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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0일 (토)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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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면서…

64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9-10

[레지오 영성]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면서…

 

 

지금 우리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은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순교 성인들을 특별히 공경하고 그 행적을 기리며, 그분들의 모범을 본받도록 노력하고, 전구를 빌며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기 위해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정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톨릭 신앙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는 여러 가지 형태의 박해가 있었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에는 그러한 피의 순교는 없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교회 초창기에만 순교자가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톨릭 신앙을 사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순교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피의 박해 시대는 아니지만, 현대는 ‘정신적인 박해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박해는 세상의 물질, 쾌락 등으로 욕심과 이기심을 부추기면서 주님을 향한 신앙을 배반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어렵고 힘듦을 해결해주시지 않는다며 주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하고 불평불만이 가득해지면서 주님의 복음을 거스르게 됩니다. 이 모습이 현대의 배교자 모습입니다.

 

아기가 뒤뚱거리며 걷고 있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혹시라도 잘못 넘어질까 봐 불안합니다. 이런 예상대로 아기는 얼마 걷지 못하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넘어질 때 아팠는지 큰 소리를 내며 웁니다. 하지만 잠시 뒤 아기는 울음을 멈추고 또 다시 일어서서 걸어보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기의 부모는 어떻게 할까요? 만약 아기가 제대로 걷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제 더 이상 스스로 걷지 못하도록 부모가 늘 안거나 업고 다닌다면 어떨까요? 이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아기가 걷지 못하게 해서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보호가 진짜 사랑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넘어지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넘어지더라도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그냥 놔두고 지켜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옳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고문당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져

 

이러한 관점에서 주님의 사랑을 함께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통과 시련이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주님의 진짜 사랑일까요? 아니면 어렵고 힘든 상황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짜 사랑일까요? 어떤 형제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제가 이런 아픔을 겪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이를 그냥 보고만 계신다면 저는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이 전혀 들어주시지 않는다며 불평불만이 가득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신앙생활을 그만두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앞서 갓난아기가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지켜만 봐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떠올리면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즉, 내가 원하는 것만을 주시는 주님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만을 주시는 주님이심을 말이지요.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현대의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은 지금을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우리 역시 주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과거의 우리 순교자들 역시 이 사랑 때문에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생명까지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가장 중요한 것뿐만 아니라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들을 내어놓는 것도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옳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용서’입니다. 누군가 이러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사람을 용서하고 참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다.”

 

용서하고 참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현대의 복잡한 상황 안에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은 왜 이렇게 많이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고문을 당하고 죽음으로 순교의 길을 가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박해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시대 안에서는 오해와 비방 속에서 묵묵히 선을 실행하는 것이 바보처럼 보이고, 커다란 손해를 겪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래서 다 그만두고 제멋대로 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러한 충동이 일어나게 하는 상황이 바로 현대의 또 다른 박해입니다. 이 박해를 당하게 되면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불평불만으로 기도를 그리고 신앙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떤 때는 고통이 너무 심해서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심지어는 저주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제 일상 삶 안에서 현대의 순교자 모습으로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종종 열정을 쏟아서 일에 몰두하다보니 신앙생활을 잊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일에 몰두하다보니 아기 낳는 것을 잊어버려서 어느 순간에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고 말하는 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일에 몰두하더라도 가정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또 자녀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또한 그 안에서 소소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즉, 오로지 일에만 몰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상에서 용서, 인내, 감사,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작은 순교’

 

그렇다면 일에 몰두해서 신앙생활을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분은 여유가 있어도 신앙생활을 못할 확률이 더 높아집니다. 우선순위가 제일 나중이기에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다 하고나서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집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훌륭한 신앙생활이고 현대의 순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또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들을 만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할 대상을 계속해서 만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신앙생활은 내 삶의 한 가운데에서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용서하고 인내하고 감사하며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 목숨의 일부를 바치는 행위이며 지금 이 현대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순교를 하는 행위입니다. 순교는 과거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바로 순교의 삶입니다. 이 삶이 하늘나라에서 커다란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늘 기쁘고 행복한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9월호,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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