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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풍수원 성당의 역사와 그 역할

116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3-11

풍수원 성당의 역사와 그 역할*



국문초록

 

풍수원본당은 1888년 르 메르(Le Merre) 신부를 초대주임으로 설립된 강원도 지역의 중심 본당이다. 본고는 풍수원본당 130여년의 역사적 흐름을 보면서 몇가지 특징을 밝혀내고, 이러한 특성이 형성된 과정을 추적했다. 그리고 그 특징을 보기 위해 기초가 이루어지는 설립 시기의 1대 르 메르 신부, 교회 정착발전 시기인 2대 정규하 신부의 사목활동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정규하 신부는 서품받은 직후부터 선종할 때까지 47년 동안 풍수원본당에서 사목했다.

 

풍수원본당은 박해기 숨어들었던 신자들이 신앙생활로 돌아오는 구심점이 되었으며, 이후 신자들은 도회로 들어가 강원, 경기지역에 새로운 복음터를 개척했다. 동시에 거의 40명에 이르는 사제들이 배출되어 각지로 나가 영향을 끼쳤다. 또한 풍수원본당은 한국인 사제가 선교사들 사이에서 본당 행정에 정착해가는 초기 과정을 완수한 성당이다. 그리고 초기부터 현재까지 변하지 않는 풍수원본당의 특징은 교우촌을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르 메르 신부 시기에는 신자 재발견이 주를 이루고 동시에 박해도 있어 신자들은 배교를 강요당하거나 심지어 순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르 메르 신부는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면서 성영회와 학교를 통해 비신자 사회에 정착하는 터전을 형성했다. 그는 성당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보다 쉽게 사목행정에 접하고 또 곤경에 처했을 때에는 보호받을 터전을 마련했다.

 

정규하 신부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풍수원본당을 하나의 가톨릭 세계로 완성해 나갔다. 즉 학교를 운영하여 신학생을 다수 배출할 배경을 갖추었는데 이렇게 성장한 본당 출신 사제들이 교구와 타지역과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또 그는 안나회의 적극적인 보조를 받으며 사회복지사업을 해나갔고, 성체거동을 시행하며 지역사회의 중심적 위치를 확보했다. 그리고 본인부터 솔선했고, 친인척과 신자들의 기부를 얻어 본당에 넓은 영역을 확보했다. 신자들은 태어나고 교육받고 생활하고 죽어서 묻히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풍수원 안에서 할 수 있었다.

 

 

Ⅰ. 여는 글

 

1888년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에 르 메르(Le Merre, 1858~1928, 李類斯) 신부를1) 초대주임으로 풍수원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이 본당은 그 역사성에서 주목받고 있다. 더욱이 풍수원본당의 두 번째 성당 건물은 ‘신앙의 자유가 왔다는 광고’처럼 예상치 못한 자태로 산 위에 올라섰다. 풍수원본당은 당시 건축물이 던졌던 경이로움만큼이나 긴 역사 속에서 큰 역할을 해 왔다.

 

풍수원본당은 몇가지 점에서 연구자의 관심을 끈다. 첫째로 풍수원본당은 박해기 숨어들었던 신자들이 신앙생활로 돌아오는 구심점이 되었고, 현대사회에서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는 훈련터가 되었다. 이후 신자들은 도회로 들어가 강원, 경기지역에 새로운 복음터를 개척했다2). 또 풍수원본당은 한국인 사제가 선교사들 사이에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정착하는 과정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강성삼(姜聖參, 1866~1903년), 강도영(姜道永,1863~1929), 정규하(鄭圭夏, 1863~1943) 신부는 국내에서 행해진 최초의 사제서품식에서 서품받았다.3) 강성삼 신부는 사제가 된 뒤 부산 지역 담당으로 나가 절영도를 거쳐 1897년부터 명례본당에서 사목했다.4) 그리고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본당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 선종할 때까지 34년간을 그곳에서 사목했다.5) 정규하 신부는 풍수원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했다.6)

 

당시 선교사들은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자신들 선교의 열매이며 미래로써 이들을 대했다. 그리하여 새신부들을 한곳에 머물러 교회의 새길을 구축하도록 했다. 그러나 풍수원본당만이 오늘날까지 그때의 맥을 이어 오고 있다. 미리내본당이나 명례본당이 공소와 성당으로 변화 · 반복하다가 최근 다시 복원되는 것과는 달리 풍수원본당은 130년 역사에서 단한번도 공소가 된 적이 없다. 또한 본당에서 배출된 사제만도 30명이 넘는다.7) 이는 단지 정규하 신부가 세 신부 중 가장 오래 생존함으로써 이루어낸 것만은 아니다. 신자들과 역사적 환경 등이 종합하여 이룩한 풍수원의 숨은 재산이다.

 

따라서 풍수원본당이 역사 속에서 이룩한 업적과 그 힘을 파악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는 풍수원본당 역사를 아는 일뿐 아니라, 교회가 박해 이후 세상 밖으로 나와 정착해가는 시기의 교회사를 밝히는 구체적 사례가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인 사제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사이에 정착해가는 단초를 보게 된다.

 

그러나 풍수원본당은 이런 중요한 열쇠를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본당에 대한 연구가 되어있지 않다.8) 설립된 지 130년이 넘었지만, 본당사 자체도 서술되어 있지 않다.9) 이에 비해 문화재 관련 부처나 연구자들은 성당 건물(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에 대해 관심이 컸다.10) 그리고 본 연구가 시작되면서 풍수원본당 역사에 관한 몇 개의 주제가 다루어지기 시작했다.11) 그 외에는 강원도 교회사의 일부로 다루어지거나12) 잡지나 주보 등의 매체에 본당 관련 글들이 있다.

 

한편, 풍수원본당의 경우 특이한 점은 이 본당은 성지가 아닌데도 성지 관련 책자에 자주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13) 이곳은 여행안내서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14) 결과적으로 풍수원본당은 아직 자체 역사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았음에도, 순례객이나 일반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설명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단편적인 설명이 회자되다 보니 역사적 균형을 잃고 과장되거나 사실에 있어 오류들이 쌓이기도 했다.

 

본고는 풍수원본당의 특성을 진단하는 첫 작업으로 풍수원본당의 시대적 변화를 살피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특수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즉 앞서 지적한 풍수원본당의 두가지 특징, 즉 신자를 재발견하고 또 도시로 배출시키는 역할과 첫 한국인 사제의 정착과 선교사와의 협조와 역할을 볼 것이다. 주로 130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요소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풍수원본당의 역사적 흐름을 일별하여 시간적 변화를 살피며 시간을 이어 나오는 풍수원본당의 특징적 요소를 조명한다. 이어서 이러한 각 요소들의 시대적 성격과 상호 연계 관계, 성당 역사 안에서의 역할을 살핀다.15) 다만, 지면의 한계로 본고는 풍수원성당이 설립되고 그 특성이 이루어진 전반기 50년, 즉 성당을 세운 1대 르 메르 신부와 풍수원본당을 공고히 정착시킨 2대 정규하 신부 시기로 한정한다. 특징적 요인들이 성립과 정착으로 나뉘지 않을 때에는 영향이 큰 곳에서 모아 설명하겠다.

 

본고의 주된 사료로는 르 메르 신부 서간과 정규하 신부의 서간 자료이다. 그리고 《뮈텔주교일기》16), 《교구연보》17), 〈교세통계표〉, 매체 자료 등을 통해 사실을 보완하며 때로 현장 조사와 인터뷰도 행했다. 또한 정규하 신부의 사목활동에서는 국내 첫 사제서품식에서 함께 탄생된 강도영 신부의 사목생활과도 비교해 해당 시기에 대한 보다 객관적 진실을 파악하고자 했다. 한편, 본고는 풍수원본당에서 100년사를 편찬하기 위해 마련했던 자료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이 자료들은 천주교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로부터 제공받았다.18)

 

 

Ⅱ. 풍수원본당의 역사 속 변화

 

풍수원본당은 아직 본당사가 없기 때문에 본고를 진행하기 위해 전체 역사를 개괄하고 그 특징을 파악하겠다. 강원도 지역에 교우들이 피신해 온 것은 1801년 이전이다.19) 그리고 상당히 널리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신태보의 기록이나 김강이, 최해성, 최 비르지타 등 병인박해까지 순교자들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20) 1858년 강원도 만산에서 태생이 장애자인 소년이 마을 전체가 바친 9일 기도 끝나는 날 일어섰다는 보고는 튼실한 교우촌 신앙을 짐작할 수 있다.21)

 

풍수원본당 130년의 역사를 개괄하기 위해 제요소를 도표화 하면 〈표1〉과 같다.22) 함경도 안변 지역을 담당하던 르 메르 신부는 1888년 뮈텔(Mutel, 1854~1933, 閔德孝) 주교의 허락을 얻어 풍수원에 정주, 본당을 창설했다.23) 그리하여 곳곳에 산재해 있는 공소는 이 본당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다. 이후 그는 새로운 선교지 개척을 위해 원주본당(현 원동 주교좌)으로 옮겼다.

 

그리고 1896년부터 정규하 새 신부가 풍수원본당 사목을 이어 47년간 담당했다. 정 신부는 1910년 현재의 성당을 지어 강원도에서 최초로 서양식 벽돌 건물을 선보였다. 그가 47년 사목하는 동안 춘천의 곰실본당(현 죽림동 주교좌) 등 세 개 본당이 분할해 나갔다. 1943년 정규하 신부를 이어 3대 주임이 된 김학용 신부는 정규하 신부의 체제를 20년간, 즉 해방공간, 전쟁, 그후 변화 속에서 계승 완성해 나갔다.

 

초기 조선대목구에서 시작하여 서울대목구로, 이어 춘천대목구에 속했던 풍수원본당은 1969년 춘천교구로부터 그 소속이 이관되어 이미 1965년에 설립된 원주교구 관할이 되었다. 이때 7대 주임으로 딜레이니(Delany, 都) 신부가 부임했고, 그뒤 13년간 골롬반회 신부들이 부임했다.

 

한편, 풍수원본당은 11대 박용식 신부 때부터 100년을 바라보는 성당으로서 성당의 유적지 개발운동이 시작됐다.24) 더욱이 2000년대를 열은 김승오 신부는 횡성군과 함께 테마공원 ‘바이블파크’의 조성 작업에 착수했다. 뒤이어 배은하 신부가 옛 광동학교 건물에 사진전을 설치하고 130년사 발간을 준비했다. 현재 손용환 신부가 부임하여 이를 잇고 있다.

 

이와 같이 풍수원본당 130년의 역사는 교우촌이 세워지고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여러 본당으로 분할해 나가던 시기, 원주교구로 이관되어 비교적 안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시절, 그리고 100년을 준비하면서부터 성당의 유적지 개발과 순례성당으로서의 변모 시기로 나뉘게 된다. 풍수원본당의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드러내는 내적 동인(본당 신자 수의 증감, 주임신부와 보좌신부, 그리고 본당의 열매인 출신 사제)를 보면서 그 시기적 특성을 살피겠다.

 

우선 신자증감을 보면, 본당 설정 당시 신자 수는 약 2,000여 명이었다고 전한다. 이는 관할 공소 전체의 신자 수이다.25) 풍수원은 1885년 33명의 작은 교우촌으로 출발했다. 이후 본당의 신자 변화는 아래와 같다.

 

1886년 92명, 1887년 94명, 1888년 211명, 1889년 1,712명, 1890년 1,097명, 1891년 1,781명, 1892년 1,826명, 1893년 1,793명, 1894년 1,782명, 1897년 1,008명, 1899년 1,079명, 1900명 1,093명, 1891년 1,219명, 1902년 1,246명, 1903년 1,346명, 1904년 1,547명, 1910년 1,862명, 1911년 1,905명, 1912년 2,101명, 1913년 2,174명, 1914년 2,035명, 1915년 2,226명, 1916년 2,540명, 1917년 2,480명, 1918년 2,350명, 1919년 2,443명, 1920년 2,649명, 1921년 1,721명, 1922년 1,784명, 1924년 1,631명, 1930년 635명, 1931년 653명, 1933년 674명, 1934년 558명, 1935년 565명, 1936년 644명, 1937년 648명, 1954년 1,009명, 1955년 1,071명, 1956년 1,244명, 1957년 1,230명, 1958년 1,305명, 1959년 1,420명, 1963년 1,274명, 1964년 1,301명, 1965년 1,290명, 1966년 1,274명, 1968년 1,307명 1969년 1,330명, 1970년 1,317명, 1971년 1,377명, 1972년 1,370명, 1973년 1,350명, 1974년 1,316명, 1975년 1,314명, 1976년 1,311명, 1977년 1,288명, 1978년 1,286명, 1979년 1,136명, 1980년 1,147명, 1981년 1,117명, 1982년 1,030명, 1983년 1,048명, 1984년 1,061명, 1985년 1,053명, 1986년 1,057명, 1987년 1,059명, 1988년 1,006명, 1989년 917명, 1990년 883명, 1991년 830명, 1992년 800명, 1993년 796명, 1994년 822명, 1995년 867명, 1996년 856명, 1997년 847명, 1998년 824명, 1999년 812명, 2000년 807명, 2001년 848명, 2002년 830명, 2003년 884명, 2004년 876명, 2005년 877명, 2006년 879명, 2007년 911명, 2008년 931명, 2009년 942명, 2010년 938명, 2011년 935명, 2012년 928명, 2013년 938명이다.26) 2019년 현재는 약 900여명이다.

 

현재 제시된 통계에는 자료가 없는 때가 있다. 그중 1895~1896년은 동학, 1905~1909년은 러일전쟁, 을사늑약, 군대해산 등이 일어난 사회적 소요 시기이다. 물론, 이처럼 한두해 건너뛴 경우에는 전후 추세를 미루어 신자 수를 짐작할 수는 있다. 한편, 1925년부터 1929년까지의 자료 공백은 원인을 알 수가 없다. 게다가 1938년부터 1953년까지는 전혀 자료가 잡히지 않고 있다. 이때는 골롬반회가 맡은 춘천교구 시절로서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이며, 일제의 박해, 해방, 전쟁으로 인한 소요가 있던 때이다.27)

 

위의 통계에서 고딕숫자 부분은 신자가 1천명 넘는 시기이고, 필기체는 2천명 넘는 시기, 줄친 부분은 신자가 급감할 때이다. 신자 수의 측면에서 보면, 풍수원본당은 신자 30여 명의 작은 교우촌이었는데, 1888년 본당이 선 직후 신자가 급증하여 1천명을 넘어섰다. 이는 공소가 본당으로 편성되어 왔기 때문이며, 동시에 신자들이 본당이 있음을 알고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인다. 더욱이 고딕-로마네스크식 성당이 건축되고 난 뒤인 1910년대에서 20년대 말까지는 신자 수가 2천명을 웃돌았다.

 

반면에 신자 수가 급격하게 준 해는 본당 분할 때문이었다. 풍수원본당은 1896년에는 원주본당이 설립되었고, 1920년 춘천본당, 1923년 홍천본당, 1930년 횡성본당을 분할했음에도 신자 수는 곧 다시 회복하여 지속적으로 1천명을 넘기는 탄력성을 보였다. 더욱이 일제강점기 산속에 있던 교우촌들이 대부분 산림조사령, 연초전매령 등으로 이산되었다.28) 이렇게 대다수 교우촌이 와해되는데 반해 풍수원본당은 지속적으로 신자가 증가하고 있음도 주목을 요한다. 풍수원본당은 600여 명 선에서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지냈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 이후에는 신자가 다시 1천명을 넘어섰고, 계속 증가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1972년 1370명을 정점으로 차츰 신자 수가 줄어 1989년에는 결국 1천명 선이 무너졌다. 현재는 9백명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서 주목할 점은 풍수원본당의 신자 수 변화는 주로 신자의 이입, 전출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본당 신자 수의 증가는 영세자가 늘어서가 아니었다. 일 예로, 성당을 세운 직후인 1888년에서 1889년에는 신자 수가 1천5백1명이 증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때 영세자는 174명이고 사망자는 335명으로(표2 참조) 자연증감으로 보면 본당 신자 수는 오히려 165명이 감소했다. 따라서 실질적 증가인 1,356명은 외부에서 전입해 왔다는 말이 된다. 이같은 전입은 주로 박해 중 피신해 있던 신자들의 재발견, 새로운 공소 편입, 교우촌으로의 이주 등으로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풍수원본당의 신자 감소도 자연감소가 아니라 인위적 현상이었다. 즉 본당을 분할하여 타본당을 설립한 것이다. 다만 초기에는 본당 분할 후에도 신자 수가 곧 회복되던 바와는 달리 1980년대 후반부터 실제적 감소세에 들어섰다. 이는 주로 신자들이 고향을 떠나는 데서 기인했다. 결국 풍수원본당 신자의 증감은 전출입이 주원인이었다. 그 과정에서 풍수원본당은 박해시대 숨어들었던 신자들을 불러내고. 그들에게 교우촌의 오랜 전통을 실어서 도회로 내보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국이 산업화가 완전히 진행된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성당 성장세도 정체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어 본당 주임신부를 보면, 풍수원본당 131년 역사에서 약 20명의 신부가 사목하여 각 신부 사목기간은 평균 6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르 메르 신부(8년), 정규하 신부(47년), 김학용 신부(20년), 딜레이니 신부(10년), 김승오 신부(17년)는 오랜 기간 사목을 했고, 이들을 제외한 다른 신부들 사목기간은 평균 2년쯤이 된다. 그중에는 본당 주임 기간이 1년 이하인 경우가 5명이나 된다. 한편, 사목기간이 10년 넘는 신부들은 각기 초창기, 춘천교구 초기, 원주교구 초기와 2000년대 들어서는 의미있는 시기를 담당했으며, 동시에 당대 본당 나름대로의 독특한 요소들을 형성해 왔다. 즉, 사목기간이 길 때 획기적인 일들을 계획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본당의 보좌신부로는 1896년 정규하 신부를 들지만, 이는 정식 보좌신부는 아니었다. 정식보좌는 김우룡(1920), 양덕환(1924~?), 이광재(1936~1938), 김교명(1938~1941), 김학용(1942~ 1943), 백응복(1950~?)과 이중현(1952~1954)29) 신부로 총 7명이 파견됐다.30) 첫 보좌신부는 본당 신자 수가 2,649명일 때 파견되었다. 이때는 안나회, 본당학교 승격, 성체거동 등이 시작될 때이다. 그리고 1925년부터 1930년까지는 통계 부재로 보좌신부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어쨌든 횡성본당을 분가하고 난 뒤부터 다시 보좌신부들이 보인다. 골롬반회가 춘천교구를 맡았을 때는 보좌 신부가 파견되었는데, 이는 선교사들에게 본당 일을 익히도록 하기 위한 선교방침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한편, 남한교회는 6·25 한국전쟁 이후 급속한 부흥을 맞았다. 이와 더불어 풍수원본당도 1965년 이후에는 다시 1,000명 선을 넘었으나, 그럼에도 보좌는 파견되지 않았다. 이중에서 풍수원본당의 대표적인 보좌는 김학용 신부라 하겠다. 그는 보좌신부를 하다가 주임이 되어 20년간 사목했다. 그의 사목 기간 성당학교인 성심학원(옛 삼위학당)이 ‘광동국민학교’로 발전했고, 1948년에는 홍천 수곡리본당(현 양덕원)이 분가했다.

 

풍수원본당의 큰 특징으로 사제가 다수 배출된 점을 들기도 한다. 본당 출신 사제로는 1909년 김윤근 신부를 비롯하여, 서병익(1910), 김휘중(1910), 박우철(1917), 신성우(1920), 박일규(1924), 정원진(1926), 이복영(1930), 방영석(1943), 최동오(1947), 신현욱(1952), 이경우(1953), 방영구(1960), 송순용(1961), 김정식과 김수길(1966), 송성식(1968), 최기식(1971), 조규남(1976), 박호영(1978), 방학길(1970), 신교선(1979), 김영진(1980), 송문식(1981), 송병철(1982), 박순신과 조규정(1982), 신현만(1982), 박우성(1984), 조규덕(1986), 한상용(1987), 박영수(1992), 김태진(1994), 박병옥(2008) 등 40명 가량(환속사제 포함)이 있다.31) 물론 외부에 가서 사제가 되었거나 사제를 기른 신자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예를 들어 최창무 대주교, 김지석 주교, 손희송 주교와 이창열, 민경국 신부의 부모들도 풍수원 출신이다. 한마디로 신자들의 전출입에서 보았듯이 신자들이 이곳에 모였다가 외지로 나가고, 아울러 사제들이 각지로 퍼져 나가면서 풍수원본당은 교회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풍수원본당에서 사제성소가 풍부한 것과 함께 특기할 점은 외곽에 위치해 있음에도 일찍부터 사제 성소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첫 성소는 르 메르 신부가 신학교에 보낸 요셉이다.32) 이어 1910년대 3명, 20년대 3명, 30년대 1명, 40년대 2명, 50년대 2명, 60년대 5명, 70년대 5명, 80년대 9명, 90년대 3명, 2000년대 1명이 나와 비교적 고른 편이다. 굳이 강조하자면, 한국전쟁 이후 성소가 계속적으로 증가했고, 골롬반회에서 맡았던 70년대에 성소가 많이 발굴되었다. 사제양성 기간을 약 8~10년이라고 한다면, 9명의 사제가 나온 80년대의 결실이 이를 드러낸다 하겠다. 본당 성소는 2000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33)

 

수도에서 떨어진 본당으로서 일찍부터 꾸준히 성소가 나오고 있음은 본당 내 다른 요인이 있다고 하겠다. 즉 학교운영이다. 본당학교인 삼위학당(광동학교) 출신 사제는 송성식, 송문식, 송병철, 최기식, 조규남, 조규정, 조규덕, 박영수 신부 등이다.34) 아울러 많은 사제가 나오면 이에 비례하여 신학교 중퇴자도 많았으리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이들 중퇴자들은 신부가 못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훈련을 더 받은 평신도로서 본당 내에서 많은 활동을 했을 것이다.35)

 

한편, 본당의 관할 영역, 즉 공소도 계속 변해왔다. 르 메르 신부 당시에는 관할공소가 34곳이었다.36) 1896년 원주본당이 서고 나서 정규하 신부에게 남은 곳은 풍수원을 포함하여 13곳이었다가37) 1913년에는 25곳으로 늘어났다.38) 1920년 죽림동 본당 분리 후에는 16곳39) 1923년도 홍천본당 분리 후에는 13곳이 되었다가40) 1930년도 횡성본당 분리 후에는 창촌, 새점터, 금대, 오상동 4개의 공소만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요컨대 관할 영역은 줄어들면서 신자는 늘어나 사회 속에서 신자비율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풍수원본당은 소속교구 변경도 여러번 겪었다. 조선대목구에서 시작하여 1911년 이후 서울대목구, 1939년부터 춘천지목구, 1969년부터 현재까지 원주교구 소속이 되었다. 이러는 사이 많은 자료가 분실되곤 했지만, 동일한 주임신부의 오랜 사목기간이 그나마 이를 메워준 것 같다. 요컨대 풍수원본당은 130여년의 역사 속에서 엄청난 신자와 성소를 한국교회에 보급하면서 국내외 변동, 교회변동에도 꾸준히 성장해 왔다. 그리고 분실된 자료들이 보충되면 이 모습은 더욱 확연해질 것이다.

 

 

Ⅲ. 본당설립과 신자 재발견 - 르 메르 신부 시기


1. 르 메르 신부와 시대 배경

 

풍수원에는 병인박해와 신미양요 등을 피해온 신자들이 촌락을 이루었다. 특히 병인박해 때 횡성지역 신자가 다수 순교하여 이 지역에 교우들이 널리 정착했다고 짐작된다.41) 1888년 6월 20일 블랑(Blanc, 1844~1890, 白主三) 주교는 안변에서 전교활동을 하던 르 메르 신부를 풍수원에 파견하여 강원도 최초의 본당을 창설하고 초대 본당신부에 임명했다.42) 르 메르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한국파견 선교사 18차, 병인박해 이후 6차로 1887년 르 푸르카드(Le Fourcade), 로(Rault) 신부와 함께 입국했다. 당시는 아직도 선교사들이 조선 관인을 만나거나 외교인 동네를 지날 때는 상복을 입을 때였다.43)

 

풍수원본당이 설정되던 시기에는 병인박해 10년간의 공백을 깨고 입국한 선교사들이 체포되어 추방당하거나 혹은 죽거나 하여 선교사 9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그때까지는 거점사목이었다. 즉 본당이란 사제관이 있는 곳이지, 모든 공소 구성체가 본당에 소속되어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반대로 말하면 본당이라 하더라도 신부가 사목 나가 있는 시간이 길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르 메르 신부는 강원도의 첫 번째 정주 선교사가 되었다.44)

 

르 메르 신부는 경기도와 근접한 횡성군 풍수원을 중심으로 12개 군에 신자 수는 2,000명 정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신자들 대부분은 1866년 이래 박해를 피해 도시를 떠나 시골과 산속에 숨은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이었다. 그는 만나는 신자 수보다 자신이 걷는 거리의 리(里) 수가 많은 것을 인지하면서도 선배들이 숨어서 다녔던 길을 떳떳이 다닌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교우촌 33곳을 방문하기 위하여 1645리를 걸어야 했다.45) 1890년 그는 작은 사제관을 지었고, 300명을 수용할 한옥 소성당을 지었다. 그는 짧기는 하지만 한동안은 강원도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46)

 

당시의 시대 상황은 1892년 횡성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외국인 배격 운동에서 잘 드러난다. 1892년 11월 르 메르 신부가 횡성지구 황달모 마을을 지나갈 때 홍효익과 안준문으로부터 부당하게 중상, 비방, 모함을 당했다. 그들은 신부가 여자들과 관계를 가지거나 또는 강제로 여자를 추행하며 태아를 약으로 만든다고 떠들었다.47) 홍효익은 지역유지였는데, 외국인을 배격하는 《정속신편(正俗新編)》48)이라는 소책자를 쓴 홍재구의 제자였다. 이즈음인 1901년 상주에서는 《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가 돌기도 했다.49)

 

홍재구(洪在龜, ?~1898)는 개항기 대표적인 위정척사운동가이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김평묵의 제자이며 사위이다. 동생은 1881년 신사척사운동 때 처형당했다. 그는 척사운동이 여러번 실패하자 말년에 강원도 봉평으로 옮겨 후학을 양성하며 생활했다. 홍재구는 서양의 오랑캐와 일본인, 청나라 사람, 서양의 학문과 청나라 기술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소(小)와 천(賤)으로 규정하고 대인지학(大人之學)과 오륜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인식했다.50) 특히 《정속신편》 6편의 처세 중 세 번째 단락인 ‘왜와 양인은 마땅히 물리쳐야 한다(倭洋之當攘)’에 보이는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힐난은 과격했다.51) 이를 읽은 르 메르 신부는 “특히 우리들이 아이들을 훔치고, 시체들을 파내어 약재를 만든다고 말하는 부분은 너무도 끔찍한 중상모략”이라고 했다.52)

 

어쨌든 남녀가 유별한 사회를 사는 홍재구의 문인들은 신자들이 신부를 보러 다니는 것이 눈에 거슬렸던가 보다. 그러나 이들의 문화충돌적 비방은 위대한 포부를 안고 갓 출발한 선교사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그는 결국 주교에게 이를 알리고, 주교는 영사에게, 영사는 독판(督辦)에게 따져서 1년 가까이 걸려 사과를 받는 선에서 매듭짓게 되었다.53) 뮈텔 주교는 르장드르(Legendre) 장군이 프랑댕(Frandin, 1892~1896) 영사 겸 대리공사에게 독판을 도와주자고 합의한 선에서 마무리되었다고 했다며 호소할 데라고는 공사밖에 없는 르 메르 신부가 답답하겠다고 했다.54)

 

그러나 이 악의적인 비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비방은 원주나 홍천 등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고, 심지어 르 메르 신부가 원주로 떠난 뒤에도 여파가 남아있었다. 정규하 신부가 고인돌로 사목방문 나갔을 때 외교인 남녀가 신자들을 능멸하며, “그 서양 사람이 해마다 자기 신도들, 특히 부인들을 방문한다고 찾아오는데, .... 필경 모두 더럽혀졌을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이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사과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자인 김창진이 이것을 빌미로 그들에게 돈을 뜯고 행패를 부렸다. 김창진은 경고를 받아도 행동을 고치지 않는 말썽꾸러기 신자였다.55)

 

이후 상황은 나아져서 르 메르 신부는 동학혁명이 지나고 난 뒤 ‘1년 내내 단 한번만’ 외교인에게 욕설을 들어 괜찮은 해였다고 고백했다. 그 뒤로는 점점 선교사가 지나갈 때 대접하겠다는 이들도 나타났다. 더욱이 1895년에는 뮈텔 주교가 고종을 알현했다.56)

 

한편, ‘머리모양’은 이 시기 신구(新舊) 갈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조각된 내각에 의해 단발령을 내렸다.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를 규탄하고 단발에 저항하는 의병들이 일어났다. 신자들이 르 메르 신부에게 ‘단발은 한국인들에게는 참수당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면서 주교께 그들의 상투를 자르지 않도록 도움을 청해달라고 부탁했다.57) 실제로 길에서 단발한 한국인들은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정규하 신부가 단발하고 수단을 입고 풍수원에 내려왔다.58)

 

끝으로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지적할 내용은 르 메르 신부가 풍수원에 있는 10년 가까운 시기 교회가 세상 밖으로 나와 외교인과 접하며 살게 되면서 양산되는 현상들이다. 르 메르 신부는 물론 정규하 신부까지 당대 두 신부는 혼배나 관면혼배 문제를 주교께 자주 문의했다. 예를 들어 남매를 서로 바꾸어 혼인하는 경우라든가59) 축첩, 보쌈 등 구습을 가톨릭 혼인생활로 이끄는 일은 큰 숙제였다. 이러한 크고 작은 충돌을 해결해 가면서 신자들이 증가하고 또 신자들은 일종의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르 메르 신부는 예비자들 중에서 유럽인들이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고 거기에 기대를 걸고 신자가 되려는 이들을 염려했다.60)

 

 

2. 신자 재발견과 새로운 순교자들

 

르 메르 신부가 풍수원본당 사목을 시작할 때는 박해를 피해 숨었던 신자들이 돌아오는 때였다. 구교우 재발견의 사례가 많다. 그 대표적 사례로, 르 메르 신부 자신이 길게 보고한 영월 주실 공소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들 수 있다. 

 

김 마티아는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아내와 어린 세 자녀를 데리고, 여러 곳을 헤매다가 주실 산속에 정착했다. 그는 교육을 받았고, 올바르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얼마지 않아 외교인들의 신임을 얻어 서당을 열었다. 학생들도 꽤 있었다. 1884년, 그는 소문으로 서양인들이 수도에 정착했고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그 무리 중에 신부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김 마티아는 제자 중에서 홍씨 소년을 불러 십자성호와 간단한 기도를 가르친 뒤 편지를 한장 써주며 서울에 가서 신부를 찾아보라고 했다. 1888년 겨울, 산골 소년은 미국 장관 집 대문 앞에서 신부를 찾았다. 그다음 그가 도착한 곳은 개신교 목사네 집이었던 것 같다.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만 듣고 쫓겨났다. 누군가 그에게 진고개에 가보라고 소리쳤다. 소년은 이리저리 헤매면서 ‘이 서양 사람들 중 신부님이 한명도 없다니.’라고 중얼거렸다.

 

이때 한사람이 끊임없이 신부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소년을 멈춰 세웠다. 그는 소년을 블랑 주교 앞에 데려갔다. 소년은 주교관에 며칠 머문 뒤, 노인 앞으로 쓴 주교의 편지, 책과 묵주, 십자고상, 성화 등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주교는 노인에게 살고 있는 마을을 떠나지 말고 사도로서의 역할을 하라고 당부했다. 마을 사람들은 온통 들떠서 교리를 배웠다. 60리 밖에서 이 소식을 접한 드게트(Deguette, 1848~1889, 崔東鎭) 신부가 이곳에 도착했다. 노인은 23년 만에 고해성사를 보았고 마을에서는 20명이 영세했다. 산골소년은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했고, 그곳 주실의 공소회장이 되었다. 스승은 전교회장이 되어 다른 곳에 가서 새로운 공소를 열었다. 그들은 복음화에 힘껏 헌신했다.

 

한편 이 시기는 이처럼 신자가 다시 돌아오고 새 신자가 나와 기뻐하는 반면에 아직도 순교자가 나는 때였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주실마을에서는 이 기적과 같은 신자 찾기에 이어 영세 지원자가 이어졌지만, 마을에서는 이와 비례할만큼 많은 반대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신앙 때문에 핍박받고 어떤 이는 순교하기도 했다.61) 예를 들면, 주실에서 공소 마을이 형성되면서 한 부인이 자신의 아들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는데 말려도 듣지 않자, 결국 화풀이로 신자인 김 막달레나를 때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62)

 

이외에도 당시는 동학도들이나 의병들에 의한 희생도 컸다. 특히 이 경우에는 목숨을 잃기보다는 주로 재산을 약탈당하거나, 배교를 강요당했다. 르 메르 신부는 후에 동학혁명 기간에 2천명의 신자들 중 박해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약탈과 고문을 피하며 신앙을 증거했다고 위로했다. 약 15명 정도가 배교했는데 두 사람은 심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마음이 약해서 꺾였으나 자발적 보속으로 이를 기워 갚았다.63) 또한 교회에는 을미사변 이후 봉기한 의병들한테 강요당해 성물을 포기하고 배교한 신자들이 보고되기도 했다. 신부는 이때 적극적인 배교자와 입으로만 배교한 사람들을 어떻게 구별하고 보속시킬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64) 한국교회에서는 아직까지 조사를 하지 않고 있지만, 실제로는 개화 이후에도 신자임을 드러내면서 희생당한 ‘순교자’들이 적지 않다.65)

 

한편, 1866년 박해를 피해 외교인들에게 시집간 여인들의 긴 시간도 바로 ‘순교자 같은 생활’이었다. 병인박해를 피해 외교인과 결혼했던 부인이 선교사가 다시 입국한 것을 알고 르 메르 신부를 밤에 보러 왔었다. 그러나 남편이 성당에 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후 여성이 페스트에 걸려, 지옥은 무섭다고 울부짖었으나 아무 성사도 받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러나 이 죽음 후 그 가족들이 영세를 받았다.66) 이와 같이 르 메르 신부 시기는 정부에서 신앙을 박해하여 한 방향으로 피하면 되었던 박해시기와는 달리, 신자들의 세속에서의 정착이 어려운 때였다. 신자들은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면서 보다 단결하고 자존감을 찾아나갔다.

 

 

3. 르 메르 신부의 사회복지 활동

 

르 메르 신부가 선교 외에 힘쓴 사업은 학교설립과 성영회(聖嬰會 또는 嬰孩會) 활동이다. 이 두 사업은 신자, 비신자 여부를 가리지 않고 수혜를 주어 외교인과 유대를 맺는 기회가 되었다.

 

르 메르 신부가 선교를 시작했을 때 성당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일은 매우 보편적이었다. 교회방침이 1공소 1학교여서67) 상당히 여러 곳에 학교가 세워졌다. 르 메르 신부 때에도 이미 여러 곳에 학교가 있었다. 1891년에서 2년 사이 강원도에는 6곳에 한문서당이 열려 학생은 총 26명이었다.68) 이듬해 강원도 동부지역에는 갈고개(8명), 풍수원(7명), 고인돌(4명), 가루개(3명)의 네 곳에 학교가 있었고, 총 학생수는 22명이었다.69) 그러나 학생수가 차츰 줄어 결국 4~5년이 지나자, 시작할 때 25~30명이었던 학생이 단 한명 남았다. 학교 운영비는 선교회에서 나왔던 것 같다.70)

 

한편, 이 학교가 교리학교와는 다른 형태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선생이나 학생 중에는 외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르 메르 신부가 어린이들에게 세속 학문도 가르치려 했던 점과 아울러 외교인에게도 기회를 베풀었음은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또하나 르 메르 신부가 애쓴 선교활동 중에 하나가 성영회이다. 이는 버림받은 아동들을 구제하기 위해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홀본 장송(Holbon Jansong)에 의해 창설되었다. 한국교회에서는 1852년 메스트르(Maistre, 1808~1857, 李)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는 고아를 한 명씩 독실한 신자 가정에 맡기고 매달 양육비를 지원하여 키우는 제도이다. 비용은 프랑스의 성영회에서 지원되었고, 나중에는 선교보조비에서 지급되었다. 그 운영방식도 세세히 규정되어 있다.71)

 

성영회 어린이의 상황을 보면, 1891-92년도 강원도 내 성영회 어린이는 18명이었다. 나이는 2~11살에 걸쳐있었다. 그런데 어린이 18명 중 영세명이 없는 어린이가 6명이다. 또한 어린이를 맡은 사람 중에도 한 명이 이 서방으로 영세명이 없다. 이해에는 4명의 어린이가 몇달 밖에 살지 못했고, 그들의 양육비는 부양한 달 수만큼만 지급했다.72)

 

그리고 이듬해에는 어린이 총 28명 중에 영세명이 없는 아이가 8명이나 된다. 또 5명의 어린이는 ‘미세’라는 이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는 이름이 아니고 특정한 지칭인 것 같다. 아마 세례를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이 아닌가 싶다. 마찬가지로 1893-94년도 성영회 어린이는 32명인데, 5명은 영세명이 없다. 여기에 ‘미세’로 구분된 어린이가 7명이어서 신자 아닌 어린이가 12명이나 된다. 이에 비해서 이때 어린이를 맡은 집은 전부 신자이다. 성영회 활동은 교회 고아사업이지만 신자와 비신자 구별없이 모든 어려운 어린이들에게 열려있었다고 하겠다.

 

한편, 성영회에서 양육된 어린이가 장차 어떻게 되었을까는 주목을 끈다. 르 메르 신부는 자신이 고용한 마부의 며느리가 서울 성영회 출신이라고 했다.73) 이로 미루어, 성영회 출신들이 어디선가 교회를 버텨주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학교설립이나 성영회 사업은 교회의 사회복지 활동이면서 교회가 비신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큰 동력이었다.74) 동시에 이러한 학교나 성영회를 거치며 자란 어린이들이 교회의 지지돌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르 메르 신부는 교회의 저력을 길러 나갔다.

 

 

4. 사제들 조직체계와 생활

 

풍수원본당이 설 때 왜 풍수원에 자리를 잡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강원도는 르 메르 신부가 이미 이곳 북부를 순회사목했으니 아마도 최적의 장소를 골랐을 것이다. 어쨌든 풍수원에 성당이 서게 되니 신자들이 모였고, 점점 강원도 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성당이 들어선다는 것은 공소 때와는 큰 차이가 있다. 본당이 설정되면 교구행정이 지방까지 미치고, 신자들이 교회 행정체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주임신부가 있음으로써 신자들은 교구청과 직접 연락이 되고, 신자들끼리 혹은 신부나 교구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도자 없이 지내왔던 박해기 신자들은 성당이 서자 급격히 모이고 이를 계기로 왕성한 활동을 해나갔다.

 

또한 당시 신부들은 이웃한 신부들끼리 고해성사를 하면서 정규적으로 왕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신부들은 두 세사람이 짝이 되어 서로 적어도 한달에 두번 정기적으로 상호 방문해야 했고 고해성사를 봐야 했다.75) 한 선교사가 두 동료 사제에게 교류를 주선해야 할 경우 그 중 한 명이 한국인 사제이면 그는 두 사람의 방문을 받는 대신 한국인 사제를 방문했다.76) 이 교류의 상대자는 단순히 고백 신부가 아니라 지지자이며 친구이고 선교지에서 없어서는 안될 속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본당설립은 본당주임 한명만 오는게 아니라 사제단의 문화에 접할 수 있는 계기까지 부여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풍수원본당은 새로 서품된 한국인 새 사제의 첫 행로를 구축해 가는 장소가 되었다. 정규하 신부는 현대 교회 행정체계에 처음 들어가는 신부이다 보니 여러 가지 규칙들이 본인 시기에 세워졌다. 그가 사제 피정에 자신도 참여하느냐고 물은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77) 신부들은 월피정 1번, 연피정 1번이 의무였다. 월피정은 개인적으로 하면 되지만 연피정은 반드시 공동으로 했다. 그런데 교회 체계가 잡힌 뒤로는 일반적으로 선교사와 조선인 신부들이 따로 피정을 했다. 대략 선교사들이 먼저 피정하고 이어 조선인 신부들이 피정을 했다. 보통 선교사들은 4월, 조선인 신부들은 5월에 피정을 했다.78)

 

이밖에도 경제적인 문제도 정해야 했다. 르 메르 신부는 정규하 신부가 풍수원으로 온다고 했을 때, 주교께 그의 생활비를 도와주냐고 물었다.79) 그가 정 신부에게 미사예물을 받아오라고 한 점도 바로 경제적 문제 때문이었다. 이와는 달리, 정규하 신부는 첫달에 주교께 돈이 모자랐음을 보고하면서 부모가 도울 것이라고 했다.80) 물론 당시 조선인 사제만 생활비가 모자라는 것은 아니어서, 르 메르 신부도 생활비 적자를 보고하고 있다.

 

그 외 대우 상에서 볼 때, 당시 선교사와 조선인 신부 사이에 큰 차이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1·2차 세계대전을 겪고 교황청의 지원이 약해지면서 선교사에게 지원하는 선교회 금액과 조선인 사제에게 지원하는 액수는 차이가 났다.81) 그리고 교회에서는 조선인 사제들은 조선인 신자들이 생활을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나갔다.82)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없어지는 날이 오면 한국인 사제들의 생활비를 교인들이 전적으로 담당해야 할 터인데도 교무금이나 미사예물이 적은 관습을 걱정했다. 정규하 신부도 생활하면서 미사예물을 청하고 또 받았음에 감사하는 일이 여러번이었다.83)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초기에는 선교사와 그들이 양성해낸 조선인 신부들과 차이는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선교사와 조선인 신부들이 함께 모였을 때 미사에서 복사 역할 분담은 선교사와 조선인 사제간에 고루 나누었다.84) 한편, 교구법원 재판관에는 정규하 신부를 비롯하여 재판관 모두 조선인 신부들이 선출되기도 했다.85) 부주교를 선출할 때도 조선인 사제들도 전부 투표에 참여했다.86) 이는 정규하 신부를 비롯한 초기 조선인 신부들이 감당할만한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도달한 결과라고 하겠다.

 

요컨대, 르 메르 신부는 문화 충돌을 이겼고 숨어들기만 했던 신자들이 모여들 목적지를 세워 놓았다. 또한 본당이 설립됨으로써 신자들은 교구 행정체계 안에 들고 그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성영회 운영과 학교설립을 통해 신자와 비신자와의 관계를 열어놓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자들은 단결하며 긍지를 회복해 갔다. 또한 르 메르 신부는 정규하 신부가 오게 됨으로써 조선인 사제의 첫출발에 대한 교회 안의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강원도 감영이 있는 새 선교지로 옮겨갔다.

 

 

Ⅳ. 풍수원본당의 정체성 확립과 성장 - 정규하 신부 시기


1. 정규하 신부의 풍수원본당 부임

 

풍수원에 본당이 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규하 신부가 풍수원에 남는 것도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 ‘머리스타일’ 때문에 풍수원주임이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정착은 공고(鞏固)했다.

 

1896년 4월 26일에 강성삼, 강도영, 정규하 신부의 사제 서품이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빌렘(Wilhelm, 1860~1938, 洪錫九) 신부까지 동료 신부 전원이 참석했다. 5월 2일 새 사제들이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리고 5월 4일에는 정규하 신부가 부모를 만나고 집에서 며칠 쉬기 위해 용인 본가로 갔다. 그러는 동안 신자들이 조선인 신부들의 생활 대책에 대해 논의했다. 1896년 5월 17일에는 강성삼 신부가 제물포, 부산 쪽으로 떠났다. 삼일 뒤 5월 20일에는 강도영 신부가 미리내로 떠났다.87) 그런데 이미 5월 초에 떠난 정규하 신부는 거의 두달쯤 지나 단발을 하고 수단을 입고 풍수원으로 왔다. 그의 본래 목적지는 하일 방면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먼저 당시 강원도 일대의 책임을 맡고 있는 르 메르 신부를 찾아 풍수원으로 향했다.

 

정규하 신부는 교구청을 떠난지 한달 여나 지나서 르 메르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르 메르 신부는 정 신부가 이미 다른 곳으로 간 줄로 여겼다가 편지를 받고 놀랬다. 그러면서 르 메르 신부는 당시 단발한 채로 하일까지 가는 것은 위험하다며, 평창이나 영월이라면 관리가 없으니 괜찮으리라고 답했다. 전국이 을미사변 이후 단발령으로 소란스러운 때였다. 이 소란으로 말미암아 르 메르 신부는 정규하 신부가 머리를 다시 기르는 편이 좋겠다며 머리카락이 없는 머리란 한국인에게 위험천만하다고 당부했다. 즉 망건을 쓸 수 있도록 길러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실제로 정규하 신부가 단발로 도착했을 때 신자들은 정규하 신부의 머리를 보고 무섭다고 하고, 외교인들은 불쌍하다고 했다.88)

 

르 메르 신부는 정규하 신부의 편지에 답을 하고 난 뒤에 주교께 정규하 신부에게 일정한 수당이나 봉급이 있는지, 하인은 쓸 수 있는지 등등 제반 사항을 확인했다. 한국인 사제에 관해 모든 것을 새로 정하던 때였다. 그는 정 신부에게도 신자들이 가난하니 미사예물을 꼭 가지고 와야 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는 주교께 정규하 신부에게 적당한 공소를 맡기든가 아니면 풍수원을 그에게 맡기고 떠나든가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르 메르 신부는 그해 3월 감영(監營)이 있던 원주에 선교거점을 마련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선교거점을 늘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원주에 들어서서 “이렇게 많은 인구 중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요람 안에 불러들이려는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동시에 저는 그 선교사가 겪게 될 시련도 잘 압니다. 처음 시작은 항상 어렵습니다. 여기서 저는 멈추렵니다. 이 도시에 뿌리를 내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었다.89) 즉 그는 또다른 선교지를 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풍수원본당 신자들은 자발적으로 모금해서 성당을 수리하고, 신부가 옮겨가기를 말렸던 것 같다. 그 역시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90)

 

이 무렵 앞서 본 것처럼 정규하 신부에게서 편지가 왔고, 한달 후 그가 도착했다. 그리고 한달 가까이 두 신부가 함께 지냈다. 한달 끝에 드디어 정규하 신부가 하일로 떠나겠다고 하자, 르 메르 신부는 그가 하일까지 140리를 하루에 가기 어렵고 또 삭발을 한 채로 다니기에는 위험하니 풍수원에 남으라고 하면서, 자신이 원주로 떠나겠다고 결정했다.91) 르 메르 신부는 8월 17일, 신자가 단지 세명뿐인 원주로 떠났다. 원주에서는 많은 외교인들이 선교사를 구경하러 왔었다.92) 그러나 이것은 감영이 있던 조선사회의 중심으로 천주교가 진출한다는 또하나의 큰 개척이었다.

 

정규하 신부가 이렇게 어렵게 정착하고 난 뒤에도 주교가 풍수원에는 다른 사람을 보낼 예정이었다는 소문, 정 신부에게 3년쯤 후에 다시 발령이 날 것이라는 소식들이 있었다. 이에 정 신부는 주교께 당장이라도 옮길 수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93) 한편, 정규하 신부가 주교께 머리를 길러도 좋겠느냐고 문의한 점이 눈에 띈다. 외국인 선교사에게는 상관없는데 한국인 신부에게는 단발이 문제가 되었던 듯하다.94) 이처럼 애매한 정규하 신부의 출발은 47년의 뿌리가 되었다.95)

 

 

2. 서양식 성당 건축

 

풍수원본당에서 눈에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가 성당 건물이다.96)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 절대적 신앙, 물질적 협력, 정신적 유대감으로 성당을 지었고, 성당은 세상 밖으로 교회의 모습을 과시하는 커다란 상징이 되었다.97) 게다가 풍수원 성당은 마치 작은 교우 집들이 그 앞에서 자취를 감춘 듯 계곡에 혼자 우뚝 솟아 있다.98)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 의외의 모습으로 서 있는 성당은 120년 전 사람들에게는 더 큰 경외감을 자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는 성당은 두 번째 성당이며 본당 신자들로서는 세 번째 지은 성당이다. 첫 번째 지어진 성당은 한옥이었다. 르 메르 신부가 정착하고 나서 산골 한가운데에 성당을 짓고 1891년 10월 1일 잔치를 벌였다. 전형적인 초가 한옥이었다. 많아야 300명 들어갈 수 있는 규모였다. 이삼백 프랑이 모자라 기와를 얹지 못했지만, 그래도 르 메르 신부 자신의 피와 땀의 결과였다.99)

 

뮈텔 주교는 첫 번째 강원도 사목 방문 중에 이 성당에 왔다. 주교는 1891년 10월 2일부터 5일까지 머물렀다. 10월 2일, 정오경 풍수원 교우들이 주교를 마중 나갔다. 특히 어린이들은 여인숙까지 갔다. 풍수원을 십리 남겨놓고 포수가 주교의 도착을 알렸다. 행렬은 점점 장엄해졌고, 산과 고개와 깊은 골짜기를 지나 마을 앞에 이르렀다. 르 메르 신부가 입구에서 10여명의 횃불을 든 사람들에게 행렬을 지시했다. 성당, 집 모두가 새롭게 잘 건축되었다.

 

10월 4일 로사리오 축일(매괴첨례일)에 군중이 모였는데, 다 수용하기엔 성당이 너무나 작았다.100) 주교는 영성체, 견진성사, 고해성사 등을 시행했다. 저녁때 소성당의 축성식이 있었다. 마니피캇을 노래하고, 성체를 강복하고 2명의 어른에게 영세를 주었다. 그렇게 이 한옥성당은 축성되었다.

 

그러나 주교가 첫날 느꼈듯이 성당은 불충분했다. 1896년에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해서 풍수원 성당을 수리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때 마침 정규하 신부가 부임하면서 아마 성당을 거의 새로 짓게 되었던 것 같다. 정 신부는 이듬해 성당건축이 다 되어간다고 보고하면서, 12칸 되는 한옥으로 모양은 이전보다 낫다고 했다.101)

 

1900년 가을에 뮈텔 주교는 다시 사목방문 차 풍수원본당에 왔다. 주교는 11월 6일 오후에 마중 나온 본당 선발대와 만났고, 곧 모든 마을 사람들과 만났다. 행렬이 보이는 산기슭에는 정규하 신부가 나와 있었다. 주교는 르 메르 신부의 옛 아성으로 입성했었는데, 그것이 이미 무너지고 있다고 느꼈다.102) 한옥 성당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나 보다. 어쨌든 성당은 이렇게 선교사에서 한국인 사제로 넘어가는 미래를 보여주었다.

 

풍수원본당 신자들은 1905년을 넘기면서 새 성당을 지으려고 건축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9년 아직 충분치 않지만 명동대성당을 지었던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약현성당을 모방한 성당을 짓기로 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30칸(120평) 규모로 2,100원의 비용이 드는 공사였다. 국내에서 일곱번째로 지어진 고딕-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며 강원도 최초의 서양건물이었다.103) 약현성당은 정규하 신부가 1896년 사제서품을 받은 성당이다. 또한 그는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외국에서 공부하다 온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선교사는 한옥, 조선인 신부는 양옥으로 성당을 짓는 결과가 되었다. 이는 정규하 신부의 경향을 보이며 또한 풍수원본당의 모습이 될 것이었다.

 

뮈텔 주교는 1910년 가을 강원도 사목방문 중에 성당을 축성했다. 11월 7일 주교는 약 10리 거리까지 마중나온 정규하 신부를 만나 1시 반쯤 풍수원에 도착했다. 주교는 이틀 뒤인 9일날 성당을 축성했다. 성당 밖을 축성한 후, 주교 일행이 도문을 노래하는 동안 교우들은 성당 밖에서 도문을 바쳤다. 성당은 대만원이었고 특히 앞줄이 대단히 빽빽했다. 군수 등 지역유지들은 오지 않았다. 영성체자 450명, 견진자는 전날 받은 65명을 제외하고도 150명이나 되었다. 오찬 잔칫상은 학교가 내려다보이는 옥상의 텐트 안에 차려졌다. 옛 성당이 학교로 사용되고 있었다. 3시경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종을 세례했다. 성당 축성식에는 강도영 신부, 이상화(李尙華, 1876~1957) 신부 등도 참여했다. 이어 본당에서는 1912년 성당 옆에 벽돌로 사제관을 신축했다. 현재의 유물전시관이다. 이 두 건물은 당대 민둥산 바로 밑에서 천주교의 빛나는 상징이었다.

 

 

3. 사제양성과 사회복지 사목

 

정규하 신부는 재임 47년간 신자들을 단합하고 교회사업을 펼 수 있는 여러가지 일을 시작하여 줄기차게 성장해 나왔다. 그는 성당학교를 제대로 운영함으로써 많은 사제와 수도자를 육성했고, 안나회를 통해 자신이 실천하고자 하는 사회봉사를 수행했다. 나아가 그는 성체거동을 계기로 주변 신자들을 한곳에 모아 천주교의 세를 세상에 과시했다.

 

a. 삼위학교와 사제 배출

 

성당학교는 르 메르 신부가 시작했으나 그가 연 학교들은 그의 재임기에 이미 쇠퇴했다. 그런데 정규하 신부가 1910년에 본당학교로 다시 시작한 삼위학교는 매우 번창했다. 그는 교우 유지들과 상의하여 삼위학당을 설립, 성당 사랑방에서 학생들을 모아 한글, 한문, 수학, 역사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중요한 사실은 일제강점기 일제가 민족교육을 방해하는 바람에 요건을 갖추지 못한 학교들이 비인가 학교로 남아 결국 폐교하게 되는데 반해, 삼위학교는 성심학원으로 등록될 수 있었다. 학교를 정규인가 신청할 때 정규하 신부는 자신이 없었다.104) 그러나 교구장의 격려와 예견이 적중했다.

 

이렇게 성당학교가 운영되는 덕분에 풍수원본당에서는 본당 출신 사제가 많이 나올 수 있었다. 신학생 교육은 처음 출발할 때는 교회가 자체적으로 운영했다. 조선총독부는 일제강점 직후부터 계속적으로 조선교육령을 발표하면서 교육을 통제했다. 1915년 조선교육령으로 소신학교도 변화를 맞아 1920년대 이후로는 정식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증이 있어야 입학할 수 있었다.105) 이 때문에 당시 교통도 불편하고, 유학을 시키기도 어려워 지방의 공소나 본당에서는 사제가 나오기 어려운 여건이 되었다. 유명한 교우촌인 물미공소나 쌍호공소만 해도 1960년대 들어서야 첫 사제가 나왔다.106)

 

반면에 풍수원에는 ‘초등학교’가 있음으로 해서 그 시절에 사제를 많이 배출할 수 있었으며, 또 졸업생들의 도회 진출도 수월해질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본당 출신 사제들이 많음으로써 자연히 교구청과의 연락은 더욱 긴밀해졌다. 실제로 뮈텔 주교는 보좌 신부나 출신 신부들이 오가는 것도 꼼꼼히 기록했다.107) 그리고 신자들도 이 학교를 졸업하고 도회로 뻗어간 이들을 통해 넓은 생활영역을 구축하고 활동하게 되었다.

 

신학생을 많이 낸 정 신부는 자연히 서울 신학교에도 관심이 높았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의 데모나 수업 거부 사태들이 일어났을 때 주교는 한국인 신부들에게 중재를 맡겼는데, 정규하 신부가 이에 적극 헌신했다.108) 결과적으로 삼위학당이 정식 학교로 남으면서 풍수원에서는 지역 출신 인재를 많이 길러냈으며, 이들은 풍수원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발판이 되었다.

 

b. 안나회를 통한 사회복지 사업

 

정규하 신부는 사제를 양성해 기둥을 세우고, 세속에서의 일은 안나회와 함께 했다. 본당에는 일찍이 김휘중 신부의 누이가 중심이 되어 1911년 설립한 여성단체가 있었는데, 이는 5~6년 동안 활동하다 내부갈등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922년에 정규하 신부가 정식으로 ‘안나회’라는 명칭을 인준하고 규칙을 정해주면서 새로 출발했다. 이때 초기단체의 멤버들이 그대로 흡수된 것 같다.

 

정규하 신부는 이때 〈안나회원 인명부〉와 〈허원문답〉을 작성했다. 안나회는 미혼, 기혼자 모두 포함했는데, 많을 때는 회원이 120여 명이나 되었다.109) 안나회를 수녀원으로 조직하려다가 성모회가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초기 동정녀가 세울 때 지향하는 바였을 수 있다. 하지만 정규하 신부가 규정한 안나회의 회칙에는 공동수련이나 공동생활에 대한 조항이 없다. 오히려 일반 성당의 잘 운영되고 있는 성모회 수준이다.110)

 

안나회의 가장 주된 목표는 외교인들의 회개였다. 그들은 매일 한 번씩 성체조배를 하고, 한 주에 세번 함께 모여 교리문답을 외우고, 불쌍한 연령들을 위해서 미사예물을 봉헌했다. 출범 이듬해부터는 매일 비신자와 외교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했다. 또 그들은 집을 마련해서 가엾은 할머니들과 여신도들과 입교하기를 원하는 외교인들을 돌보았다. 그 집에는 과부 7명과 처녀들 3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111) 물론 그들은 사비를 털어 병자와 어려운 이웃들을 도왔다.112) 안나회는 청소 등 성당 안팎의 소소한 일부터 신부의 공소방문, 이웃 비신자 임종자에게 대세를 주고 연도하는 일까지 교회의 크고 작은 일에 봉사했다. 그들은 신부가 펼치는 세상 안에서의 사회활동에 있어 충실한 보조자였다.

 

반면에, 풍수원본당에는 안나회 외에는 별로 활발한 신심단체가 없었다. 안나회의 활동 덕에 수녀들 초빙도 늦었던 것 같다. 본당에 수녀회 진출은 1963년 인보성체회가 학교로 파견되면서부터였고,113) 1998년에 미리내 성모 수녀회가 들어왔다. 결론적으로 정규하 신부는 본당을 공고한 하나의 체제로 운영했고, 그 단체는 신부의 긴밀한 지휘·감독 하에 있었다.

 

c. 지역사회의 구심점 – 성체대회

 

성체거동 행렬은 본당 신자들을 단결시키고 지역사회에 교회의 자존감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풍수원본당에서는 1920년부터 시작하여 6·25 한국전쟁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년 성체현양대회, 즉 성체거동이 이루어졌다. 한국교회에서 현재까지 성체거동을 이어오고 있는 본당은 장호원본당과 풍수원본당이다. 장호원본당에서는 1914년부터 성체거동 행렬을 시작했다.

 

성체거동은 성체축일 날에 행하는 연례행사지만, 그렇다고 매 본당마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을 요한다. 즉 성체거동 때는 이웃한 성당의 신부와 신자들이 함께 참여했다. 일 예로 1916년 강도영 신부는 성체첨례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장호원의 부이용(Bouillon, 1869~1947, 任加彌) 신부에게 갔다.114) 그리고 그는 매년 장호원의 성체거동에 참여했는데, 1924년에는 순례와 교육차원에서 보좌 박 마르코 신부를 대신 보냈다.115) 장호원본당의 1922년 성체거동 때에는 드브레(Devred, 1877~1926, 兪世俊) 주교가 참석하기도 했다.116)

 

이와 마찬가지로 풍수원본당에서도 여러 사람이 초청되어 함께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1933년 5월 풍수원본당의 성체거동 때에는 서병익(1881~1948) 신부, 김윤근(1878~1943) 신부가 사진에 보인다.117) 1935년 성체거동에는 라리보(Larribeau, 1883~1974, 元亨根) 주교, 정규하 신부, 윤예원(1885~1969) 신부가 있었고, 1937년에는 심재덕(1908~1945), 유영근(1906~1950?), 윤예원, 정규하, 이광재(1909~1950) 신부 등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118) 이를 통해 당시 풍수원본당이 일대에서 상당히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으며 그 지위를 계속적으로 누리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현재에도 풍수원본당에서는 교구장을 모시고 여러 명의 사제 공동집전으로 성체대회를 치르는데 수천명의 신자들이 참여하고 있다.119) 이 역시 풍수원본당의 위상을 보이는 일이라 하겠다.

 

 

4. 정규하 신부의 풍수원 세계 완성

 

정규하 신부는 본당을 맡고 나서 성당을 잘 지었다. 그리고 학교를 운영하면서 성당에서 필요한 인재들을 길렀다. 그뿐 아니라 본인이 신경써야 할 사회복지 문제는 안나회를 통해서 시행해 갔다. 그 위에 성체거동 등으로 교회와 사회 내에 구심점으로 부각되어 갔다.

 

더욱이 그는 신학생을 육성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120) 이렇게 배출된 학생은 본당에 다시 보좌로 오는 등 정규하 신부의 사목방침을 이어나갔다. 특히 김학용(金學用, 1909~1963) 신부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바로 성당 곁에서 자라121) 신학생이 되었으며, 1942년 풍수원본당 보좌로 와서 1943년 정규하 신부가 선종하자 본당주임이 되었고, 20년 동안 사목을 했다. 가히 정규하 신부의 체계가 그대로 이어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이루어지는 데는 몇가지 요소들이 있다. 우선, 정규하 신부는 친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초기 친가에서 그의 생활비를 보조했다.122) 나중에는 그의 집 재산의 상당부분이 성당에 헌납된 것 같다.123) 그뿐 아니라 친인척 등의 재산 기부도 있었던 것 같다. 동생이나 조카가 일으킨 재산문제들은 이러한 배경에서 야기된 갈등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신부의 집에서 많은 기부를 하니까 신자들의 기부도 줄이었던 것 같다. 현재 풍수원본당의 토지면적이 약 2,310㎦(70만평)이다. 그런데 성당 뒷산 등은 신자들이 기부했고, 여기에는 신자들 묘지가 있었다.124)

 

반면에 정규하 신부네는 이렇게 재산을 기부하면서 신부의 가족, 친인척이 풍수원에 와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규하 신부가 서품받고 사목을 시작할 때는 친가가 용인에 있었다.125) 그런데 현재 정규하 신부 부모의 묘는 풍수원 성당 뒷산에 있다.126) 또한 부친 임종에 대한 모습이 주교께 올린 편지에 남아있는데, 이때 부친의 임종을 지키러 본당을 떠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127) 그러므로 정 신부 서품 후 10년이 되기 전 어느 시점에 부모들이 풍수원본당으로 이사한 것 같다.

 

그리고 이벽 가문의 후손인 이윤영은 아버지 때 풍수원 근방으로 이사왔는데, 이사를 주선했던 당숙이 정규하 신부의 매부였다.128) 이윤영의 재종 이운영도 이곳에 살고 있었다. 또 정규하 신부의 조카이며 나중에 신부가 된 정원진(鄭元鎭, 1900~1976)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다른 조카 정형진은 신부의 도장을 훔쳐서 면 서기 성백용과 결탁하여 인감증명을 발급받아 신부의 논을 팔아 치웠는데129) 그도 함께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정규하 신부가 주교께 돈을 청하러 간 동생을 거절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는 것을 보면 동생도 함께 있었다고 하겠다.130) 조카 정 카타리나도 정 신부를 모시고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사한 가족과 친인척들은 교회 사무도 나누어 한 것 같다. 식간 등 신부의 친인척들이 교회일을 맡았다. 이런 상황은 현재 같으면 논란이 되고 부작용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텐데 풍수원본당에서는 모든 것이 순방향으로 작용한 듯 하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그는 후계를 이을 사제도 육성했기 때문에 이 체제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결론적으로 정규하 신부는 자신의 모든 힘과 재력, 시간을 풍수원본당을 위해 바쳤다고 하겠다. 그리고 신자들이 사회와 연결해 나갈 시스템인 학교, 안나회, 성체거동 등도 제대로 운영되었다. 또한 그는 넓은 영역을 본당 재산으로 구축해 놓았으며, 성당 뒷산은 묘지로 활용되어서 사람들은 함께 묻혀 부활을 기다리게 되었다.131) 이리하여 풍수원본당은 탄생에서 교육, 생업과 죽음까지 모두 그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세계가 되었다. 풍수원은 신자들 일생의 추억을 쌓는 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아늑한 분위기와 자연환경 덕인지 풍수원본당은 선교사들이 교우촌으로 방학을 보내러 오는 곳이기도 했다. 드망즈(Demange, 1875~1938, 安世華) 주교가 신학교 교수 시절, 1904년과 1905년 이곳에 방학을 보내러 오곤 했었다.132) 드망즈 신부는 이에 앞서 1902년 용소막에서 방학을 지내기도 했다.133) 하지만 당시 풍수원본당은 용소막과 달리 한국인 신부의 본당이었다. 이러한 인연에서인지 정규하 신부는 드망즈 주교의 은경축 축하에 참여하고자 했고, 미루었던 기회를 다시 주교께 허락을 요청했다.134) 당시 포교지를 잠시 떠나기 위해서는 포교지의 바로 가까운 이웃 동료 사제의 집을 제외하고는 대목구장의 사전 허락이 필요했다.135) 이러한 모든 방문도 풍수원본당의 역량으로 쌓여갔을 것이다.

 

 

Ⅴ. 풍수원본당의 사회역할과 과제

 

지금까지 풍수원본당은 성당 범위 안에서 모든 생활이 이루어지고 또 이어갈 수 있도록 완벽한 ‘하나의 세계’로 나아갔음을 보았다. 이제 그 힘으로 풍수원본당이 한 일, 즉 풍수원본당의 사회 기여와 역할을 보고자 한다. 풍수원본당이 교회 안팎으로 미친 영향, 본당 운영의 기본인 교우촌, 선교사와 신자 사이의 자리를 굳혀간 최초의 한국인 사제의 역할 순으로 그 특성만 살피겠다.

 

 

1. 신자 결집과 확산

 

풍수원본당의 가장 큰 특징은 강원도 신앙의 못자리이며 신자들을 근대 도시로 내보내 공급해주는 역할을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본당은 신자들의 전출입이 많은 곳으로서 박해로 숨어든 신자를 재결집하고 이들에게 다시 교우촌 문화를 입혔는데, 이후 그들이 도회나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나가 활동했다.

 

우선, 풍수원본당은 성당 주변 신자가 모여든 것뿐만 아니라 정규하 신부 당시에도 신자들이 멀리서부터 이주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103위 성인 중에 이윤일(李尹一, ?~1867) 성인은 충남 홍주 사람이다. 그는 경상북도 상주를 거쳐 문경 여우목에서 살다가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대구 관덕정 형터에서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형장 인근에 가매장됐다가 이후 아들 이의서 등에 의해 대구 날뫼를 거쳐, 용인 먹방이 뒷산에 묻혔다.

 

《치명일기》에 오른 순교자들에 대해 증언자료를 수집하라는 주교의 명에 따라 이윤일의 아들 이의서와 그의 또다른 아들의 부인인 박 아네스는 1897년 본당 신부에게 이윤일의 순교사실을 적어 올렸다. 이후 한국교회에서는 병인박해 순교자 시복 추진을 위해 1899년 6월부터 시복재판을 열어 1900년 11월까지 총 100명의 증인을 대상으로 증언을 청취했다. 그리고 교회는 1919년 7월 예부성성으로부터 교황청 수속을 위한 교회 재판을 위임받아 다시 1921년 2월부터 시복재판을 개정했다. 그런데 이 기간 사이에 이의서는 풍수원본당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다.136)

 

a. 신부님이 찾는 사람들은 먹방이에 살지 않습니다. 이 마티아 의서는 여주 안산에 살고 있고, 이마티아 의서의 형수이고 박람의 대고모인 박 아녜스는 이미 용인 먹게리에서 사망했습니다.137)

 

b. 순교자 이요한의 무덤에 대해서 조사는 하겠지만, 먹방이에 어떤 순교자의 무덤이 있다는 말은 전혀 들은 적이 없고, 지금 구교우나 노인들도 별로 없으니 ‘1866년 순교자 이 요한’이라는 정보만으로는 찾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이 순교자의 후손이 있는지, 전에 어디서 살았는지, 순교 장소가 어디인지 등등138)

 

c. 지시하신 대로 이 마티아더러 순교자 이 요한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위임 판사 시잘레 신부님을 만나보라고 용소막에 보냈습니다.139)

 

위의 자료 a,b는 용인에서 사목하는 강도영 신부의 편지이고, 자료 c는 풍수원본당 주임 정규하 신부의 편지이다. 이의서는 1900년 당시는 49세로서 용인 먹방이에서 농사짓고 있었다.140) 그런데 두 번째 재판 때는 풍수원에서 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신자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편이고 또 연고 따라 집단적으로 이주한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특히 산속 교우촌이 와해되는 시기에도 풍수원에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신자들이 많았다. 앞에서 인용했던 이벽의 후손 이윤영도 아버지 대에 정규하 신부를 도우러 풍수원 부근으로 이사했다.141)

 

한편, 풍수원 쪽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도회로 나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 풍수원에는 전통시대 원(院)이 있었다고 한다. 즉 교통의 요지였다는 말이 된다. 또 성당이 있는 횡성군 유현리 마을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접경지역이며 원주, 양평 등으로 나가기 쉬운 길목에 있어서인지 신자들이 경기도 일대로 많이 진출해 나갔다.142) 그리하여 교회사를 하는 사람들은 풍수원본당의 역사를 알면 경기도 북부에 새로 생긴 교우촌들의 역사 시작은 다 파악할 수 있다고도 한다.

 

한 예로 칠울공소를 들 수 있다. 신앙의 자유가 오고 나서 강원도 홍천, 원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살던 사람들 중 일부가 처음에는 칠울에서 남동쪽 6km 떨어져 있는 우골 교우촌으로 이주해 왔다. 그로부터 5년째 되던 해인 1896년 김근배, 김연배, 박만보 가족이 이곳 칠울로 이주하여 교우촌을 형성했다. 이들 세사람은 모두 풍수원 출신이다.143)

 

또 풍수원, 보다 정확히 말하면 중방터에 살던 최복남이 칠울로 들어와 박만보의 딸과 혼인하여 계속 이어갔다. 최복남은 공소회장이 되었고, 최복남의 자녀 중에 최창무 대주교와 수녀 딸이 있다. 그런데 최창무 대주교는 작은 할머니로부터 최양업 신부의 제수이며 풍수원에 살던 송 아가다가 당숙모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최창무 주교댁은 강원도에서 3대를 지나고 떠나왔다고 한다.144)

 

그런데 본래 송 아가다의 시부인 최경환 성인은 청양 줄무덤 있는 데서 살았다. 그뒤 강원도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갔다. 이때 함께 갔던 그의 형제가 남을 수도 있지만 형제들은 경기도 쪽으로 나왔다. 그렇지만 그 동생들이 또 충청도에서 강원도 쪽으로 갔다. 실제로 최경환 성인의 집안이 풍수원본당에 많이 있었다.145)

 

다음으로 풍수원본당 공소 중에서 가장 사제를 많이 배출했다는 금대리(검두) 공소를 보면, 이곳은 조씨, 박씨, 정씨 등이 박해를 피해 정착하여 교우촌을 이뤘다.146) 금대리에 살던 조영승은 병인박해 순교자 정은 (鄭溵)에게 영향을 준, 용인시 양지면 은이 벌터에 살던 조사옥(성진)의 증손이다. 그리고 박영화는 광주시 실촌면 건업리에 살던 신유박해 순교자 박중환의 방계 후손이다. 또 금대리에 묘가 있다는 정규전(정규랑 신부의 집안)은 단내에 살던 병인박해 순교자 정은의 집안이다.147) 이 세 집안은 박해를 피해 곧바로 금대리로 온 것이 아니라 정선, 평창, 홍천 등지로 피해 다니다가 신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풍수원에 본당이 들어서자 금대리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는 달리 풍수원에서 밖으로 나가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가장 큰 예는 본당 분할인데, 이는 앞에서 보았다. 그외 사제를 배출하여 외부로 보내거나 평신도가 외부로 나가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위에서 본 금대리에는 교우들끼리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가 신씨(신성우 마르코 신부의 부친) 등이 이주해 올 무렵에 공소가 창립되었다. 이 신씨 집안에서 공소의 첫 사제가 탄생했다. 금대리에서는 신성우, 최기식, 박호영, 김영진, 박순신, 김태진, 박호성 등의 신부가 나왔다. 이들 신부들은 사목현장으로 부임하여 활동해 나가며 뻗어나갔다.148) 새점터 공소 신교선 신부도 인천교구에서 활동하고 있다.149)

 

물론 타지로 나가 활동하는 평신도들도 있다. 서울에 가서 약현본당 회장을 지낸 박의화 같은 평신도들도 풍수원의 생활을 타지에 널리 뿌린 사람이다.150) 또한 단구동 교회의 경우는 풍수원에서 살다 이사 한 송재원이 교회에 땅 2,552평을 헌납해서 1960년에 이르러 이 땅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는 이사하기 전 풍수원에 살 때에도 혼자서 20원을 기부하여 마을에 적립하여 두고, 매년 그 이자로 성탄날 등촉을 준비할 수 있게 했다.151) 이렇게 풍수원본당의 신자가 밖에서 활동하는 예는 수없이 많다. 결론적으로 풍수원본당은 40명에 육박하는 사제를 배출한 성소의 요람일 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곳곳으로 진출하여 신앙을 뿌리내리게 한 신앙의 샘물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겠다.

 

 

2. 한국인 사제로서 정규하 신부의 역할

 

정규하 신부는 풍수원본당의 주임으로서뿐 아니라 본당 중심의 교회가 선 이후 첫 한국인 신부로서 여러가지 일을 해냈다. 국내 첫 서품에서 배출된 사제들은 선교사들이 한국인 신자들을 위한 교회사업을 할 때 한국인 사제로서 중간 역할을 담당했다. 뮈텔 주교는 복음을 번역할 때 한국인 신부들에게 나누어 작업하도록 했다. 정규하 신부는 뮈텔 주교의 명을 받아 마르코 복음을 번역했다.152) 강도영 신부는 마태오 복음을 번역했다.153) 이렇게 각각 번역한 것을 바탕으로 한기근(韓基根, 1868~1939) 신부 등이 종합 검토하여 책으로 펴냈다.

 

이와 마찬가지로 드브레 주교는 ‘서울 대목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를 작성할 때에 초고를 만든 다음 선교사와 한국인 사제들에게 열람을 시켰다. 이때 정규하 신부는 다른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은 생략하고 확실한 규칙만 모아서 간단히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154) 한국인 신자와 선교사 간의 언어적 소통, 한국적 환경을 반영하는 일을 돕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한국인 사제들은 선교사와 신자들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간자 역할을 했다. 주교로서는 신학생 문제가 일어나면 신부에게 해결토록 하는 데다가 학생들이 한국인이니까 초기 사제들의 역할이 더 컸던 것 같다. 더욱이 정규하 신부는 신학생을 많이 입학시킨 터이라 그에게 많은 기회와 책임이 주어졌다. 신학뿐 아니라 세속 지식 교육에 대한 요구, 3·1만세 운동 참여 그 외에도 신학생들의 규칙생활에 대한 불만 등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1915년 5월, 용산신학교에서 신학생이 교장 기낭(Guinand, 1872~1944, 陳普安) 신부를 상대로 시위했을 때, 정규하 신부는 이를 해결하러 나섰다.155) 그는 3·1만세 이후에도 신학생들의 동향을 걱정했다.156)

 

한편, 한국인 사제들은 신자들이 낯선 가톨릭 문화에 보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힘썼다. 정규하 신부가 성가책에 써있는 라틴어를 한국발음으로 옮겨놓은 일은 그 시대 모습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157) 당시 신자들은 라틴어로 써 있어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없으니 한국어로 발음만 달아놓는 것이다. 그러면 읽기는 해도 뜻을 모르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신앙은 진지했다. 정규하 신부는 이러한 토를 달기 위해 주교의 허락을 얻었다.158) 한국인에 대한 이같은 고려는 한국인 사제이기 때문에 더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강도영 신부도 한국말로 된 ‘성령 강림송’이 있으면 좋겠다면서 자신이 한국말로 번역해서 주교께 허락을 얻기 위해 보냈다.159) 물론 이들 한국 신부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감안했을 때 정규하 신부의 사목 특성은 무엇이었을까? 특징이란 시간의 연속성을 보면서 그곳에서 드러나는 시기적 특성이 있고, 타 본당 내지는 다른 요소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인 특성이 있을 수 있다. 가령, 풍수원본당을 미리내본당과 비교한다면, 이곳은 좀더 조용히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미리내본당은 아무래도 서울에 가깝다 보니 여러 사람이 참견했다. 예를 들어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사제의 옛 무덤에 기념관을 짓는데도 함께 모금하고, 비판했다.160)

 

다음으로 정규하 신부는 한국인 사제로서 천주교 토착화에 힘썼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19세기 말 외국에 가서 유학을 한 신부로서 거의 50년간 가족의 모든 힘까지 다 바쳐 풍수원본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이룬 세계를 서양식이다라든가 특별히 한국식이라든가라고 평하기는 어렵다. 다만, 풍수원의 성당을 자신이 사제서품을 받은 약현성당을 닮은 고딕-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바로 민둥산 밑에 세웠듯이 그는 철저히 가톨릭 세계를 이 땅에 세우고 싶어했다고 하겠다. 정규하 신부의 전례복이 많이 남아있는 점도 가톨릭 전례에 세심했던 신부의 품성을 볼 수 있는 맥락이지 싶다. 바로 그 점때문에 풍수원 성당은 오늘날까지 심지어 이 본당 출신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신앙의 고향처럼 느껴지게 하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정규하 신부는 성당을 중심으로 신자의 일생이 완벽하게 채워지고 생활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간 사람이다. 또한 신부가 자신의 사회활동의 보조역할을 안나회를 중심으로 하고 그외의 다른 사목단체를 키우지 않는 일관적 사목체계와 신학생을 선발하고 육성하고 본당에서 봉사케 하여 그 체제를 유지시켜 간 점 등은 독특한 풍수원본당의 성격이라 하겠다. 어쩌면 다양성을 배제할 수 있는 환경 속이었지만, 정규하 신부는 자신이 계획한 일에 완성도가 높은 삶을 구축했다고 하겠다. 1921년 정규하 신부의 은경축에 강도영, 한기근, 손성재(孫聖載, 1877~1927), 서병익 신부와 선교사들 합하여 12명의 신부들이 교통도 나쁜 시절에 거기까지 와서 축하한 것을 보면,161) 그는 선교사에서 한국인 사제로 이어지는 다리를 제대로 놓았다고 하겠다.

 

한편, 정규하 신부에게는 운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교회에서는 처음 서품되었던 사제 세명을 다 한곳에 오래 있게 발령을 냈다. 강도영 신부는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Ferréol, 1808∼1853, 高) 주교의 무덤이 있는 미리내에서, 강성삼 신부는 경남지역 최초 본당(1897년)으로 병인박해 순교자 신석복(1828~1866)이 출생한 명례본당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강성삼 신부는 6년만에 선종했다. 또 미리내 성당이나 명례성당은 이후 공소와 본당 승격을 반복했다. 정규하 신부는 이 셋 중 가장 오래 생존했고, 또 풍수원본당은 한번도 공소로 격하되거나 폐쇄된 적이 없었다. 횡성에서 치열했던 6·25 한국전쟁도 견뎌냈으니 매우 특별한 기회를 가진 본당이라 하겠다. 47년간 이어온 사목과 본당 구성원의 강한 공동체 정신이 크게 작용했을 수 있다.

 

 

3. 교우촌 신앙공동체 중심의 본당과 그 과제

 

풍수원본당의 특성을 든다면 본당이 위치해 있는 서원면은 면인구의 35~40%가 천주교 신자로 지역 자체가 천주교 색채가 강하다는 점이다. 한국사회 내 신자분포율 평균인 10%를 훨씬 넘는 수치이다. 그러므로 천주교 단위의 생활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 그리고 이곳은 1세대 평균 인원이 3명쯤 되어서 생활 단위로도 이상적인 곳이다. 동시에 국내의 여타지역에 비해 개신교 분포가 약하다는 점도 하나의 여건이 될 수 있다.

 

그리고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풍수원본당은 당연히 교우촌 혹은 공소가 중심이 되는 본당이다. 2012년 현재도 전체 신자 875명 중에 518명이 공소신자이다. 오상골 55명, 금대리 157명, 창촌 209명, 새점터 97명으로 총 518명이고, 본당 고유신자는 357명이다. 즉 신자들이 이미 역사적 체험을 공유한 단위로 뭉쳐져 있다는 말이 된다.

 

한국천주교회의 기본단위는 교우촌(공소)이었다. 교우촌은 순교자들의 배양처였고, 또 교회지도자들의 탄생지였다. 여기서 기억할 점은 공소가 가지고 있는 독자성과 자발성이다. 교우촌은 현재 한국교회의 일반 성당의 ‘반’보다는 훨씬 독자적이다. 풍수원본당은 이미 긍정적으로 나아갈 단위체가 형성되어 있어 지속적인 발전을 향해 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듯이 교우촌도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 오는 동안 쌓인 갈등이 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 현재도 풍수원에는 마을에 문제가 생기면 신자들간의 문제로 확대되기 쉽고,162) 동시에 그 자체는 지역사회에 좋은 본이 되지 못하며, 나아가 지역 복음화의 큰 걸림돌이 되리라는 우려가 있다.163) 생활공간과 신앙을 함께 하고 오래된 역사까지 누적되어 일어나는 신자 간의 갈등은 쉽게 해소되기 어려워진다.

 

또하나 이 지역에서는 교우촌 인근 원주민들의 입교가 어렵다는 점도 제기된다. 본래 신자들은 신앙을 위해 세상에서 떨어져 공동체를 이루고 협력하며 살아왔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구교우들은 전교에 힘쓰지 않는다는 평을 받아왔다. 일찍이 드망즈 주교나 투르뇌(Tournneux, 1879~1944, 呂東宣) 신부 등 선교사들이 이런 현상을 지적했었다.164) 정규하 신부도 같은 보고를 여러번 했다. “신자들은 대체로 착하고 자주 성사를 받으며 삶을 개선하려고 애쓰나, 외교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별로 애쓰고 노력하지 않는 결점이 있습니다.”165) “횡성 풍수원 지역의 신자들은 몇몇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착하지만, 신앙 전파에 있어서는 적극적이지 못합니다.”166) 이런 상황에서는 신자들이 타인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업’을 먼저 구상할 필요가 있다.

 

풍수원본당은 교우촌의 독자성과 공동체 정신을 살려 공소마다 특성 있는 일을 산출해내고 이를 기반으로 외교인과 협력의 길을 모색할 과제가 있다. 이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갈등도 해소되고 선교도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Ⅵ. 맺음말

 

본고는 풍수원본당의 역사적 흐름을 정리하고 그곳에서 드러나는 특성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본당의 초대 신부와 2대 신부를 사목활동을 분석하여 이러한 특성이 형성된 과정과 역할을 진단하고자 했다.

 

풍수원본당은 역사도 오래되었고, 강원도 지역의 중심 본당이었을 뿐만 아니라 본당 차원에서는 유물도 많이 보존된 성당이다. 교구도 서울대목구에서 춘천교구, 원주교구로 이전되었고, 동시에 외국인 선교사, 조선시대 말에 유학을 다녀온 한국인 신부, 본당 출신 신부와 한국인 신부, 골롬반 수도회 신부들이 사목하는 다양성도 경험했다.

 

풍수원본당은 현대를 제외하면 계속적으로 신자가 증가했고 넓게 영향을 끼쳤다. 박해시 숨었던 신자들이 풍수원본당을 중심으로 교회에 그 존재를 신고하고 신앙생활을 훈련하고 경기도 북부를 비롯한 도회지로 진출해 나갔다. 즉 풍수원본당은 박해기를 극복한 신자들이 성공적으로 근대 세속 사회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도록 했다. 동시에 외곽 교회이면서도 거의 40여 명이 사제가 나와 각지로 뻗어나가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서 풍수원본당은 본당 내에 이런 힘을 키울 공동체와 그 영역과 환경을 훌륭히 조성했다.

 

르 메르 신부가 본당을 설립할 때는 신자 재발견이 주를 이루고 동시에 박해도 있어 신자들은 배교를 강요당하거나 심지어 순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르 메르 신부는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면서 성영회와 학교를 통해 비신자 사회에 정착하는 터전을 형성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성당을 세움으로써 신자들이 보다 쉽게 사목행정에 접하고 또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보호받을 터전을 마련했다.

 

정규하 신부는 이와 같은 토대 위에서 풍수원본당을 하나의 가톨릭 세상으로 완성해 나갔다. 즉 학교를 운영하여 신학생을 다수 배출할 배경을 갖추었는데 이렇게 성장한 본당 출신 사제들이 교구와 타지역과 연결고리가 되었다. 또 정 신부는 안나회의 적극적인 보조를 받으며 사회복지 사업을 해나갔고, 성체거동을 시행하며 지역사회의 중심적 위치를 확보했다. 그리고 본당에 본인부터 솔선했고, 친인척과 신자들의 기부를 얻어 넓은 영역을 확보했다. 그는 신자들이 태어나고 교육받고 생활하고 죽어서 묻히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풍수원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의 세상’을 형성했다. 이러한 바탕으로 그는 선교사 사이에서 한국인 사제의 역할을 정착시켜 나갔다. 물론 변화의 완성은 본고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신자와 신부가 공동으로 이루어낸 것임에 틀림없다. 신부가 그 변화의 동인과 방향을 제대로 잡았고 신자들의 호응을 얻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는 목표들이었다.

 

한편, 초기부터 현재까지 변하지 않는 풍수원본당의 특징은 교우촌을 중심으로 출발했고, 현재까지도 교우촌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점이다. 앞으로 이 교우촌은 현대 신자들이 다시 모이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풍수원본당의 미래를 설계한다면 교우촌의 자발성과 역사성을 충분히 살릴 필요가 있겠다.

 

풍수원본당은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곳은 순교자 유해나 순교자에 얽힌 기억이 없는 성당인데도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순례자 성당으로 유명하다. 이제는 순례객들의 미사가 본당 운영의 큰 힘이 될 정도이다. 아마도 풍수원본당이 내뿜어낸 신자들과 그 신자들의 기억을 찾아오는 것일 수도 있다. 여러 사람이 풍수원에 먼 고향의 역활을 기대할지 모른다.

 

풍수원본당은 100여 년 동안 신자를 타지에 제공하는 신앙의 샘 역할을 했듯이 이번에는 도회로 나간 교우촌 출신들이나 현대 물질문명에 젖은 신자들이 다시 신앙을 키우고 퍼내는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진행하는 바이블파크 사업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사람들이 돌아오는 미래 100년을 향한 프로젝트에서는 무엇보다도 공소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공소의 역사가 모여서 본당의 역사가 되었으니 공소의 역사와 추억을 찾아내어 당시의 공동체 의식을 재체험하고 또 현대인에게 재체험 시키는 방법이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본고는 풍수원본당에 관한 연구의 첫작업으로 겨우 그 특징을 파악하는데 그쳤다. 본고에서는 그 특징에 대한 현재까지 찾을 수 있는 자료를 정확히 분석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직 성당사나 교회사가 제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므로 앞으로 많이 수정 보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 드러난 요소 하나하나도 세밀히 연구되어야 한다. 본고의 뒷 시기, 또 특성으로 드러난 각 요소들과 교우촌 등에 대한 연구들을 후속 작업으로 미룬다. 특히 이 모든 주제들은 교우들의 생활과 신앙활동 면에서 보완되어져야 하는데 다행히도 풍수원본당의 구교우들이 아직 그 훌륭한 열쇠를 보존하며 생활하고 있다. 본고의 후속 작업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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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기록을 통해 본 풍수원 성당 안나회〉, 《교회사연구자 모임》 13, 2018.

정경훈, 〈遜志 홍재구(洪在龜, ?~1898)의 『正俗新編』 연구〉, 《유학연구》 26, 2012.

정경훈, 〈한말 화서학파의 현실인식의 한 면모, 『정속신편』을 중심으로〉, 《화서학논총》 5, 2012.

정규하, 〈빈낭유학회고기〉( 《경향잡지》 964호, 1943.11.)

최창무, 〈사제단의 약사와 복장의 변천〉, 《전망》, 광주대건신학 출판부, 1971.

 

R. Jézégou, 〈Manuscrit pour Mémorial〉, 1997.

J. Kelly, 《The Splendid Cause 1933~1983》, Columban Fathers, 1984. 구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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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 메르 신부는 1887년 한국에 입국하여 함경도 안변 지역에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풍수원본당을 세웠다. 1896년에는 원주본당, 1898년부터는 평양본당, 1923년부터는 수원본당으로 전임되어 사목하다가 1928년 주교관에서 선종했다. 본고에서 주 자료로 사용하는 르 메르 신부 서한은 최용록의 번역으로 《교회와 역사》 453호(2013년 2월)~471호(2014년 8월)까지 연재되었다. 본고에서는 서한 날짜로만 표시한다.

 

2) 양인성, 〈개화기·일제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교회사연구》 31, 2008, 47~77쪽 참조.

 

3) 블랑(Blanc)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페낭신학교로 유학을 떠난 신학생은 모두 21명으로 1882년 황 베드로, 구 요안, 전 안드레아, 박 프란치스코, 강성삼, 방 바오로, 이내수와 1883년 강도영, 김성학, 김원영, 김 베드로, 전 요안, 최 루가, 1884년 1차의 정규하, 한기근, 최 바오로, 이종국과 같은 해 2차의 김 토마스, 김승연, 김문옥, 홍병철 등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도중에 귀국했으며 15명이 국내 신학교로 귀국할 때까지 공부했다. 이들은 각자 성적에 따라 진급 속도가 달랐는데 1886년부터 대신학교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수사학 과정 수료자가 배출되었다. 결국, 1890~1892년에 걸쳐 귀국하기까지 신학과 2학년까지 수료한 학생은 3명뿐이었다.(이원순, 《소신학교사》, 1981, 한국교회사연구소, 36~38쪽) 이들은 1892년 귀국하여,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뒤 1896년 4월 26일 뮈텔 주교의 주례로 약현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4) 강성삼 신부는 절영도와 명례에서 쓴 서한 13통을 남겼다.

 

5) 강도영, 최승룡 역, 《강도영 마르코 신부 서한집》,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 2016. 이하 《강도영 신부 서한》이라 칭한다.

 

6) 정규하, 김상균 역, 《풍수원에서 온 편지》,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 2019 (이는 김상균의 번역으로 《교회와 역사》, 453호(2013년 2월)~471(2014년 8월)까지 연재된 글을 수정보안하여 책으로 엮었다. 본고에서는 《풍수원에서 온 편지》로 칭하겠다. 이외 정규하 신부가 쓴 〈빈낭유학회고기〉, 《경향잡지》 964호, 1943.11도 있으나 이는 유학가는 여행과정만 구술하고 있다.

 

7) 부록 〈표5〉 풍수원본당 출신 사제 명단 참조. 풍수원본당 출신 사제라고 할 때 풍수원본당에서 타본당이 분할되기 이전의 강원도 출신들이 풍수원본당에 통계가 잡히기도 하고 분할된 본당 통계에 잡히는 경우도 있다.(ex. 박영수 신부). 이러한 문제는 향후 좀더 정치한 작업을 거쳐 보완되어야 한다. 본고에서는 문화영성연구소에서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 천주교회 사제 수품록》(이순용 편, 대건출판사, 2005)과 《한국천주교회총람》(2018년도판)을 가지고 검토했다. 본 도표의 한계를 밝히며, 후일의 작업을 돕는다는 의미에서 현재까지 파악된 명단을 제시한다. 그리고 환속한 신부는 명수에는 포함하나 명단은 다루지 않음도 밝혀둔다.

 

8) 선우인영, 《사진으로 본 풍수원 성당》, 천주교 풍수원교회, 1988.

송준, 《풍수원 성당 강원도 비림(秘林)에 숨겨진 보물》, 횡성군, 2017.

 

9) 풍수원본당에서는 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자료를 모았으나 간단한 사진첩(선우인영의 위의 책)으로 대치되었다. 그리고 최근 성당 안내를 위한 책자(송준의 위의 책)가 나왔을 뿐이다.

 

10) 성당건축에 대하여는 강원도 문화재를 다루는 작업과 몇 편의 건축 관련 논문이 있다.

강원도, 《江原文化財大觀 江原道指定篇》, 江原道, 1993.

豊水院 성당, 《江原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금성종합건축사사무소, 江原道, 1999.

강원도, 《橫城郡의 歷史와 文化遺蹟》, 江原鄕土文化硏究會, 1995.

연세대학교, 《횡성 유현리·현천리지역 :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경희정보인쇄, 2003.

강원향토문화연구회, 《江原文化財大觀 : 도지정편》, 강원도, 2006.

江原道, 《2005年度 文化財修理報告書 : 도지정문화재》, 강원도, 2008.

최재석, 《원주 근대건축을 찾아서》, 서우, 2004.

김정신, 《횡성 풍수원 성당 구 사제관》,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2011.

김정신, 《역사, 전례, 양식으로 본 한국의 교회건축》, 미세움, 2012.

김주, 〈韓國 初期 聖堂建築에 關한 硏究 : 1890년~1945년까지의 建築을 中心으로〉, 梨花女子大學校 석사논문, 1981.

김종기, 〈江原道 長軸型 聖堂의 祭壇構成과 可視體系에 關한 硏究〉, 서울시립대학교 박사논문, 2009.

 

11) 전례복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다루어졌다. 최창무, 〈사제단의 약사와 복장의 변천〉, 《전망》, 광주대건신학 출판부, 1971, 99쪽 ; 박영순, 〈韓國 가톨릭敎 典禮服에 관한 硏究〉, 淑明女子大學校 석사논문, 1990 ; 박영순의 석사논문 일부를 지도교수와 함께 한, 박영순·양숙희, 〈한국가톨릭교 초기 전례복의 실증적 고찰〉, 《生活科學硏究誌》 5, 1990 등

최근 정규하 신부와 안나회에 대한 발표도 있었다.(이성희, 〈애주애민(愛主愛民)의 사목자 정규하 신부〉, 《교회사연구자 모음》 13, 2018, 157~181쪽 ; 이원희, 〈기록을 통해 본 풍수원 성당 안나회〉, 같은 책, 183~199쪽. 그리고 문화영성연구소에서는 최근 전례복 등 유물에 대해 정리, 소개하고 있다.

 

12) 여진천, 〈천주교의 원주 지역 정착과 발전 연구- 1888~1909년을 중심으로〉, 《원주학 연구》 2, 연세대 매지학술연구소, 2001, 241~242쪽.

이원희, 〈原州·橫城 지역의 천주교 전래와 정착 연구〉, 江原大學校 석사논문, 2002.

이원희, 〈江原地域 天主敎史 硏究〉, 강원대학교 박사논문, 2011.

춘천교구 50년사 편찬위원회, 《춘천교구50년사》, 춘천교구, 1989.

원주교구 30년사 편찬위원회, 《원주교구30년사》, 원주교구, 1996. 

 

13) 성기숙, 《한국의 성지 : 순교자의 발자취》, 크리스챤, 1988와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전국 성지 안내》 가톨릭출판사, 1996;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9년판, 2011년판 외 6권.

 

14) 강원도민일보, 《문화재, 사람에게 말을 걸다》, 강원도민일보, 2011 ; 조은강, 《나의 아름다운 성당기행》, 황소자리, 2010 등과 같이 풍수원본당을 종교건축면으로 소개하는 책이 7권, 최상희, 《강원도 비밀코스 여행》, 웅진리빙하우스 웅진씽크빅, 2010과 김승범, 《국도 여행 바이블》, 동아일보사, 2010를 비롯하여 일반 여행지로 소개하고 있는 책이 현재까지 약 20여권 있다.

 

15) 본고에서 언급하는 풍수원본당의 특징적 요소들은 다른 발표자들의 심도있는 개별적 연구가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주로 각 요소의 본당 내 역할 면에서 볼 것이다.

 

16) Mutel,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뮈텔주교일기》 1~8, 1986~2008.

 

17) 한국교회사연구소, 《서울교구연보》 I, 명동천주교회, 1984와 《서울교구연보》 II, 1987.

 

18) 이 자료들을 〈100년 자료〉라고 통칭한다. 아울러 문화영성연구소 이우갑 소장 신부와 연구원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19) 황사영 백서, 94행, ‘論經路 則畿忠全 素多敎友 慶尙江原兩道 近年避亂者或居之’

 

20) 이는 여진천, 〈강원감영과 순교자들〉, 《교회사학》 15, 2018, 209~240쪽에 잘 정리되어 있다.

 

21) Dallet, 안응렬 · 최석우 역, 《한국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281쪽, Féron 신부 보고.

 

22) 부록 〈표1〉 풍수원본당 130년 참조.

 

23) 역대 본당신부는 역대 본당신부는 1대 르 메르(1888~1896), 2대 정규하(1896~1943), 3대 김학용(1943~1963), 4대 신현봉(3개월), 5대 이응현(1963~1967), 6대 강대형(1967∼1969), 7대 딜레이니(1969∼1973), 8대 스캔런(장, 3개월), 9대 켈리(1973~1976), 10대 조응환(1976∼1981), 11대 박용식(1981∼1983), 12대 김종태(1983∼1884), 13대 김한기(1984~1988), 14대 남궁민(1988~1991), 15대김승숙(1991~1992), 16대 신동민(1992~1995), 17대 김태원(1995~2000), 18대 김승오(2000~2017), 19대 배은하(2017~2019) 이후 직무대행 박동규 신부를 거쳐 2019년 9월부터 손용환 신부가 본당신부이다. 부록 〈표3〉 풍수원본당 주임사제 현황 참조.

 

24) 1982년에는 성당이 강원도 지방문화재 69호로 지정됐다. 아울러 성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김한기 신부 때는 피정의 집, 남궁민 신부 때는 노후된 성당 수리, 김태원 신부 당시 유물전시관 개관 등 제작업이 이어졌다.

 

25) 당시 풍수원본당은 춘천, 원주, 화천, 양구, 홍천, 횡성, 평창 등 강원도와 경기도 일부를 포함한 12개 군의 29개 공소를 관할했다.

 

26) 부록 〈표2〉 풍수원 성당 교세통계표 참조.

 

27) 당시 사목을 담당했던 골롬반회로부터 자료를 보완받아야 하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해결할 과제로 남겼다. 

 

28) 김정숙, 〈일제강점기 대구대목구의 유급 전교회장 운영〉, 《교회사연구》 52, 2018, 206~207쪽.

 

29) 당시는 전쟁 중이라 백응복은 이종흥과 함께 대구교구에서 서품준비를 했다가 서울교구에서 수품했다. 이중현도 백응복, 이종흥과 함께 피난 생활을 했다.(이종흥, 《뿌리와 신앙》, 1992, 77~78쪽) 이들은 후일 백응복 신부는 부산교구, 이종흥 몬시뇰은 대구교구, 이중현 신부는 수원교구로 이적했다.

 

30) 부록 〈표4〉 보좌신부 현황 참조. 

 

31) 부록 〈표5〉 풍수원본당 출신사제 참조. 본 도표의 범위와 한계는 본고 주 7 참조.

 

32) 《뮈텔주교일기》 I, 1892년 9월 7일자. 「신입생은 10명이었는데, ‘르 메르 신부 본당 1명’이 포함되었다」. 그 직전 르 메르 신부는 신학생을 추천했다.(르 메르 신부 서한, 1892년 7월 21일자).

 

33) 〈표5〉 중에서 35번 박경옥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총람》에 나와있지 않다.

 

34) 2019년 2월 배은하 신부 증언. 한편, 이옥성 수녀 등 삼위학당 출신 수도자도 많다고 한다. 아울러 현재까지 풍수원본당 출신 수도자들을 파악하지 못했음도 밝혀둔다.

 

35) 정규하 신부는 신학교에서 퇴학당한 박 마르코와 그 식구들의 억지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다.(《풍수원에서 온 편지》 75신, 188-4쪽 등) 강도영 신부도 역시 신학교에서 나온 학생이 평신도보다 훨씬 못하다는 보고도 했다.(《강도영 신부 서한》 1916년 9월 18일자) 그러나 이렇게 특별히 언급된 사람들 외에는, 신부들의 기대처럼 교회의 더 나은 일꾼으로 봉사했을 것이다.

 

36) 곤동, 도사곡, 둔내, 서천, 목적리, 항동, 지석, 고덕리, 삼장평, 금광리, 옥계, 신촌, 하일, 수청동, 조동, 산유, 성내, 주문, 덕우, 직치, 원서, 동암, 무극, 이야동, 감미곡, 판요, 옥동, 장평, 법암동, 두현, 문엄리, 능촌, 퇴촌, 갈현 (1891년도 교세통계)

 

37) 원주의 풍수원, 오상골, 고서울, 창봉, 황달모르, 마라미, 강릉군와 서내, 괸돌, 상교터와 평창군의 하일, 물프미, 산너미와 영월군의 주실(《풍수원에서 온 편지》 1896년 8월18일자, 86~87쪽)

 

38) 수곡리, 면배, 고은동, 효죽대, 만산리, 초덕. 대현, 방산, 노양골, 장본, 송정, 만천, 결운, 창봉, 내창봉, 하우현, 도사곡, 율동, 오상동, 금대, 마현, 초일, 양평, 내현(1912-1913년 사목보고서)

 

39) 송동, 구현, 스므나리, 메나미, 오상골, 하우현, 창봉, 내창봉, 신북창, 도새울, 검두, 학익동, 동사골, 사그막, 수곡, 미랑골(1921년도 교세통계)

 

40) 계정리, 갈우개, 구현, 메나미, 스므나리, 검두, 오상동, 하우현, 창봉, 공근, 신북창, 마옥, 도새울(1924년도 교세통계)

 

41) 순교자 김베드로, 김아가다, 박도연, 박사도요한과 그의 아내, 박요셉, 박 프란치스코와 그의 부인, 심카타리나, 심루시아, 심정서, 윤카타리나, 윤성녀, 윤여원, 윤서방 부부, 이치안, 이치산, 장채용 등은 거주지가 횡성이었다.(《원주교구 30년사》, 원주교구 순교자 명부). 

 

42)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12, 풍수원 본당 조. 최근 풍수원본당 설립에 앞서 이천본당, 부엉골 신학교에 딸린 본당 설립설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파리외방전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이 선교사목을 할 때 강원도 동부, 강원도 서부라고 부르는 것처럼 영역별로 나누었다. 물론 선교사들이 머무르는 집은 있었으나 이를 거주지라고 여겼지 본당이라고 간주하지는 않았다.(Jézégou, 〈Manuscrits pour Mémorial〉, 1997등 외방선교회문서 참조) 이는 당시 선교사가 일년의 3/4 이상을 교우촌을 순회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교회에서 신부가 파견되는 일자를 본당설립일을 잡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본당 설립에 대한 토론은 날짜의 문제에 앞서 본당 설립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확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는 기존의 설을 수용한다.

 

43) 르 메르 신부 1892년 5월 20일 보고서, 주실이야기 〈100년 자료〉

 

44) Jézégou, 〈Manuscrits pour Memorial〉, 1997.

 

45) 르 메르 신부, 1895-1896 동부, 강원도 보고서

 

46) Jézégou, 앞의 책, 1997. 르 메르 신부는 1884년 차부제품을 받고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1886년 사제품을 받고 조선대목구로 파견되어 1887년 2월에 입국했다. 그는 조선어를 익히고 원산의 드게트 신부의 보좌신부로 일하며 교우촌을 순회했다. 그는 풍수원본당을 설립하고 나서, 1896년에는 원주본당을 세웠고, 그 뒤 그는 평양의 르 장드르 신부 후임이 되어 평안남도의 일부를 관할했다. 말년에는 수원 왕림본당에 있었다. 그는 1925년 시복식이 열렸을 때 구노의 곡에 붙인 ‘순교자 찬가’의 작사를 했다. 그가 쓴 아동용 교리문답도 유명했다.

 

47) 르 메르 신부 서한, 1892년 7월 11일자

 

48) 《정속신편》은 르 메르 신부가 이 지역에서 복사본을 구하여 뮈텔 주교께 보냈는데, 그 책이 파리제3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를 여진천 신부가 발굴하여 학계에 소개했고, 이후 내용을 소개하고 사회를 분석하는 논문들이 나왔다.(여진천, 〈정속신편 해제〉, 《교회사연구》 18, 2002, 203~267쪽 ; 여진천, 〈19세기 화서학파 홍재구의 서양인식과 천주교회의 반응〉, 《교회사연구》 21, 2003, 31~55쪽. 그 뒤 정경훈이 〈遜志 홍재구(洪在龜, ?~1898)의 正俗新編 연구〉, 《유학연구》 26, 2012, 137~164쪽과 〈한말 화서학파의 현실인식의 한 면모, 정속신편을 중심으로〉, 《화서학논총》 5, 2012, 325~354쪽을 발표했는데, 두 편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49) 김정숙, 〈영남지역의 천주교 전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40주년 학술대회, 2018, 발표자료 12쪽.

 

50) 정경훈, 〈遜志 홍재구(洪在龜, ?~1898)의 正俗新編 연구〉, 146쪽.

 

51) 여진천, 앞의 논문, 2003, 51쪽~54쪽과 정경훈의 앞의 논문, 155~156쪽. 

 

52) 르 메르 신부 서한, 1892년 7월 21일자

 

53) 르 메르 신부 서한, 1893년 2월 25일, 3월 16일, 2월 25일, 5월 5일, 8월 9일. 8월 22일자 등

 

54) 《뮈텔주교일기》 I, 1893년 5월 10일자. 이외 대여섯 곳에 관련 언급이 있다. 이를 횡성교안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여진천 신부가 위의 논문, 2003년에서 천착하고 있다.

 

55) 《풍수원에서 온 편지》, 1897년 2월 7일자, 43쪽.

 

56) 르 메르 신부 서한 1895년 9월 21일자 

 

57) 르 메르 신부 서한 1896년 1월 23일자

 

58) 르 메르 신부 서한, 1896년 7월 20일자

 

59) 르 메르 신부 서한 1894년 3월 11일자

 

60) 르 메르 신부 1893-94 강원도 (동부) 사목 보고서

 

61) 르 메르 신부 1892년 5월 20일 보고서, 주실이야기 〈100년 자료〉

 

62) 위의 자료

 

63) 르 메르 신부 1894-95년 사목 보고서 강원도 (동부) 지구

 

64) 르 메르 신부 서한, 1895년 7월 7일자

 

65) 정규하 신부는 동학혁명 때 홍천읍에서 동학군들이 교우 7명을 불살라 죽이고, 특히 7살 먹은 어린아이를 목을 부러뜨려 불 속에 넣었다는 만행을 전해 듣고 신자들의 요청대로 홍천 군수에게 소송을 제기했었다. (《풍수원에서 온 편지》 1899년 1월 16일, 3월 2일, 4월 7일자). 정규하 신부도 신자들의 피해를 보고 동학군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지녔다.(같은 책, 1904년 1월 25일자, 88~89쪽) 

 

66) 르 메르 신부 서한, 1895-1896 사목보고서

 

67) 르 장드르, 《회쟝직분》, 〈데오쟝 학교〉, 1923, 47~48쪽에서는 교우들이 자녀를 교육시킬 것을 권장하고, 가능하다면 공소마다 학교를 세우기를 권하고 있다.

 

68) 르 메르 신부 서한 1892년 4월 22일자

 

69) 르 메르 신부 서한 1893-1894 강원도(동부) 사목보고서

 

70) 르 메르 신부 강원도 1892-1894년 학교 재정 현황. 여기에는 사목수입 1190냥으로 적자 585냥을 메웠다는 기록이 있다. 정규하 신부도 1897년 6월 18일자 편지에서 공납전 495전에서 학교비 200전을 제외하면 295냥 남는다고 보고했다.

 

71) 드망즈, 《회장의 본분》, 대구대목구, 1913 : 제12편 영해회(嬰孩會)

 

72) 르 메르 신부의 1891-92년도 보고서, 부록 〈표6〉 강원도 성영회 어린이 참조.

 

73) 르 메르 신부 서한, 1893년 8월 9일자 

 

74) 성영회 사업은 정규하 신부 때 끊어지는 것 같다. 정규하 신부는 1897년 3월에 고아들을 계속해서 받아야 하느냐며 걱정했는데(당시 29명)(《풍수원에서 온 편지》, 46쪽), 12월에 다시 고아 어린이가 40명이나 된다며 같은 질문을 했다.(같은 책, 54쪽), 이후 1923-1924년 성영회 보고서에 어린이 6명이 보고되는 것 외에는 다른 언급이 없다.(같은 책, 236~237쪽)

 

75) 드망즈, 이종흥 역, Ch.1. 개인적 의무. 《대구대목구 사목 지침서(Directoire de la Mission de Taikou)》, 영남교회사연구소, 1914(2006), 2쪽.

 

76) 위의 주. 실제로 신부들은 상호 방문하며 안부를 전하고 주교께 보고했다.(ex. 《강도영 신부 서한》, 1915년 9월, 정규량 신부와 손성재 신부에게 들렸다가 정규하 신부를 방문하겠다고 함)

 

77) 《풍수원에서 온 편지》 1897년 3월 1일, 45쪽.

 

78) 《뮈텔주교 일기》 1892년 4월 29일과 1905년 5월 20일 ; 1907년 4월 27일 ; 1912년 5월 5일 등

 

79) 르 메르 신부 서한, 1896년 6월 30일자

 

80) 《풍수원에서 온 편지》 1897년 6월 18일, 47쪽.

 

81) 대구대목구에서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0년 대구대목구 참사위원회에서 전교회 신부들에게는 매월 40엔, 한국인 사제들에게는 25엔을 지급하기로 했다.(1921년 1월 1일부터 시행) (영남교회사연구소, 《참사 · 재무위원회 회의록》, 2007, 81쪽) 한국인 사제의 부족분은 한국인이 채우도록 하는 교무금 제도가 논의됐다.

 

82) 한국 신자들은 한국 사제의 생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이 서면서 선교 사제들이 신자들에게 교무금을 내도록 독려하도록 했다.(대구대교구 100년사 편찬위원회, 《은총과 사랑의 자취》, 대구대교구, 63쪽.

 

83)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00년 6월 22일. 75쪽 ; 1900년 9월 30일, 77쪽 등.

 

84) 《뮈텔주교일기》 III, 1904년 10월 2일 주교 대례미사 : 같은 책 6권, 1920년 9월 21일 주교서품 30주년 미사 등.

 

85) 《뮈텔주교일기》 7, 1922년 5월 20일자, 「오후에 교구 법원 재판관 4명을 임명하기 위한 회의가 있었는데 한기근, 김명제, 정규하, 김성학 신부들이 선출되었다」

 

86)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19년 12월 23일, 185쪽.

 

87) 이 단락 전체는 《뮈텔주교일기》 II, 각 해당 날짜를 참조함.

 

88) 르 메르 신부 서한, 1896년 7월 20일자

 

89) 르 메르 신부 서한, 1896년 3월 26일자. 신부는 남산 밑에 43칸의 기와집과 7칸의 초가가 있는 집을 당오전 8,000냥에 샀다.

 

90) 르 메르 신부 서한, 1896년 1월 15일자. 르 메르 신부는 성당 수리 소식을 보고하면서, 아무도 신부가 다른 더 중요한 중심지로 옮겨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91) 《풍수원에서 온 편지》 1896년 8월 18일, 35쪽.

 

92) 위의 편지

 

93) 《풍수원에서 온 편지》 1896년 9월 12일, 38쪽.

 

94) 정규하 신부는 주교께 머리를 길러도 좋으냐고 문의했다.(같은 책, 30쪽), 반대로 강도영 신부는 주교께 머리를 짜르면 어떻겠느냐는 문의를 하고 있다.(《강도영 신부 서한》 1896년 9월 12일자)

 

95) 정규하 신부의 본당사목은 장호원본당의 부이용 신부를 제외하고 한 본당에서 가장 오래 사목한 경우인 듯하다. 부이용 신부는 1895년 창설자로 장호원에 부임하여 1947년 그곳에서 선종했다. 다만, 1943년 2차 대전 중 프랑스인이라는 이유로 서울신학교에 연금되었다가 해방 이후인 1945년 말에 다시 돌아와 2년간의 공백 기간이 있다.

 

96) 본고에서는 교회 전체나 교회 일을 가르킬 때는 본당이라 쓰고, 건물을 칭할 때는 성당으로 통일한다.

 

97) 김정숙, 〈성당스타일〉 《대구천주교인들 어떻게 살았을까》, 경인문화사, 2015, 30~31쪽.

 

98) 《뮈텔주교일기》 4, 1910년 11월 8일자

 

99) 르 메르 신부 보고서, 성당 〈100년 자료〉

 

100) 《뮈텔주교일기》 I, 1891년 10월 4일자

 

101) 《풍수원에서 온 편지》 1897년 2월 7일, 43쪽과 1897년 6월 18일, 47쪽.

 

102) 《뮈텔주교일기》 II, 1900년 11월 6일자

 

103) 풍수원 성당이 한국인 사제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며 서양식 건축이라고 소개되기도 하는데, 이보다 앞서 1906~8년 사이 강도영 신부가 서양식으로 180평 규모의 미리내 성당을 지었다. 

 

104)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08년 12월 28일, 113쪽. 이에 대해 뮈텔 주교는 인가를 신청하라고 통지했다.(《뮈텔주교일기》 5, 1909년 2월 23일자)

 

105) 김정숙, 〈성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의 역할〉 《대구 천주교인들 어떻게 살았을까》, 2016, 61~62쪽.

 

106) 김정숙, 〈尙州 물미 敎友村 會長의 인적맥락과 그 영향〉, 《한국사회와 천주교》, 2007, 287쪽과 〈쌍호공소를 통해 본 천주교 교우촌의 성립과 변천〉, 《인문연구》 57, 2009, 503쪽.

 

107) 《뮈텔주교일기》 1924년 6월 16일, 1924년 6월 27일, 1921년 8월 22일자 등

 

108) 《풍수원에서 온 편지》, 60신, 61신, 66신. 강도영 신부도 주교께 신학생들의 동향을 걱정했다.(《강도영 신부 서한》 1915년 9월자와 12월 10일자

 

109) 《풍수원에서 온 편지》, 268쪽.

 

110) 수녀회로 발전하는 동정녀 모임에 대하여는 김정숙, 〈남대영 신부와 삼덕당 여섯 정녀의 신앙공동체〉 《영성과 자애의 거인 루이델랑드》, 2016, 162~215쪽을 참조할 수 있다.

 

111)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26-1927 연례보고서, 251쪽.

 

112)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27-1928 연례보고서. 회원들은 무연고 시각장애인을 보살폈다.

 

113) 이응현 신부 때 광동국민학교에 인보성체수도회 소속 수녀 3명이 파견왔다. 광동국민학교는 1972년 횡성군 공립학교가 됐다.

 

114) 《강도영 신부 서한》, 1916년 6월 26일자

 

115) 《강도영 신부 서한》, 1924년 6월 12일자

 

116) 《경향잡지》 496호(1922년 6월호), 281쪽.

 

117) 《풍수원에서 온 편지》 263쪽 사진

 

118) 《풍수원에서 온 편지》 264쪽 사진

 

119) 1993년도 제70차 성체현양대회에는 약 4천명 참석했다. 

 

120) 《풍수원에서 온 편지》 2신, 22신, 28신 등 참조.

 

121) 성당 진입로를 새로 낼 때 김학용 신부의 형 김학현이 땅을 기증한 사실(1920년생인 이윤영씨 증언)로 보아 그 가족은 성당 근처에 살았다고 추정된다.

 

122) 《풍수원에서 온 편지》 1897년 6월 18일, 47쪽.

 

123)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23년 12월 12일, 224쪽과 1925년 9월 13일, 248쪽에 정규하 신부 소유의 토지를 교구 재산으로 등기 이전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124) 김영옥과 박호찬 회장 면담(2019년 8월 1일) 중 박호찬 회장 증언

 

125) 《뮈텔주교일기》 II, 1896년 5월 4일조와 《풍수원에서 온 편지》 1896-1897 연례보고서, 47쪽 주 27 참조.

 

126) 이우갑 신부가 2019년 8월 22일 정규하 신부의 부모 합장비를 찾아 확인했다.(《풍수원에서 온 편지》 21쪽, 사진 게재)

 

127)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06년 5월 6일, 98쪽과 1906년 5월 16일, 99쪽 참조. 부친이 아들과 함께 살기를 원해서 이사했다고 한다.(정운택, 《검은 바위》, 교학사, 1977, 77쪽)

 

128) 1920년생인 이윤영씨 증언 〈100년 자료〉

 

129) 문화영성연구소 제공, 〈100년 자료〉

 

130)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25년 7월 2일자, 247쪽.

 

131) 현재는 성당 뒷산에 신자들의 묘 내지는 묘지가 없다. 그러나 1900년 3월 17일 원주본당의 리굴로 신부가 선종하자 이곳 뒷산에 안장한 것처럼(《뮈텔주교일기》 II, 1900년 3월 20일자와 3월 21일자) 묘지는 크게 활용되었을 수 있다.

 

132) 《뮈텔주교일기》 III, 1904년 6월 12일자 ; 1905년 8월 1일자

 

133) 《뮈텔주교일기》 III, 1902년 6월 15일자와 8월 22일자

 

134)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23년 6월 10일자, 220~221쪽.

 

135) 드망즈, 이종흥 역. 앞의 책, 2006, Ch1. art 10 

 

136) 김정숙, 〈이윤일(?~1867)과 문경지역 천주교 교우촌〉 《민족문화논총》 59, 2015, 253쪽. 이하 이윤일에 대해서는 본 논문(241~282쪽) 인용.

 

137) 《강도영 신부 서한》 1923년 1월 30일자

 

138) 《강도영 신부 서한》 1925년 11월 17일자

 

139)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23년 6월 10일, 220쪽.

 

140) 김정숙, 앞의 논문, 2015, 252쪽.

 

141) 1920년생인 이윤영씨 증언 〈100년 자료〉

 

142) 양인성, 앞의 논문, 2008, 참조. 양인성은 경기도 북부에 형성된 교우촌을 개별 조사하면서 그 계통까지 소개했다.

 

143) 의정부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 신자들의 증언으로 정리.

 

144) 김정숙, 〈교구장을 낸 교우촌의 전통 : 최창무 대주교와 칠울(갈곡리) 공소〉, 《교우촌의 믿음살이와 그 지도자들》, 2018, 189~191쪽.

 

145) 원재연, 〈최경환 성인 가문의 삶과 신앙〉, 《교회사학》 6, 2009. 이 논문에는 최경환 성인의 가족 이동이 자세히 고찰되었다.

 

146) 김영옥과 박호찬 회장 면담(2019년 8월 1일).

 

147) 정운택, 《검은바위》, 교학사, 1977, 29쪽 등.

 

148) 김영옥과 박호찬 회장 면담(2019년 8월 1일), 박호찬 회장 정리 자료 참조.

 

149) 새점터 공소에 대하여는 원주교구 주보 현존 교구 공소(25), 2005년 11월 13일자 주보 2쪽. 신교선 신부는 인천가톨릭대학교 도서관장을 역임했으며, 2019년 현재 인천 용현5동 본당 주임신부이다.

 

150) 김영옥과 박호찬 회장 면담(2019년 8월 1일).

 

151) 《경향잡지》 487. 1922.2., 67쪽.

 

152)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06년 8월 6일자, 102쪽.

 

153) 강도영 신부는 마태오 복음을 번역했다.(《강도영 신부 서한》 1906년 6월 22과 9월 23일자)

 

154)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22년 2월 8일자, 202쪽.

 

155) 《풍수원에서 온 편지》 서한 61, 62 ; 강도영 신부도 이 신학생들에 대해 염려스런 의견을 올렸다.(《강도영 신부 서한》, 1916년 9월 18일자)

 

156)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19년 10월 4일자, 184쪽.

 

157) 이우갑, 〈풍수원 성당의 『한글 발음 표기 그레고리오 성가집』에 대하여〉, 《한국교회사연구자 모임》 15, 2019, 92~99쪽 참조.

 

158)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22년 12월 29일자, 214쪽.

 

159) 《강도영 신부 서한》 1921년 1월 18일자

 

160) 《강도영 신부 서한》 1922년 5월 30일자

 

161)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21년 8월 28일자, 196쪽과 198~199쪽 사진

 

162) 2012년 주임신부 보고 〈100년 자료〉

 

163) 2013년 주임신부 보고 〈100년 자료〉

 

164) 김정숙, 앞의 논문, 2018, 204쪽 주 50과 51.

 

165)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22-1923 연례 보고서, 218쪽 ; 정규하 신부는 일찍부터 외교인의 회개가 없음을 염려했다.(같은 책, 152쪽과 201쪽 참조)

 

166) 《풍수원에서 온 편지》 1926~1927 연례 보고서, 251쪽.

 

* 본고는 2019년 10월 4일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에서 주최한 ‘풍수원 성당을 바라보는 일곱 개의 시선’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내용을 토론을 거쳐 수정 보완한 논문이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16, 2019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정숙(영남대 명예교수, 한국사학)]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68703&Page=1&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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