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부활 제3주일 주일복음묵상

스크랩 인쇄

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1-04-18 ㅣ No.146166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아주 힘이 듭니다. 잠시 복음묵상을 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묵상글 작성을 잠시 접고 쉬려고 했습니다. 힘든 부분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이 앞전에 돌을 던지면 돌을 맞겠다고 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때 그 심정은 제가 부족하지만 예수님도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신 분인데 예수님이야 구세주이시니 그렇게 하셨지만 저 같은 사람이야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예수님처럼 위대한 사람도 아닌데 그런 흉내를 낸다는 것도 가소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엔요. 그러다가 다시 생각을 달리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예수님처럼은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흉내는 내는 시늉은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럼 돌을 던지면 돌을 맞지 하는 심정으로 가자고 마음을 다잡았던 것입니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굿뉴스에 들어와 보니 한 형제님의 댓글이 올라와 있는 것을 봤습니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분이 올려주시는 글은 일반 사람이 소화를 하기엔 벅찬 내용이자만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올려주시는 분이십니다. 평소 이분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실함과 꾸준함이 신앙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해 주는 분이었습니다. 또 어젠 신부님들의 묵상글을 올려주시는 기장에 사시는 한 자매님으로부터도 응원의 전화를 주셨습니다. 아마 거의 한 시간 정도 통화를 했습니다.

 

어제는 원주 교구에 계신 신부님께서 밤에 전화를 주셨습니다. 지금의 이런 상황에 대한 언급을 해 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도 성사를 주면서 많은 걸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좋게만 생각해야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도 사제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보면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을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차마 사제이기에 자신의 생각을 모두 그래도 표현을 하기 쉽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당부를 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어차피 예수님의 길을 가기로 작정한 이상 힘들어도 그게 십자가임을 알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어제 어느 형제님께서 카톡으로 보내주신 내용이 마지막에 좌측에 있는 강도의 행동을 보시고 하느님께 탄원하신 그 내용을 보내주셨는데 그 내용을 다시 묵상해봤습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정말 신앙생활을 하는 게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이렇게 힘을 낼 수 있도록 해 주시니 다시 힘을 낼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매일미사 책을 폈습니다. 오늘 제2 독서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저희를 위해 변호를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과연 무엇을 변호해 주실까를 묵상해봤습니다. 이 내용도 보면 지금까지 얼마나 봤겠습니까? 수백 번도 더 봤을 겁니다. 25년을 봤지만 오늘 아침에 무엇을 변호하셨을지 처음으로 묵상을 해봅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라고 하시는 내용이 바로 언급돼 이어집니다. 또한 속죄 제물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분이 만약 변호를 해 주신다면 우리의 죄를 있는 그대로 변호를 하시겠습니까? 아닐 겁니다. 우리의 죄를 당신께서 그 죄를 몽땅 자기 죄로 여기시면서 탄원하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인생도 기구한 운명입니다.

 

저희의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신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걸 바라봐야 할까요? 그야 예수님 당신의 운명이니 그냥 마냥 넋 놓고 바라만 봐야 할까요?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무책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니 자식도 아니고 또 제자도 아닐 거라고 봅니다. (글을 쓰는 저만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개인의 위치에서 나) 하나만이라도 예수님 어깨에 있는 십자가의 무게만큼이라도 들어내 드려야 하는 심정으로 이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심정으로 우리는 가야 할 것 같습니다.

 

2독서에서도 나오지만 그분을 안다고 하면서도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쟁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런 사람에게는 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면서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나중에 하느님 앞에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는 이 세상을 연극 무대로 비유를 했습니다. 우리 사람은 그럼 배우에 해당하겠죠. 다들 그 나름의 자기 아닌 또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린 원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 살지 않고 또 다른 거짓말쟁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런 인생도 기구한 인생이고 기구한 삶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곳에서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온다고들 많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을 뵈려고 한다면 그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건 굳이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다 알고는 있지만 문제는 아는 것이 행동으로 따라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난다는 게 어떤 의미의 말인지 아실 겁니다. 바로 묵상글에서라든지 아니면 신부님들의 성경 해설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만나뵙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45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신 후에라야 우리가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깨달아야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나뵈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자 속에 있는 하느님만 만난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말한 비유처럼 표현한다면 우리는 껍데기 하느님의 모습만 보고 가는 것입니다. 진짜 하느님의 모습을 만나고 가려면 예수님께서 문을 열어주시기 전에 우선 자신이 문을 열려고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절대 예수님께서는 열어주시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애시당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로봇과 같은 존재로 창조하신 게 아니라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시 자신에게 자문을 해본다면 과연 하느님을 만나려면 어떤 모습으로 이곳에 와야 하는지 한번 진지하게 묵상해본다면 답이 그냥 절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제2독서 요한15절에 그 힌트가 있을 겁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거짓말하면 우리와 하느님 사랑과는 먼나라 이야기에 불과한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될 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001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