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암칼럼] 한국 천주교 2대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 생애 연구(8)[강원경제신문-2025-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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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961 박관우 [pgu77] 2025-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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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객원 칼럼니스트 © 박관우
요동(遼東)에 도착(到着)한 최양업(崔良業.토마스)과 김대건(金大建.안드레아)은 헤어지게 되어 최양업은 몽고(蒙古) 장춘(長春) 부근에 위치한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가서 그곳에 미리 체류(滯留)하고 있던 훗날 3대 조선 교구장(朝鮮敎區長)에 임명(任命)되는 페레올 신부(神父)와 합류(合流)하였으며, 김대건은 요동에 그대로 남아 조선으로 입국(入國)을 추진(推進)하게 되었다.
최양업은 그곳에서 신학 공부(神學工夫)를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조선으로 입국하려다 실패하여 다시 온 김대건으로부터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인하여 자신(自身)의 부모(父母)를 비롯하여 많은 교우(敎友)들이 순교(殉敎)한 불행(不幸)한 소식(消息)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狀況)에서 페레올 신부가 로마 교황청(敎皇廳)에 의하여 3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는 새로운 변화(變化)가 있었는데, 1843((헌종 9)년 12월 31일 개주(蓋州)의 양관(陽關) 교우촌(敎友村)에서 주교 성성식(主敎成聖式)을 하였는데 여기에 김대건과 최양업도 참석(參席)하였다.
이듬해에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팔가자에서 남은 신학 공부를 계속하여 마침내 모든 과정(課程)을 이수(履修)하였으며, 그해 12월 15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副祭品)을 받기에 이르렀다.
부제품을 받은 이후 김대건이 조선을 향하여 떠날 때 최양업은 매스트로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후 훈춘에 도착하였으나 발각되어 체포되면서 요동으로 추방되었으며, 신학교(神學校)에 머물러 있다가 1846(헌종 12)년 12월 세번째 조선 입국을 시도하는 중, 만주(滿洲)와의 국경선 변문(國境線邊門)까지 와서 조선의 박해 소식과 김대건 신부의 순교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양업은 입국이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 마카오로 가려고 하였으나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經理部)가 홍콩으로 이전(移轉)하였다는 소식에 결국 홍콩으로 향하였다.
1847(헌종 13)년 7월 최양업은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하여 프랑스 통상선(通商船)을 타고 홍콩을 떠나 군산(群山) 앞바다의 작은 섬에 하선(下船)하기도 하였으나 배가 좌초(坐礁)되어 섬에서 천막(天幕)을 치고 상해(上海)로부터 구조선(救助船)을 기다리는 동안 한달간을 체류하게 되었다.
최양업은 그 섬에 체류하는 동안 교우들의 근황(近況)을 살펴 보기 위하여 바쁘게 뛰어다녔으며, 직접 만나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우들과의 만남은 지속되지 못하였으며, 한달 이후 다시 상해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최양업과 매스트로 신부는 프랑스 함선(艦船)을 이용한 입국은 포기하고 다른 배를 이용하여 백령도(白翎島)에 도착하는데 성공(成功)하였다.
백령도는 김대건이 체포된 곳이기도 한데, 이 곳에 조선의 교우가 나타나지 않자 다시 상해로 뱃길을 돌리면서 결국 조선의 입국 시도(試圖)는 실패(失敗)하였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객원 칼럼니스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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