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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칼럼] 한국 천주교 2대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 생애 연구(6)[강원경제신문-2025-07-23]

232938 박관우 [pgu77] 2025-07-23

 

 

▲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객원 칼럼니스트 © 박관우

조선(朝鮮)에서 출발(出發)하여 6개월의 여정(旅程)속에 마침내 마카오에 도착한 신학생(神學生)들은 부모님과 같이 보살펴 주는 스승 신부(神父)들의 슬하에서 공부(工夫)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자신들이 장차 짊어질 책임의 중대함과 사명감(使命感)에 입각(立脚)하여 열과 정성을 다하여 공부했기 때문에 학문의 진도(進度)가 빨랐다.

그런데 이렇게 순탄하게 공부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변수(變數)가 발생하였으니, 1837(헌종 3)년 8월에 마카오에서 청국인(淸國人)들에 대한 민란(民亂)이 일어나 그들은 파리외방전교회원과 같이 수개월간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 생활(避亂生活)을 하였다.

그 이후 민란이 진정되고 그해 겨울 다시 마카오로 귀환(歸還)하였으나, 이듬해에 함께 공부하던 최방제(崔方濟.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열병(熱病)으로 인하여 병사(病死)하는 불행(不幸)한 일이 발생(發生)하였다

덧붙이면 함께 형설(螢雪)에 공(功)을 쌓아 조선에 돌아가서 민족(民族)의 길잡이가 되기로 서로 굳게 약속하였지만, 최방제를 잃은 최양업(崔良業.토마스)과 김대건(金大建.안드레아)의 아픈 심정은 이루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애도(哀悼)와 낙담(落膽)에만 빠져 있을 상황이 되지 않았으니, 1839(헌종 4)년 4월 마카오에 민란이 다시 발생하면서 이번에도 마닐라로 피난을 가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마닐라서 30리 거리에 위치한 론롬베이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修道院)에 머물면서 학업(學業)에 계속 정진(精進)하였다.

이와 관련해 그해 11월에 다시 마카오로 귀환한 이후 라틴어의 기초 실력(基礎實力)이 이루어져 베르뇌 신부와 매스트르 신부를 교수 신부(敎授神父)로 맞이하여 철학 공부(哲學工夫)에 정진하여 1841(헌종 6)년 가을에는 철학 과정(哲學課程)을 수료(修了)하였고, 신학 과정(神學課程)으로 진급(進級)하였다.

이제 두 신학생들이 조선을 떠난지 어느 덧 6년이 되었으며 연령(年齡)도 21세가 되었으니, 이제 소년기(少年期)는 지나고 청년기(靑年期)로 접어드는 시기(時機)가 도래(到來)하였다.

한편 그동안의 열성적 연학(熱誠的硏學)의 결과로 라틴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스콜라 철학도 이해하는 수준까지 되었다.

또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불어(佛語)도 어느 정도 익힐 수 있는 성과(成果)도 거두었다.

이와 함께 마카오에 거주(居住)하는 청국인과 포르투갈인과의 접촉(接觸)을 통하여 중국어(中國語)를 습득(習得)할 수 있었으며, 충분치는 못하나 포르투갈어에도 약간의 소양(素養)을 가질 수 있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객원 칼럼니스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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