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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김사범 · 여기중 · 고시수 야고보

187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1-05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약전


김사범 · 여기중 · 고시수 야고보

 

 

김사범(?~1866)

 

김사범은 충청도 청주의 양반 출신으로 온양 방아사골(현 충남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에서 살았다. 그는 여섯 형제 가운데 맏이로 성품이 굳세고 의연했으며, 어려서 입교해 교리에 밝은 데다 독실하게 믿고 실천했다. 그러던 중 다블뤼 주교가 방아사골로 오자 그는 그곳 회장으로 임명돼 3년 동안 주교의 복사로 열심히 봉사했다. 이후 다블뤼 주교는 1865년 홍주 신리(현 충남 당진시 합덕읍 신리)로 거처를 옮겼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김사범은 여러 동생을 위해 관속에게 돈을 주어 체포를 면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해 6월 중국으로 피신하려고 배를 기다리던 리델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시기도 했다.

 

1866년 가을, 김사범은 온양 포졸들에게 체포됐다가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됐다. 그러나 곧 배교를 뉘우치고 순교를 결심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수원 포졸들에게 체포돼 수원 유수부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는 다블뤼 주교를 모시고 있던 사실을 거짓 없이 자백했고, 막내 제수와 교우들이 옥으로 끌려오자 그들에게 순교를 권면하고 신앙을 북돋워 줬다.

 

옥에서 순교를 기다리던 김사범은 태장 수백 대를 맞고 “예수 마리아”를 크게 외치며 순교했다.

 

 

여기중(1806?~1866)

 

여기중은 충청도 내포 사람으로 소년 시절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장성한 뒤 혼인해 가정을 꾸린 그는 가족과 함께 산골로 이주해 농사를 지으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여기중은 죽산 포교에게 체포됐다. 포교가 그에게 “재물을 숨겨둔 곳과 동료 교우들의 이름을 대라”고 했지만, 어느 한 사람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는 죽산 관아로 압송돼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60여 세였다.

 

한편, 여기중의 아들 여정문은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가 죽산 포교에게 체포됐다. 그러자 여정문의 아내와 15세 된 그의 아들이 자진해 포교들을 따라갔고, 온 가족이 죽산 관아에 도착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여정문의 나이 40여 세였다.

 

 

고시수(야고보, 1817~1866)

 

고시수는 충청도 홍주 원머리(현 충남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사람으로, 소년 시절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는 고향에서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목천 소학골(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 교우촌으로 이주해 교우들과 함께 살았다.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한 고의진(요셉)이 아들이고, 죽산에서 순교한 문막달레나가 며느리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아들 고의진이 체포돼 공주로 끌려가자 고시수는 남은 가족과 함께 더 깊은 산 속으로 피신했다. 이때 며느리 문막달레나는 겨울 산속에서 유복자를 출산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고시수는 그의 피신 소식을 듣고 산속까지 쫓아온 죽산 포졸들에게 며느리와 함께 체포돼 죽산 도호부로 압송됐다.

 

고시수는 이미 순교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도호부에서는 그에게 특별한 형벌을 가하지 않고 그냥 옥에만 가둬 두었다. 이후 그는 담당 관원이 바뀌면서 수원 유수부로 이송됐고,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1월 3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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