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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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매일미사 묵상] 거리 조절을 위한 사랑과 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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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mikael6424] 쪽지 캡슐

2022-08-10 ㅣ No.156840

 

거리 조절을 위한 사랑과 미움


예수님이 있는 곳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계신 곳은 어디인지,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밀알 하나가 죽으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밀알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는 과정을 '죽는다'라고 표현하시는 듯하지요.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습이 사라지고, 몸이 갈라지면서 새싹이 되어가는 밀알의 모습을 보면,

죽어간다는 표현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싹을 틔우는 씨앗을 보고, 그 씨앗이 죽어간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 과정이 지나면 커다란 식물이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하기에 우리는 씨앗에서 나온 싹과 뿌리를 보며,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고 성장하였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겪어낼 모든 과정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올바른 죽음이 생명의 시작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다?


 뒤이어 예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라는 표현이지요.

어떻게 하면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이, 목숨을 잃을 만큼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일까요?

이 말씀에 조금 더 접근하기 위하여, 사랑과 미움이라는 표현에 대해 곱씹어 봅니다.

 

 보통 '사랑'은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을 이야기하고,

'미움'은 부정적이고 악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사랑 자체가 항상 선한 것이고, 미움 자체가 항상 악하다고 보는 우리의 관점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과 미움


  사랑 자체는 항상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그 대상과 방법이 올바를 때에, 선함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드라마의 소재로 "불륜"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불륜이 바로 잘못된 대상을 사랑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지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선한 사랑이,

자신의 이웃을 자신의 배우자보다 더 사랑하는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면,

그 사랑은 관계에서 독이 되기도 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자신의 반려동물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반려동물에게 필요한 음식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만 계속해서 제공한다면 큰 문제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미움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조금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미움은 어떠한 대상에 대한 혐오와 분노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대상을 향한 마음의 정도를 낮출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잘못된 대상을 과도하게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사랑을 덜어내는 '미움'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미움'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과도한 사랑의 '비움'을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밀알이 자기 목숨만을 사랑했다면, 싹을 틔우지 못했겠지만,

고통의 순간 자신의 목숨을 잠시 내려놓는 '비움'이 있었기에

생명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거리 조절, 그리고 순위 조절


 하느님의 계명은 사랑의 순위를 강조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마지막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의 순서로,

사랑의 올바른 순위를 알려주시지요.

이러한 순서가 어긋났을 때 우리는,

사랑의 대상에 대한 거리 조절,

즉 사랑의 순위 조절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거리 조절은 그 대상과 가까워지는 '사랑'이라는 엑셀과,

'미움'이라는 브레이크로 가능해집니다.

만약 자신의 배우자보다 다른 이성을 더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했다면,

배우자에게는 사랑이라는 엑셀을 통해 가까워지고,

다른 이성에게는 '미움'이라는 브레이크로 멀어지는 과정을 통해,

올바른 사랑의 위치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과도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에 대한 사랑이 더 높은 곳에 자리 잡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목숨에 대한 사랑과 미움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가장 높은 곳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정의 과정을 표현하신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을 섬기다


  예수님은 자신이 있는 곳에, 자신을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자신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그를 존중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군가를 '섬긴다'라는 표현은  사극에 등장하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누군가를 섬기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보다, 그 대상의 목숨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그러하기에 왕의 충실한 호위무사들은 왕을 대신하여 총과 칼을 받아내기도 하지요.

호위무사들은 자신이 지키고 있는 대상에 따라,

그들이 지닌 위엄과 목숨의 무게감도 달라지는 듯합니다.

 

같은 무사일지라도, 탐관오리의 부정한 재산을 지키는 무사와,

많은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왕을 지키는 무사의 목숨은 다르게 다가오니 말입니다.

 

 호위 무사는 자신이 섬기는 대상의 곁을 늘 따라다닙니다.

자신의 목숨은 이미 자신이 모시는 그 대상에게 바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예수님의 곁에는 늘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이 함께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세상의 것이 아닌, 예수님에게 걸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그렇게, 예수님의 사명을 지키는 것에 더 큰 무게를 두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곁을 지키며, 사랑의 우선순위를 예수님에게 둔 이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무엇을 더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되지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이의 목숨은,

하느님도 존중해줄 만큼의 무게감이 생기며,

영원한 생명에 이를 만큼 튼튼해져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https://parchment.tistory.com/entry/거리-조절을-위한-사랑과-미움 [양피지:티스토리] 

 

 

묵상글 전문 보러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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