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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생활교리: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교회

216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4-17

[생활교리]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교회 (1) ‘하느님의 백성’의 복원?

 

 

2013년, ‘지구 반대편 저 끝에서’ 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고 있다. 그 배경 중에 혹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전 선임자들과 달리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노선을 걷는 것을 꼽는다. 정말 그런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현 교황은 본인을 ‘교회의 아들’이라고 지칭하며, 교회가 수천 년 동안 지켜온 신앙의 진리를 수호할 것임을 거듭 밝힌다. 다만, 그는 교회가 지금껏 잊고 지내온 – 혹은 잃어버린 – 교회의 본모습을 다시금 회복하고자 한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선포된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라는 관점의 복원이다.

 

사실, 공의회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란 말은 교회를 뜻하는 중심 개념이었지만, 1985년 주교 시노드 이후에는 친교(communio)라는 말이 주로 교회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백성이란 말은 점차 교회 내에서 인용되지 않거나, 잊혀져 온 것이 사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동안 교회 변두리에 있었던 하느님의 백성이란 개념을 다시금 교회 안으로 끄집어낸다. 그는 본인의 교황직 수행에 로드맵(road map)이 할 수 있는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백성’이란 단어를 164번 언급할 정도로 강조하며, 교회를 “거룩하고 충실한 하느님의 백성”(125항)이요,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백성”(111항)으로 선포한다.

 

현 교황에게 교회는 조직적이고 서열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교계적인 제도 그 이상의 것이다. 때문에 그는 교회가 피라미드식 형태의 구조와 배타적인 엘리트 모델, 그리고 모든 성직주의에서 탈피하기를 촉구한다. 반대로 비록 직무와 역할은 다를지라도, 세례를 통해 한 몸이 된 하느님의 백성 모두가 교회 생활에 ‘함께’ 참여하기를 설파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러한 교회에 관한 이해는 결코 대중을 향한 인기영합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권위는 “언제나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104항)해야 한다는 교황의 확고하고도 분명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2014년 세계 주교 시노드 때, 교황은 이렇게 천명했다: “교황은 혼자서 존재할 수 없고, 교회 위에 있을 수도 없다. 그는 세례 받은 이들 가운데 하나로 교회 안에 존재한다.” 분명 프란치스코 교황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은 교회 안에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2019년 4월 7일 사순 제5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팔봉성당 주임)]

 

 

[생활교리]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교회 (2)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중 앞에서 첫 모습은 참으로 소박하면서도 친근했다. 그는 “부오나 세라”(Buona sera, 이탈리아 저녁인사), 곧 일반인들의 정겨운 인사로 친근감을 표시하며, 아무런 교황의 상징물 없이 흰색 수단만을 착용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교황으로서 온 세상에 축복을 하기 전에, 그는 본인이 ‘먼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을 알고, 고개를 숙이며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기도를 청했다. 단지 몇 분 동안 이루어진 새 교황의 첫 모습을 통해 많은 이들은 교황이란 직무가 건네주는 무거운 옷 뒤에, 교황도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란 ‘잊혀진’ 사실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본인을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 ‘세례 받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 곧 “평범한 사람”(2014.3.5)으로 소개한다. 그만큼 그는 교회 최고 지도자로서 교회 안에서 고립될 수 있는 위험을 피하고, 하느님 백성 속에서 함께 머물기를 원했다.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이 – 교황 선출 이전부터 – 사목 활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삼은 것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는’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그가 교황 선출 후 교황궁 숙소 대신 게스트 하우스인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머물기로 결정한 배경을 보라! 그는 왜 이런 선택을 했는가? ‘가난함’을 실천하기 위해서인가? 여기에 대해 교황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2013.7.28.).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궁 ‘밖에’ 살기 원했지만, 반면에 하느님 백성 ‘안에’ 머물기를 원했다. 왜냐면, 교회는 부모로서, 형제로서 사람들과 늘 가까이 머물러 있어야 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앙 공동체는 몇몇 선택된 사람들만 머무는 ‘경당’이 아니라, 모든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 곧 교황부터 마지막 신자 한 사람까지 넓은 가슴으로 감싸 안아줄 ‘가정’임을 그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실, 가톨릭 교회는 본성상 늘 ‘우리’라는 복수를 통해 불려져야 한다. 곧 ‘내’가 아니라 ‘우리’가 교회인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꿈꾸는 교회는 어느 면에서 소박하지만, 참으로 따뜻하다. 바로 교회가 아무런 차별과 장벽 없이 모든 이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그리고 함께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본인이 ‘먼저’ 혀끝이 아닌 몸소 삶을 통해 실천하고 있다. 또 이것이 바로 그가 교회 최고 지도자로서의 특권을 내려놓고,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교회 안에 존재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분명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들이 함께 사는 교회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의 꿈은 현재 진행 중이다! [2019년 5월 26일 부활 제6주일(청소년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팔봉성당 주임)]

 

 

[생활교리]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교회 (3) 듣는 교회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타 종교인들, 그리고 심지어는 무신론자들까지도 가톨릭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고, 대화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산 에지디오 공동체의 창설자인 리카르디(Riccardi)는 현 교황을 “모든 이들의 형제”, “모든 이들의 아버지”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주지해야 하는 사실은, 만약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대화의 장벽 없이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중을 향한 현 교황의 친화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에서 아래로 하달되는 수직적인 구조를 넘어서서 하느님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복음의 기쁨, 154, 171항 참조), 곧 “경청하는 교도권”(발터 카스퍼)을 원하기 때문이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명령에 따라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모든 것을 지키게”(마태 28,19-20 참조) 하는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의 모습에 익숙했다. 하지만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통해 성령의 기름부음 받음으로써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받고, 이러한 감각을 통해 '하느님 백성 전체는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라고 선포했다(교회헌장, 12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공의회 교리를 다시금 교회 중심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신자들 전체에게 주어진 신앙 감각을 통해 하느님이 오늘날의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들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2014.10.04). 때문에 그는 교회가 하느님의 소리와 백성들의 외침을 들어야 함을 천명한다: “신자 백성, 주교단, 로마의 주교 모두가 서로 들어야 하고, 모두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듣기 위해서이다”(2015.10.17.).

 

‘잘 말하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 소통의 첫 번째 원칙임에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면 교회가 하느님 백성을 잘 인도하고 가르치기 위해, “주교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성 아우구스티노) 서로서로가 먼저 잘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너무나도 과장된 말일까? 여기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대답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듣는 것입니다. […] 서로 대화합시다. 나는 나에 관해 호의적이지 않은 의견 또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가장 아름다운 정의에 따르면, 교황은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기 때문입니다”(2017.05.22.) [2019년 7월 7일 연중 제14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팔봉성당 주임)]

 

 

[생활교리]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교회 (4) ‘복음의 기쁨’으로 사는 교회

 

 

“파파 프란치스코! 파파 프란치스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는 곳이면 공통적으로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환호이자 외침이다. 하지만 그는 대중의 뜨거운 열광에 이렇게 응답한다: “여러분은 광장에서 ‘파파 프란치스코’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디 계시나요? 저는 여러분이 이렇게 외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당신은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2013.5.18.).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을 두 개의 언어로 요약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그의 강론과 연설의 심장이자, 가장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교회의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다. 그는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회의 교리에 관해서도 늘 복음에서부터 출발하고, 해석하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기쁜 소식은 교회의 도덕적인 가르침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복음의 기쁨, 49항)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현 교황에게 예수님의 복음은 무엇을 명백하게 밝혀주는 ‘이념적인 학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에 기쁨과 해방의 길로 인도하며 불을 밝혀주는 ‘등불’인 것이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복음의 기쁨을 살아갈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현 교황은 어떤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기보다는 복음의 근원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삶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초대한다. 여기에서 ‘돌아감’은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인 복음적 삶, 곧 바로 우리 일상에서 예수님을 찾고, 만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1-3항 참조). 때문에 그는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살려고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당장’ 복음의 기쁨을 느끼고, 행복할 것이라고 단언한다(2019.2.5. 참조).

 

이 때문일까! 현 교황은 본인이 교황명으로 삼은 성 프란치스코의 고향인 아씨시(Assisi)를 찾았을 때 이렇게 고백했다: “성 프란치스코의 목소리가 내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복음, 복음!. [……] 파파 프란치스코, 복음의 종이 되어라!’ 만약 내가 복음의 종이 되지 못한다면, 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2013.4.10). 어쩌면 현 교황은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들었던 복음적 사명을 이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언자적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전해주는 듯하다: “복음의 기쁨은 어느 누구도 또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복음의 기쁨, 84항).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 곧 ‘복음의 종’이 됩시다! [2019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팔봉성당 주임)]

 

 

[생활교리]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교회 (5) 공동합의적 교회(synodal Church)

 

 

2015년 교황 프란치스코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1965년에 설립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50주년 기념 연설에서 미래의 교회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명한다: “공동합의성의 여정은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의 교회에 바라시는 것이다”(2015. 10. 17). 공동합의성(Synodality)은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걷는다’라는 뜻을 지닌 시노드(synod)에서 파생된 말로, 세례를 통해 동등한 품위를 얻은 교회 구성원 모두가 아무런 차별 없이 함께하면서, 교회의 삶과 사명에 관련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공동합의성의 목표는 여러 사람이 모여 다수결에 의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의견을 하나로 모아 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과 우리는……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28)라는 초대 교회의 모습처럼, 하느님 백성 전체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각자의 특별한 직무와 은사에 따라 교회 전체의 선익을 위해 함께 봉사하는 것이다. 때문에 공동합의적 교회 안에는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오직 성령의 이끄심으로”(발터 카스퍼), 모두가 다양성의 일치 속에서 서로 경청과 대화 그리고 협력을 통해 교회 공동체적 사명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공동합의성은 교황 프란치스코의 교황직 수행 방법에 중심을 이루며, 무엇보다 교회 쇄신을 위한 기본 틀로서 작용한다.

 

실제로 현 교황은 즉위 후 약 한 달 만에 9인 추기경위원회를 설치하여 보편교회 사목을 위한 도움을 구했고(2013.4.13), 2014-2015년도에는 가정을, 2018년도에는 젊은이를 주제로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개최하여 전 세계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양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서로 경청함으로써 앞으로 교회가 나아갈 방향과 대안을 함께 찾고자 했다.

 

또한 공동합의성은 그동안 교회 쇄신을 위해 가장 시급히 논의되었던 주제 중 하나인 로마 교황청(Curia) 중심의 지나친 중앙 집권화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준다. 그중 한 가지 대안으로, 현 교황은 교회의 분권화를 꼽는다(복음의 기쁨, 16항). 일례로, 그는 2015년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맞아 거룩한 문(聖門)이 열리는 곳을 로마(Roma)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교구로 확대했고, 그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열리는 거룩한 문은 로마의 대성당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끊임없는 분쟁과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반구이(Bangui)의 대성당으로 정했다.

 

교황은 이런 공동합의적 실행을 통해 교회 구조의 근본적인 전환을 원한다. 과거 가톨릭 교회가 성직자 중심의 조직적 서열이 분명한 ‘피라미드형’ 구조로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가 소외되었다면, 이제는 거꾸로 교회 직무자 이전에, 하느님 양떼들의 외침을 ‘먼저’ 듣는 ‘역피라미드형’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길을 간다’는 공동합의적 교회를 실현해 나가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걷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015.10.17.). [2019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팔봉성당 주임)]

 

 

[생활교리]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교회 (6) 자비로운 ‘엄마’ 같은 교회

 

 

성 요한 23세 교황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연설에서, 오늘날의 교회는 더 이상 엄격함이란 무기를 들기보다 ‘자비’라는 치료제를 사용해야 함을 촉구했다. 그 이후 후임 교황들에 의해 자비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로 선포되었고, 무엇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는 교황 직무를 이해하는 핵심어가 되었다(보라! 그의 주교-교황 사목 모토가 ‘자비로이 부르시니 miserando atque eligendo이다!).

 

교황 프란치스코에 따르면, 자비는 “하느님의 이름”(2016.1.13), “하느님의 심장박동”(2018.4.8), 그리고 “하느님의 신분증”(토르니엘과 대담)이다. 때문에 하느님 자비를 만나는 장소인 교회는 “누구나가 받아들여지고, 용서받고, 사랑받는”(2013.6.12.) 곳으로서,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형제로 대했듯이, 교회도 다른 이들에게 “자비로운 엄마”(2013.9.18)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황은 특별히 교회 공동체로부터 멀어진 이들과 세상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사는 이들을 기억하며, 교회가 그들이 처한 어둔 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지 말고, 오히려 함께 길을 걷고 동반해주는 자비롭고 모성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강조한다(2013.7.27). 한 마디로 교황은 “지금이 자비의 시대”(2013.7.29) 임을 선포하며, 교회가 상처받는 인류에게 ‘엄마의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어야 함을 간절히 호소한다(2014.9.3.).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인들이 차를 마시며 신학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격식 있는’ 모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직접 찾아 나서는 ‘용기 있는’ 모습을 지닐 것을 당부한다(2016.1.13). 그리고 이점을 본인이 먼저 몸소 실천한다. 단적인 예로, 그는 2014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위중한 정치상황에서 자칫하면 언행 하나가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찾아가 연민을 느끼며 위로하고, 그들과 연대한다는 의미로 노란 리본까지 가슴에 달았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고통앞에 중립은 없다”(2014.8.18)고 말한다. 왜냐하면, 교황에게 늘 “교회는 사랑이 넘치며 따듯한 애정과 부드러운 온유의 사람으로서, 연민 가득한 눈길로, 조용하게 어루만져주는”(2018.5.21.) 자비로운 엄마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프란치스코 교황 이후 가톨릭 교회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맞는 이야기이다. 다만, 그 놀라운 변화는 바로 ‘온유함, 사랑, 그리고 자비의 혁명’이다!(2015.12.22.) [2019년 11월 24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팔봉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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