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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기독교 聖經과 불교의 金剛經 번역의 哀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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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희 [edohyy] 쪽지 캡슐

2022-06-26 ㅣ No.225397

+ 찬미예수,


<기독교 聖經과 불교의 金剛經 번역의 哀歡> 

 

1. 기독교의 聖經번역 발자취; 
 
중세 유럽의 가톨릭은 낡고 부패해 있었습니다. 교황권을 놓고서 패권 다툼이 벌어지고, 죄에 대한 벌을 면해준다며 돈을 받고 면벌부를 팔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의 성경은 라틴어로 돼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승인한 이후, 성경은 라틴어로 기록됐습니다. 
 
중세 때 일반 대중은 대부분 문맹이었습니다. 더구나 라틴어는   읽을 수도 없고, 쓸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주일(週日) 미사에 참석한 서민들은 어땠을까요. 라틴어로 읽어주는 성경구절과 라틴어로 진행되는 주일(週日)미사는 그저 하나의 격식과 소리에 불과했을 겁니다. 거기에 담긴 뜻과 메시지는 전혀 몰랐으니까요. 
 
가톨릭 사제였던 독일의 마르틴 루터는 이런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당시에는 귀족이나 지식인이 아니고서는 라틴어를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결국 종교개혁을 주창한 루터는 머리와 수염을 잔뜩 기른채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의 성(城)에 숨어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혁명적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라틴어는 귀족의 언어이고, 독일어는 평민의 언어다. 그런데 진리를 담은 책인 성경을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은 굉장히 불경스러운 일이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이랬지만, 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마음이 더 컸을 겁니다. 라틴어로만 돼 있던 성경은 전적으로 사제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일반대중은 읽을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은 당시 유럽에 몰아쳤던 인쇄술 혁명과 함께 세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이후에 독일어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언어로 된 성경들이 번역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2. 佛敎의 佛經 金剛經 번역 발자취;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라(自覺覺他)>

(한글 금강경’(金剛經)펴낸 백용성(1864~1940/76세) 스님 이야기)
 
불교는 인도에서 생겨난 종교입니다. 붓다의 어록이 처음에는   입에서 입으로 암송으로만 전해졌습니다. 당시 인도 사람들은   문자는 장사꾼들이 쓰는 상업적 도구라고 여겼으니까요. 세월이 좀 더 흐른 뒤에 붓다의 가르침은 비로소 산스크리트어로 기록이 됐습니다. 그게 불교 경전입니다. 
 
세월이 더 흐른 뒤에 중국의 구도자들은 목숨을 걸고 인도로 건너갔습니다. 불교 경전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막을 통과해야 하는 험난한 길이라 열명중 두명만 살아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인도로간 중국의 구도자들은 산스크리트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 경전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중국에서는 산스크리트어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방대한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이렇게 번역된 한문 불교 경전은 중국과 한국, 일본 등에서 공유됐습니다.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은 다들 한자를 공용 문자로 사용하고 있었으니까요. 
 
조선의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지만 불교 경전이 한글로 번역되는건 아주 일부였습니다. 대부분의 불교 경전은 한문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불교경전은 대부분 한문이었습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도 여기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문을 모르니 불교경전을 읽을 수가 없고, 불교 신자들의 신앙은 상당수 기도하며 복을 비는 기복신앙으로 흘렀습니다. 여기에는 부처님의 어록을 읽고, 그 뜻을 깊이 생각하고 궁리하고, 거기에 담긴 이치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생략돼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런 과정은 출가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습니다.   라틴어 성경이 중세 성직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듯이 말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한글로된 불교경전이 처음 나왔습니다. 다름 아닌 ‘한글 금강경’(金剛經)입니다. 펴낸 사람은 백용성(1864~1940/76세) 스님이었습니다. 용성 스님은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도 댔습니다. 서울종로의 삼청공원에서 밤에 몰래 만해 한용운을 만나 독립자금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를 만주로 보낸 인물도 용성 스님입니다. 3.1운동 때 태극기를 들자고 제안한 사람도 용성 스님이었습니다. 당시 만해 한용운 스님은 흰 바탕에 청색의 한반도 지도를 그린 깃발을 들자고 했습니다. 지금 보니 국제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이 출전할 때 사용하는 ‘한반도기’와 흡사합니다. 당시에는 남북 분단 전이었습니다.  
 
만해의 의견에 용성 스님은   이렇게 지적하며 반대했습니다. “그럼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인 만주를 포기하게 된다.” 결국 3,1운동때 용성 스님의 제안대로 태극기를 들게 됐습니다.   이 일화는 용성스님의 손상좌인 도문스님이 한 이야기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용성 스님이 하루는 놀라운 광경을 봤습니다. 이 일로 용성스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함께 옥살이를 하던 개신교 목사님들이 한글로된 성경을 읽고 있었던 겁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지 1600년이 흘렀는데  아직 한글로 된 불교 경전이 없구나.” 당시에는 불교 내부에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귀하디귀한 부처님 말씀을 어떻게 천한 한글로 번역해 품위를 떨어뜨릴 수가 있나.” 따지고 보면 중세 때 성경이 라틴어로만 기록된 이유와 같은 맥락입니다.  
 
용성 스님은 출옥하자마자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물론 한문과 한글만 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불교의 이치를 뚫는 안목이 있어야만 부처님 말씀을 왜곡 없이 한글로 옮길 수가 있습니다. 용성스님에게는 그런 안목이 있었습니다. 결국 조선글(한글)로 된 금강경도 나오고, 80권에 달하는 화엄경도 조선글로 번역돼 출간됐습니다. 
 
다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알지만 백용성 스님은 낯설어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용성스님이 누구냐고요? 용성 스님은 열여섯살때 해인사로 출가했습니다. 40대 초반까지 전국의 명산과 사찰을 돌면서 수행한 끝에 견처(見處ㆍ깨달음의 안목)를 얻었습니다. 44세 때는 중국으로 건너가 소림사가 있는 쑹산등 5대 명산과   육조 혜능이 주석했던 광저우의 남화선사등 선종(禪宗) 사찰을 2년간 순례했습니다. 47세가 되던 1910년에는 경술국치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습니다. 이때부터 용성스님은 독립운동과 불교의 대중화에 전력을 쏟았습니다. 서울 종로에 대각사(大覺寺)를 세우고 “자각각타(自覺覺他)”를 주창했습니다.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한다”는  깨달음 운동입니다. 다시 말해 불교의 본질을 회복하고, 그걸 대중화하자는 운동입니다. 그리스도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습니다.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가 처음 생겨났을 때는 쉬운 말로 정확하고 또렷한 이치를 일러주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집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생기고, 그 손가락을 가리키는 또 다른 손가락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생겨난 손가락들을 쫓다 보면 이제는 어느 손가락 끝에 진짜 달이 있는지 헛갈리고 맙니다. 그래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고, 진리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자는 운동이 참 각별해 보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용성스님의 한글 불교경전도 바라보는 방향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해줄 진실한 이치를, 다시 말해 진리(眞理)를 더 많은 사람과 나누자는 것입니다. 그게 종교가 처음 생겨난 본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처음 생겨날 때는 쉽고, 정확하고, 명쾌하고, 간결했으니까요. 
 
〈‘백성호의 한줄명상’은 매주 수요일 연재>

(중앙일보 2022년6월22일자 배성호 칼럼에서). 


글옮긴이~李도희(아오스딩) 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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