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우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4월 3일 묵
-
188871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4-03
-
이병우 신부님_"다 이루어졌다."(요한19,30)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가장 거룩한 날!'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이 전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요한18,1-19,42)'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가장 거룩한 날인 '주님수난성금요일'입니다.
오늘은 평소처럼 성찬전례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전례'와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로 이어지는 '주님수난예식'이 거행됩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있게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의미로 '금육과 단식'을 하는 날입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다.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52,4-5)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요한19,6)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요한19,15)
'십자가'는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외치는 이들, 지금도 죄와 허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이들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것도 '극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허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부활'합니다. 이것이 바로 날마다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는 '하느님의 큰 사랑이요 은총'입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언제 어디서나 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고, 그 큰 사랑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며 삽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참신앙생활'입니다.
"다 이루어졌다."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인 이 말씀을 끝으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십니다.
예수님, 수고하셨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성령님, 사랑합니다!
(~1마카9,73)조욱현 신부님_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오늘 우리는 교회의 가장 엄숙한 전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한다. 성금요일은 성체성사도, 미사도 없고, 오직 십자가와 말씀 앞에 침묵하며 서 있는 날이다. 오늘의 핵심은 오직 하나,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죄로 인해 스스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아드님은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명하심으로써, 우리를 대신해 속죄 제물이 되셨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성 이레네오도 같은 믿음을 고백한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지만, 한 사람 예수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롭게 되었다.”(Adversus Haereses 3,18,7).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이다.(요한 15,1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시기에, 가장 극단적인 사랑의 형태인 죽음을 택하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십자가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심판대이자, 동시에 하느님의 학교다. 그 위에서 우리는 무엇이 사랑인지를 배운다.”(Sermones 218,3).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당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셨다. 이는 단순한 가족적 배려가 아니라, 마리아가 교회의 어머니가 되심을 선포하는 행위였다. 교회는 성모의 모성 안에서 신앙을 지탱받는다. 또한, 창에 찔리신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성사들의 원천이며 교회의 탄생을 드러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주석하며 말한다. “그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은 교회의 성사들을 상징한다. 우리는 그분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Homiliae in Ioannem 85,3).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는 단순히 죽음의 종결을 뜻하지 않는다. 구원의 경륜, 곧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이 충만히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모든 생애는 그분의 파스카 신비를 향하고 있으며, 십자가는 그 사랑의 절정이다.”(607항).
오늘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본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이제 우리는 그분의 피로 새 생명을 얻었으며, 그분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희망을 받았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성금요일, 우리 모두 십자가 아래에 함께 서서 성모님과 더불어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에 응답하여야 한다.
김건태 신부님_주님 수난 성금요일
[말씀]
■ 제1독서(이사 52,13-53,12)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바빌론 유배시대에 활동했던 제2이사야의 ‘고통받는 종의 노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빌론 땅에 유배 중인 유다 백성이 해방을 기대하고 있었을 때, 이 본문은 그 기대에 역설적인 답을 주는 작품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죄를 짊어진 한낱 ‘종’이 어떻게 사람들을 악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계획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통받는 종’의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찾아내는 사람에게 모든 것은 분명합니다. 그분 안에서 죽음은 생명으로 회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제2독서(히브 4,14-16; 5,7-9)
예수님이, 어떻게 구약성경에서는 겨우 접근에 이르렀을 뿐인 부분을 완벽하게 완성해 내셨는지를 밝히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시련 속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순명 정신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랑의 행위를 기대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십니다. 이 사랑의 행위는 바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바탕이 되고 희망이 되는 동력입니다.
■ 복음(요한 18,1-19,42)
수난 기사에서, 복음저자 요한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몇몇 특징적인 점들을 그 상징성과 함께 전해줍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당신 제자들에 대한 걱정, 당신 왕국의 성격과 진리의 증인 역할에 대해 빌라도와 나누신 긴 대화, 요한에게 맡기신 당신 어머니에 대한 관심, 끝으로 복음저자가 인류를 새로 나게 하는 세례의 물에 관한 예고로 읽는 예수님의 열린 심장 이야기 등입니다. 본문 전체는 우리가 세상의 죄악에 맞서 당당하게 싸우시는 예수님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도록 이끕니다.
[새김]
세상 어느 곳이든 법치국가에는 법을 척도로 판결을 내리는 법정이 있으며, 거기에는 소송과 선고의 대상이 되는 피고만이 아니라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님의 법정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등장하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목소리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지켜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계급을 대표하던 사두가이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위가 하느님에게서 오는 권위임을 다시금 강조하고자 하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에 의해 상처받고 실추된 자신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보복의 기회로 삼습니다. 또한 정치 세력인 헤로데 당원들과 로마인들은 정치적인 권한이 영적이며 종교적인 영역을 뛰어넘는다고 강변합니다. 한편, 예수님 반대편으로 돌아선 백성들은 힘 있는 자들에 대해 대신 복수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 앞에서 절망감을 토로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몸소 선택하여 말씀과 행적으로 성심껏 양성해 온 사도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저버림으로써 지금까지 스승과의 관계를 그나마 지탱해 주던 몰이해를 드러내고 맙니다.
이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제 받아들이기 힘든 언행의 소유자가 되며, 결과적으로 이 모든 사람은 예수님 죽음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는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수님을 거슬러 던진 말과 행동 일체가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는 현장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매일 매일, 정의보다는 불의가 힘을 발하고, 진실보다는 거짓이 소리를 높이며, 일치보다는 분열이 난무한 세상, 한 마디로 사랑이 짓눌리는 세상을 목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저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의 목소리는 지금도 우리 주위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우리의 비열한 행위와 죄스러운 무지를 통해서,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이 엄청난 비극의 공범자이며 동시에 희생자일 수 있습니다.
오늘,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우리 주님은 인간의 허술하기 그지없는 율법으로 단죄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십니다.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함께 주님의 구원사업은 완성의 단계로 넘어가겠지만, 완성을 말하고 환성을 올리기에 앞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확인하며, 주님 사랑을 마음에 새겨 실천을 다짐해야겠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구원이며, 사랑을 말하고 실천에 옮길 때마다, 구원은 더욱 찬란하게 우리의 주위를 비출 것입니다.
송영진 신부님_<십자가는 부활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1)>
1)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이미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성금요일 전례는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기 전에
겪으신 수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전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떻게?’보다 ‘왜?’가 더 중요합니다.>
사실 ‘십자가 신앙’은 ‘부활 신앙’을 전제로 한 것이고,
‘부활 신앙’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의미 있는 상징이 되고,
표징이 됩니다.
<반대로,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는 무의미한 물건이 될 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히브 9,13-15).”
2)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수난 이야기는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부활 후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짧고 간단합니다.
부활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신앙이니까 수난 이야기보다
더 길고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 반대가 되었을까?
그것은 복음서를 기록한 시기의 상황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 승천 후에,
세월이 꽤 많이 흐르고 나서 기록되었습니다.
그 당시 신자들은 ‘부활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있었고,
아마도 수난 때의 참혹했던 일은 잊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심정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부활의 기쁨이 희미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부활의 기쁨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말라고, 수난 때의 일을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어떻게, 얼마나 십자가 수난의 고통을
겪으셨는지를 기억하고 있어야
‘부활의 기쁨’을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도 ‘파스카의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어둠의 무서움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빛을 잘 간직하고,
병의 고통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건강을 잘 지킵니다.
3)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은 현재의 일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과거의 일이다. 십자가는 이미 끝난 일
아닌가? 그런데도 왜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7).”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위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이니 달게 받아들여라.”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상투적인 말’은 당사자를 더 힘들게 할 뿐입니다.
바로 그럴 때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사랑,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개인의 힘으로 안 되면 공동체가 나서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일도,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일도,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함께 하면 해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출처] 주님 수난 성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