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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신앙인의 모범, 안중근 토마스

63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5-11

[허영엽 신부의 ‘나눔’] 신앙인의 모범, 안중근 토마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인 기념비적인 해입니다. 또한 항일 독립투쟁의 대명사인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 1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면 10년 전 일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저에게 이 날은 아주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2009년 10월26일, 당시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과 함께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안중근 유묵전’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시회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세계 곳곳에 있는 안 의사의 유묵을 모은 자리였습니다. 대부분의 유묵들은 하얼빈 의거 후 사형 집행 전 몇 달 동안 감옥에서 쓴 귀중한 작품들이었습니다.

 

이 전시회에는 미국에 있는 안 의사의 직계 후손들도 참석했습니다. 안 의사의 증손자 토니안은 개막식에서 유족 대표로 감사 인사를 하러 단상에 나가기에 앞서 참석한 귀빈들과 차례로 인사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정진석 추기경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토니안은 정 추기경과 악수한 손을 놓지 못하고 추기경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참석자들은 갑작스러운 토니안의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러나 열심한 가톨릭 신자인 토니안이 성직자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토니안의 어머니와 정 추기경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변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토니안의 아버지와 정 추기경이 6촌간이란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안 의사의 차남 안준생이 정 추기경의 고모(작은 할아버지의 딸)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 바로 토니안의 아버지 안웅호 씨였습니다. 정 추기경의 작은 할아버지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광복 후 서울에 온 안웅호 씨는 상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한국어에 서툴렀던 탓에 정 추기경과 영어와 우리말을 섞어 대화했고 안 씨가 미국에 간 이후에도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고 합니다. 이날 정 추기경은 토니안에게 “안중근 의사가 나라뿐 아니라 가톨릭 신자로도 큰 인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자부심을 가지고 아버지께 꼭 전하라”라고 당부했습니다.

 

토니안은 “아버지께 추기경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꼭 뵙고 싶었다. 어머니와 함께 몇 차례 추기경님을 찾아뵙고 싶어 명동에 갔었는데, 그때마다 추기경님이 로마 회의 등 출타 중이어서 뵙지 못했다. 미국에 돌아가 아버지께 추기경님의 안부를 전하면 무척 기뻐하실 것”이라며 감격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정 추기경은 한 번도 안 의사와의 관계를 이야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언론 홍보를 담당하고 있던 저는 그날 저녁 언론사의 전화를 받느라 어지간히 시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안 의사는 황해도 일대에서 적극적인 전교 활동 펼쳐

 

안중근 의사는 19세 때인 1897년 빌렘 신부님에게 세례를 받아 토마스가 되었고, 빌렘 신부님의 복사(服事)로도 활동했습니다. 이후 안 의사와 부친 안태훈 베드로는 6~7년간 황해도 일대에서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펼쳤고, 그분들이 개척한 청계동공소가 황해도 내 두 번째 본당으로 설정되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게다가 본당 설정 후 불과 2년 만에 25개 공소에 1천4백여 명의 신자라는 경이적인 전교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실제로 안 의사의 옥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 중에는 안 의사가 천주교 교리를 전했던 강연내용이 16쪽에 걸쳐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이처럼 그분의 삶에는 하느님을 향한 신앙이 깊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오랫동안 교회로부터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안 의사의 의거를 살인 행위로 규정하여 신앙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1993년 8월21일, 안중근 의사 추모미사에서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토마스의 의거에 정당성을 인정하며 “그동안 교회가 안 의사를 잘못 판단한 데에 대한 과오를 공개적으로 반성한다”며 사상 첫 공식 추모 미사와 함께 신앙적 복권을 선언했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생애와 일치시키고자 노력한 안중근 의사

 

안 의사는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셨고, 신앙과 일치시키셨습니다. 안 의사가 의거 후 제일 먼저 한 일도 기도였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천주교 신앙과 교리에 어긋남이 없다고 확신했기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1910년 3월26일 순국 당일에도 여순 감옥에서 10분간 기도를 올리고 당당히 형장에 걸어 들어갔습니다. 안 의사는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생애와 일치시키고자 노력하셨던 분이었습니다. 특히 가족들에게 “장남 베네딕토를 반드시 신부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장남이 의문의 죽음을 당해 이 유언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사형 집행이 확정되자 예수님의 수난일인 성 금요일에 처형해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안 의사는 처형되기 직전에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고,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그곳에서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안 의사는 처형 직전 3분간 기도를 한 다음 처형대에 올라 ‘동양평화만세’를 부르고 순국하셨는데, 주머니에는 예수님의 상본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추모하는 것은 그 거룩한 삶은 물론이고, 그분의 신앙과 민족 운동이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안중근 의사는 그분의 애국충절뿐 아니라 열심한 신앙인으로도 교회 안에서 마땅한 존경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존경과 동시에 안 의사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5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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