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양성모성지 이상각 신부님 - 사랑하는 이의 슬픔
-
188875 이윤경루카 [achim9202] 스크랩 2026-04-03
-
십자가는
높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향해 서 있습니다.
성금요일은
단지 고통을 묵상하는 날이 아닙니다.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의 마음을 바라보는 날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합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고통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가만히 묵상해 보면
예수님의 수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수난이라고 하면
격렬한 고통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수난이라는 말 안에는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끊임없이 움직이시는 삶이었습니다.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위로하시고,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끄시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난이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바뀝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무엇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에게 행해지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분이 됩니다.
체포되시고,
결박당하시고,
끌려가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자리로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장 깊은 고통은
육체의 고통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겟세마니는 동산입니다.
동산은 사랑과 기쁨의 자리입니다.
사람이 편히 머물고,
친밀함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동산에서
예수님은 피땀을 흘리십니다.
왜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겪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
끝내 오해받고,
거부당하고,
버림받고,
혼자 남겨지는 고통.
따뜻하게 품어 주었던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고,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를 외롭게 남겨 둘 때의 고통.
그것이 겟세마니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또 하나의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도
어둠과 의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아무것도 붙잡히지 않는 시간,
그 암흑 같은 밤을 지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밤을 지나셨습니다.
겟세마니는
그래서 두려움의 자리가 아니라
믿음이 시험받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예수님 앞에는 하나의 선택이 놓여 있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갈 것인가 하는 선택입니다.
분노하며 갈 것인가,
원망하며 갈 것인가,
억울함 속에서 갈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사랑을 놓지 않고,
용서를 선택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갈 것인가.
예수님은
용서를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끝까지 사랑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은
많이 맞으신 이야기만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억지로 빼앗기신 분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주신 분이셨습니다.
“누구도 내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내어놓는다.”
이 고백처럼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사랑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겟세마니는
그래서 죽음의 자리가 아니라
사랑이 시험받는 자리이며,
충실함이 완성되는 자리입니다.
피땀은
두려움의 흔적이 아니라
사랑에 충실하기 위해 치르는 대가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또 하나의 아픔이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외로움,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 같은 고독,
가장 깊은 곳에서 혼자 남겨진 느낌.
사람들이 가까이 있어도
함께 들어갈 수 없는 그 거리.
돌 던지면 닿을 만큼 가까이 있지만
끝내 혼자여야 하는 자리.
그 정신적 외로움.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는
바로 그런 외로움 속에서
사랑하는 이가 흘린 피였습니다.
그래서 성금요일에
우리가 먼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못과 피 이전에
사랑하는 이의 슬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우리의 삶과도 멀지 않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작은 겟세마니를 지나갑니다.
가족 안에서,
관계 안에서,
일터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를 받고,
이해받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끼고,
상처를 받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선택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사랑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아프지만
사랑과 용서를 놓지 않을 것인가.
겟세마니는
우리의 삶 안에서
매일 반복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십자가 앞에 조용히 머물며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상처받았을 때
사랑을 포기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이해받지 못할 때
마음을 닫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외로울 때
미움으로 돌아서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겟세마니의 당신처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십시오.
이 글은
로널드 롤하이저 신부님의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을 읽으며
마음에 머문 내용을 바탕으로 묵상한 글입니다.
위의 글은 이상각 신부님의 블로그 글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남양성모성지,이상각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