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1일 (토)
(자)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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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묵상 : 죄인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자책하는 것은 정말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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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6-02-19 ㅣ No.188076

 

제가 오늘 묵상글을 그만 올리려고 했는데 재의 수요일에 관한 묵상글을 보신 어떤 자매님께서 너무 자책을 하시는 내용으로 댓글을 다셔서 이점에 대해 제가 물론 굿뉴스에서 단 글은 아닙니다만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 내용이라 또 잠시 올리겠습니다. 이건 순전히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또한 회개를 하라고 하니 합니다. 저도 죄라는 것에 대해 많이 언급을 하긴 했습니다만 이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자고 하는 뜻보다는 왜 죄를 지으면 안 되는지 그 근본 이유를 아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언급을 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기 쉬운 육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령 죄를 지었다고 해서, 너무 자책을 하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믿고 따라가는 신앙에 있어서 위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건 조금 지양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절대 이런 모습을 우리가 하기를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만약에 이런 모습을 원하신다면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맨처음부터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을 포함해 이 세상에 악이 없는 완전한 세상을 만드셨다면 우리가 죄를 지을 상황 자체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걸 모르시고 창조를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이점을 진지하게 묵상을 해봐야 합니다. 정말 이 내용을 언급하고자 하니 엄청 길 것 같습니다. 핵심만 언급해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왜 주셨는지 그 자체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을 해보셨죠. 다들 한 번은 해보셨을 겁니다. 

 

받는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같은 사랑인데 진정으로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과 기계적으로 어쩔 수 없이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강제적인 사랑을 해야 되서 사랑을 하게 되는 사랑이 있다면 이런 사랑을 받았을때 그 사람의 기분이 과연 어떨까요? 사랑의 기분이 들까요? 전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실 겁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단순히 로봇처럼 하느님을 맹목적으로, 광적으로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인간도 그런 사랑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데 하물며 하느님께서 그런 걸 원하시겠는가 하고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분명한 이치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당신의 외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는가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목숨과도 바꾼 것입니다. 그 정도로 저희를 사랑하셔서 하셨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알아야 될 게 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의 목숨과도 바꾼 그 위대한 사랑을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사랑을 아는 방법이 그럼 과연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신 그 수난의 길을 통해 그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하느님이라면 그 사랑을 진정으로 가슴으로 느끼는 자녀가 되기를 바랄 뿐이지 그걸 통해서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인식을 하면 족할 뿐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죄인이라고 스스로 자책을 하며 자신을 짓이기는 그런 것은 원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는 진정으로 그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게 아닐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그걸 바라신다면 그건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학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하느님을 오히려 잔인한 하느님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심각하게 교회도 한번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이런 식으로 사순을 보낸다면 결과가 이상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절 전날까지 우울모드를 하다가 갑자기 부활날에 가서 부활의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이상해도 너무나도 이상한 것입니다. 이걸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자들의 해산의 진통을 잘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해산을 할 때는 무지막지한 고통이 따릅니다. 그 고통 뒤에 생명의 탄생이라는 기쁨을 얻듯이 우리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모범을 따라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과정에서 힘든 것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힘든 과정이 바로 우리가 부활의 몸을 만들기 위한 진통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통은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그 희생을 기억하기 위한 매개체로서 작용할 뿐입니다. 그렇게만 해드린다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만족하실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도 아니지만 제가 예수님이라면 저는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그게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일 것입니다. 인간의 아버지도 그런 사랑을 하십니다.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는 그보다도 더 위대한 사랑을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가 오히려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며 인식을 하고 반성하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그걸로 인해 자책을 하는 건 오히려 아버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해드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잘못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이렇게 해야 그게 예수님을 향한 가장 깊은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제 말씀이 틀린 말씀 같은지요? 잘 한번 묵상해보십시오. 과연 예수님은 어떤 걸 원하실지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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