오억 원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 묻자, 아버지들은 한결같이 답했다. "당연히 오억 원입니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돈을 아내와 자식에게 남겨 주고 싶습니다." 보라, 바로 여기에 오늘 복음의 비밀이 있다. 아이들은 제 꿈을 근심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목숨과 맞바꾸어 남겨 주려는 그 유산을 가벼이 여긴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 꿈을 접고 제 목숨까지 팔아서라도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려 한다. 자식이 제 꿈만 바라보며 근심할 때, 아버지가 생명처럼 건네려는 그 유산의 값을 자식은 알지 못한다. 우리가 꼭 그러하다. 우리는 내일의 내 꿈, 내 안위, 내 계획을 근심하느라, 아버지께서 당신 외아드님의 목숨과 맞바꾸어 우리 손에 쥐여 주시는 유산 ― 곧 성체 ― 의 값을 알아보지 못한다. 세상의 죄 많은 아버지도 자식을 위해 제 꿈과 목숨을 돈과 바꾼다. 하물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어떠하신가. 당신께서는 하나뿐인 아드님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그분의 살과 피를 성체로 먹여 주신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유산이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2 참조) 아들까지 내어 주신 분께서 우리의 내일을 안 챙기시겠는가. 그러니 내일을 근심함은 단지 소심함이 아니라, 이 위대한 부성애를 짓밟는 교만이다. 근심하며 성체를 모심은, 아버지께서 목숨으로 물려주신 유산을 받으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하고 외면하는 자식의 불효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참 일꾼들은 굶주림의 위협 앞에서도 이 유산을 끝까지 신뢰하였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의 일화가 그러하다. 어느 날 고아원의 쌀이 바닥나고 재정도 텅 비어, 당장 내일 아이들이 굶게 될 형편이었다. 사람들은 빚이라도 내자며 발을 굴렀지만, 수녀는 타협하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먹이실 것입니다." 그러고는 성당에 들어가 도리어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다음 날 아침, 도시의 파업으로 학교에 배달되지 못한 수천 인분의 빵과 우유가 수녀원 앞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근심이라는 마귀의 속삭임에 한 치도 타협하지 않고 아버지의 약속에 우직하게 순명할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온전한 섭리로 응답하신다. 근심을 내려놓은 손이라야, 아버지의 유산을 가득 받아 쥘 수 있다.  

신앙은 내 현실에 맞추어 하느님의 말씀을 가위질하는 일이 아니다. 돈과 하느님을 한꺼번에 섬기려는 영적 간음을 이제 그만두어라. 성체를 모시러 나아갈 때, 내일의 주식과 집값과 노후의 모든 불안을 그 자리에 내려놓아라. 근심을 품은 채로는, 아버지께서 생명으로 빚어 주신 그 유산의 단맛을 결코 맛볼 수 없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어라. 나를 위해 아드님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믿고 우직하게 순명할 때, 비로소 우리의 빈손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풍요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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