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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고아(高雅)한 모습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Saint Andrew Kim Taegon) 신부-초상화의 외국서 활용

627 조영규 [choyeung] 스크랩 2019-04-29

  

 성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Andrew Kim Taegon 1821~1846)의 초상화, Oil on canvas, 90 x 75cm, 2010년, 오전동 성당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충청도 솔뫼(당진군 松山)에서 1821년 8월 21일 부친(父親)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母親) 장흥(張興) 고씨 우르술라 사이에 태어났다. 아명은 재복(兒名은 '再福'),  보명은 지식 (譜名은 '芝植'), 관명은 대건.(冠名은 大建)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한사람.

 

◯ 김대건의 순교자 가계

-증조부(曾祖父) 김진후(金震厚, 譜名 運祚) 비오(1739~1814년)는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않되어 내포(內浦)의 사도 이존창(李存昌)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이존창은 바로 김진후의 며느리인 이 멜라니아의 아버지였으니 사돈의 영향으로 신자가 된 것이다. 김진후는 체포된 뒤 수 없이 옥문을 드나들다가 1814년 12월 1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조부(祖父) 김택현 안드레아와 당고모 김데레사도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 김제준 (金濟俊. 譜名 濟麟. 字 信明. 이냐시오)도 교회 일에 전념하다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김진후의 셋째 아들 종한(金宗漢. 譜名 漢鉉. 안드레아)은 솔뫼에서 안동 우련밭(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릴리 우련전)으로 피해 살다가 여기서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참수 순교했다.

-그리고 종한의 딸 데레사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당고개에서 교수되고,

-그녀에 앞서 남편 손연욱(요셉)은 1824년 덕산에서 옥사했었다.
-김진후의 아우 선후(金善厚. 譜名 貴祚)의 손자 제교(金濟敎. 字 俊明)와

-진후의 넷째 아들 희현(金僖鉉. 字 李元)의 아들인 제항(濟恒. 字 明集. 루도비코)은 공주에서 순교한다.
-또한 김대건의 숙부 제철(金濟哲. 字 憲明)의 아들인 진식(金眞植. 베드로)은 1867년 공주에서,

-선식(金旋植. 프란치스코)은 해미에서 병인박해 때 순교한다.
-그리고 김대건의 아버지 제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하고,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김대건의 가계는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루었다.

 

소년 김대건 성인에게 깊은 신앙을 키워 준 분은 어머니였다. 훗날 마카오로 가서 부제품을 받은 김 대건 성인은 조국으로 비밀히 일시 귀국해서 어머니가 걸식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음을 알고도 찾아뵙지 못했다. 김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냈다. 1836년에 모방 신부[聖 모방 베드로 나 신부(1803-1839) (35세로 1839년 9월 21일 순교)]는 이러한 장점을 눈여겨 보고 '이 아이는 아무래도 천주께서 선택하신 아이 같다.'고 생각해 다른 한국 소년 두 명과 함께 그를 마카오로 보내 그들 고국의 성직자의 선구자로 만들고자 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초상화 작품 기념- 의왕시 오전동성당 전합수 주임신부 및 총회장과 전례분과장

 

2010년 오전동 성당의 전합수 주임신부는 주보성인인 임치백 요셉 성인의 초상화 제작을 주문하였다. 또한 당시 감옥에서 같이 생활하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초상화도 그리도록 하였다. 김대건신부는 26세로 순교하였는데 아래의 고증 기록과 나이을 참고하였다.     

 

 

◯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20 내지 30리 떨어져 있는 교우촌 긴가함(김가함) 성당에서 백절불굴의 용사 김대건은 강남 교구 교구장(서품을 준 주교는 페레올)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이며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다. 

 

1846년 9월 16일 군문 효수(軍門梟首)

 

 순교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은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그의 나이 26세에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김대건은 한국천주교회 설립 후 한국 교회의 희원을 이룬 첫 한국인 사제였다. 그의 인물됨에 대하여 그 때의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 놀랄만치 유창한 말씨는 대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다.” 고 말했다. 그는 서양학문을 직접 수학하고 체득한 지식인답게 세계조류에 대해 폭 넓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세계 정세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 발전에 유익한 일임을 역설한 선각자였다.

 

 ◯ 기록상에 나타난 김대건 신부의 모습 

김대건 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위대(허우대)가 좋았다" 라고 한다. 즉 얼굴은 뜻과 지조가 높아 고상하며 풍채가 좋았다 라고 한 것이다.   

고아 [高雅]의 뜻을 사전에서 보면  ① 뜻이나 지조가 높고 깨끗함 ② 고상하고 우아함을 말하고 있다.

또한 고아[古雅]하다는 뜻은 모습이 예스러워 아취가 있음(아담 雅淡ㆍ雅澹)을 말한다.

 

◯ 김대건 신부의 체격과 성격 및 얼굴모습(1925년 79위 시복조사 증거서에서)

그의 열정적 성격은 1845년 8월 17일 24살의 나이로 사제서품을 받은 후 사목활동에도 이어졌다. 1845년 10월 충남 강경 황산포(지금의 강경)의 나바위(황산포를 3킬로미터 가량 남겨 둔 한적한 곳)에 도착한 후 1846년 6월 5일 포졸들에게 체포될 때까지 8개월여간 활발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는 서울 서대문구 미나리골[미나리가 물결치는 마을, 현재 서대문구 渼芹洞(미근동)]과 무쇠막(마포구 서강), 남대문로 쪽우물골(남대문로 남정동)과 용인지역 은인, 터골 등지에서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미나리골 김회장집에서 김대건을 교우 마리아는 "나는 김신부를 만났고 직접 영세와 견진을 받았다. 신부는 키가 컸으며 튼튼한 체격에 발랄한 성격으로 품격이 있는 얼굴이었고, 성사 집전에서 엄격했다"고 증언했다

 

 

원문 참조  http://blog.daum.net/choyeungart/20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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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오전동성당, 조영규 성인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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