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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예수님을 그리는 배고픔, 최 비르지타 복녀

117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3-22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예수님을 그리는 배고픔, 최 비르지타 복녀

 

 

순조 임금 시절, 박해의 여파가 가시자 조정은 전처럼 신자들을 못살게 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신자들을 완전히 용납한 것은 아니어서 때때로 ‘금령’(禁令)이 작동했고 해마다 곳곳에서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자들은 교회를 조직해 나갔다. 한편으로 배교자들도 돌아와 합류했다. 이제는 돈을 모아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사람을 파견할 수도 있게 되었다. 박해의 폐허 위에서 30여 년을 지내며 극복해 낸 결실이었다.

 

신자들은 십계와 칠극, 아침저녁 기도, 삼종 기도 정도밖에 몰랐어도 아는 것만큼은 철저히 실천했다. 특히 신자들은 대재와 소재(지금의 단식재와 금육재)에 주의를 기울였다. 순교자들의 삶을 살펴보면 마치 그들이 대·소재를 잘 지켜 순교할 수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이에 엄격했다.

 

 

신자로서의 표시인 대·소재

 

한국 교회에서는 천주교를 수용하면서부터 대·소재를 지켜 왔다. 심지어 1777년 권철신 등 강학하고자 모였던 사람들도 이를 실천했다.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따르면, 그들은 ‘한 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바친다.’는 구절을 읽으며 한 주마다 하루를 쉬면서 묵상했고, 또 그날은 육식을 피했다. 교회가 세워졌지만, 사제도 성당도 없고 지도자마저 뿔뿔이 흩어진 박해 와중에도 신자들은 묵묵히 그 의무를 다했다. 황사영은 ‘백서’를 작성하는 동안 대·소재 관면을 청하기도 했다.

 

“올해 박해를 치르고 나니 빠져나온 교우가 별로 없는데, 모두가 숨어서 그들이 완전히 섬멸된 줄로 믿게 해야 합니다. 이 방법만이 이곳에 천주교회의 그루터기를 보존하는 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행상인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이사할 수밖에 없어서 길을 방황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 모든 사람을 위해 대재와 소재의 관면을 청합니다.”

 

실제로 이 시기에 김풍헌은 하루 한 끼만 먹었으며, 김광옥 복자는 사순 시기 내내 금식하는 등 사례가 다양하다. 그러다 보니 대재와 소재는 천주교 신자의 상징이 되었다. 그 실천 여부를 보고서 신자인지를 일반인들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10년이나 별러 마련한, 1811년 북경 교구장에게 선교사 파견을 청하는 편지에 대·소재 관면을 요청했다. 곧 대재와 소재를 명하는 법규를 사회에서도 알고 있어 이를 통해 교우를 구별해 낸다면서 길을 나선 사람들과 하인들에게 이를 관면해 달라한 것이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황사영 ‘백서’나 북경 교구장에게 보낸 편지에는 전체 신자에 대한 대·소재 관면 요청이 아닌 외부에서 활동할 때의 관면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신자들이 일반 생활에서는 대·소재를 충실히 지켰음을 알 수 있다.

 

을해박해 순교 복자인 김희성뿐만 아니라 많은 순교자가 대·소재를 실천했다. 특히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한 복자는 사순 시기는 말할 것도 없고 날마다 대재를 지켰다. 또 김세박 복자는 아내가 대·소재를 지키지 못하게 하자 집에서 나와 교우촌에서 생활했다. 집안의 박해로 순교한 하느님의 종 김호연도 금요일과 토요일마다 대재를 지켰다.

 

 

여성들의 주께 드리는 약속

 

조선교구 설정 이전 여성들의 신앙생활 사례는 매우 적다. 여성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 조선의 관습 때문인데, 1801년에는 여성 교우가 몇 명밖에 붙잡히지 않았다. 을해박해, 정해박해 등 시간이 흐르며 체포되는 여성이 많아지면서 그들의 신앙생활이 알려졌다. 이 여성교우들 또한 대·소재에 엄격했음은 물론이다. 한 예로 앞서 동정 부부로 소개했던 권천례를 들 수 있다. 권천례는 영신적 향상을 열망하여 고신 극기(苦身克己)를 행했으며 한 주에 두 번 대재를 지켰다. 평소에도 자기 밥그릇에 재나 모래를 몰래 섞기도 했다.

 

한편, 최 비르지타(1783-1839년)는 최경환 가문 사람으로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신유박해 때 남편 유씨가 황사영을 숨겨 준 죄로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그도 따라갔다. 남편이 유배지에서 병들어 죽음이 임박했으나 대세 줄 교우를 불러올 수 없는 처지였던 복녀는 ‘남편이 다시 살아난다면 남편과 정결을 지켜 남매처럼 살겠다.’고 결심한 뒤 자신이 대세를 주었다. 이후 남편을 떠나보내고 의지할 데가 없었던 복녀는 오빠에게로 돌아갔다. 복녀의 오빠는 1839년 원주에서 순교한 최해성 복자의 부친이다.

 

교우들이 달력을 마련할 수 없던 시절, 비르지타는 모르고 고기를 먹어 소재를 거스른 일이 있었다. 의심스러워 확인해 보니 사순 시기였고, 그때부터 복녀는 절대로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하고 죽는 날까지 이를 지켰다.

 

비르지타는 1839년 옥에 갇힌 조카 최해성을 보러 갔다가 체포되어 순교했다. 복녀의 조카 최해성은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가족을 피신시킨 뒤 집으로 교리 서적을 가지러 갔다가 체포되어 원주 강원감영 옥에 갇히게 되었고, 복녀는 어렵지 않게 조카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곳으로 갔으나 관원들에게 신자임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관원들은 복녀를 배교시키려 했지만, 복녀가 이를 거부하자 고문을 가했고 결국 옥에 가두어 굶겨 죽이려 했다. 그해 10월 6일 최해성이 참수당하고 두 달쯤 지난 12월 8일과 9일 밤사이, 관원들은 4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었던 복녀를 목 졸라 죽였다. 그때 복녀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시간이 지나며 단어도, 의미도 변했지만

 

천주교 신자들도 명예욕, 물욕, 성욕, 식욕 등에 언제나 노출된다. 그 가운데 식욕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듯하다. 이를 절제하는 단식은 몸 전체로 봉헌하는 긴장된 기도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소재를 지키는 생활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철저한 묵상이며 복음의 생활화라 할 수 있다.

 

옛 교우촌에서는 대·소재를 지키지 못하면 당연히 고해성사를 봐야 했다. 박해 시대 당시에는 이를 지키는 재일(齋日)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초기 신자들은 대·소재를 지키며 절제의 힘으로 교회를 지켜 나갔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 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경향잡지, 2020년 3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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