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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조선 후기 천주교회의 의료 활동

103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5-22

조선 후기 천주교회의 의료 활동

 

 

국문 초록

 

이 논문은 1866년 이전 조선 천주교회가 펼친 의료 활동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지금까지 이 시기 조선 천주교회의 의료 활동은 ‘서양 의학의 도입’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분야의 연구는 앞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새로운 연구를 위한 전단계로서, 박해시기 조선 천주교회의 의료 활동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기존에 잘못 알려진 내용들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리하여 박해시기에 활동한 신자 의약인들의 명단과 활동을 정리했고, 시약소의 설치 여부를 명확히 밝혔다. 그리고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질병 치료를 통해 ‘천주교와 서양 의학의 도입 문제’를 간접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조선 후기 의약업에 종사하던 신자 30명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신자들을 가르치고, 신자들의 모임을 주관했으며, 전교 활동을 펼치고 북경 교회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등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둘째, 최필제, 이중배, 이치영, 최 베드로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 의약인들은 신앙과 의료를 접목시켰다. 이들은 신앙을 바탕으로 의료 활동을 전개했고, 의술을 매개로 전교 활동을 펼친 의료 전도사였다.

 

셋째, 조선 천주교회는 1857년에 시약소를 설립하여 서양 의약품을 나누어 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1857년은 1859년의 오류였고, 시약소는 조선에 설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천주교회는 1859년과 1862년에 두 차례에 걸쳐 시약소를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박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넷째, 조선 후기 ‘서양 의학의 도입’은 조선 천주교회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았다. 그리고 박해시대 선교사들은 서양의 의술이나 약보다는 대체로 조선인 의사와 한약을 통해 자신의 병을 치료하였다. 아울러 당시 교회의 규정도 선교사들의 의료 활동을 제한하였고, 외국에서 도입한 서양 의약품은 구충제 정도에 불과했다.

 

 

1. 문제 제기

 

한국 천주교회의 의료 활동에 대해, 최석우는 ① 박해시대(1784~1866), ② 간이 진료소 시대(1886~1930), ③ 병원 시대(1931~1945)1)로 구분하였고, 박태봉은 ① 서양 의학의 전래기(1836년 이전), ② 서양 의료의 도입기(1836년 이후), ③ 의료 사업의 개화기(1886년 이후), ④ 의료 사업의 발전기(1950년 이후),2) 조규상과 맹광호는 ① 서양 의학의 전래와 박해시대(1784~1866), ② 서양 의학의 도입과 진료소 시대(1886~1930), ③ 의원 중심의 의료 사업 시대(1930~1950), ④ 병원 중심의 의료 사업 시대(1950~현재)3)로 시기를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 구분 하에, ‘예수회 중국 선교사가 지은 《주제군징(主制群徵)》(아담 샬 폰 벨, 1629)과 같은 서학서를 통해 서양의 의학 지식이 조선에 전해졌고, 신자였던 다산 정약용이 우두종법(牛痘種法)을 처음으로 조선에 도입하였다. 그리고 1859년에 서양 의료에 바탕을 둔 시약소(施藥所)가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나, 병인박해로 교회의 의료 활동은 중지되었다. 그러다가 1876년 선교사들이 재입국한 이후 교회가 재건되면서 의료 활동도 재개되어 시약소가 재설치되었다. 이후 시약소는 진료소로 확대되었고, 일제 강점기의 의원 시대를 거쳐 오늘날 병원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국 교회의 의료사를 서술하였다.

 

선학들의 시기 구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연구에서는 ‘박해시기(1866년 이전)의 특징’으로 ‘서양 의학의 전래와 도입’을 들고 있다. ‘《주제군징》의 전래, 우두종법의 도입, 시약소의 설치’를 천주교의 의료 활동과 연계해서 이해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1960년대에 출간된 김두종의 《한국의학사》의 서술 내용과도 같다.4)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확실한 근거를 토대로 한 것은 아니었다. 시약소의 경우는 선교사들에 의해 설치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서양 의학과 관계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주제군징》은 예수회 선교사의 저작이라는 점에서, 우두법은 이것을 도입한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에서, 한국 천주교회사와 연계시켜 이해하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 처음으로 서양 의학을 소개하고, 근대적인 시료(施療) 사업을 실시한 것이 천주교회라는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

 

그런데 《주제군징》은 의학서가 아니다. 다만 천주의 존재를 증명하는 한 가지 사례로 인체의 해부생리학적인 설명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논평한 이익(李瀷, 1681~1763)과 이규경(李圭景, 1788~1856)도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다. 아울러 《주제군징》에는 구체적인 치료와 관련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이 조선의 의학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어려웠다는 견해도 있다.5)

 

다음으로 정약용과 우두법의 경우, 다산이 지은 《마과회통(麻科會通)》(1798)의 부록에는 영국동인도회사의 외과의인 알렉산더 피어슨(Alexander Pearson)이 발표한 우두접종법을 1828년에 토마스 스탄튼(Thomas Stanton)이 한역(漢譯)한 〈신증종두기법상실(新證種痘奇法詳悉)〉이 실려 있다.6) 그리고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1835년에 중국에서 기방(奇方)이 나왔고, 정약용이 그것을 소장하고 있다.’7)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정약용이 우두종법을 알게 된 것은 1828년에서 1835년 사이라고 할 수 있다.8)

 

그런데 이 시기는 정약용의 신앙 여부가 불명한 때이다. 비록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정약용이 유배 때와 해배(解配) 이후에 신앙을 유지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9) 그렇게 볼 수 없는 정황들도 있다.10) 따라서 “우두종법이 서학 및 천주교의 관계로 다산 및 그 일파들에 의해 북경 방면으로부터 비밀히 수입되었다.”11)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산의 우두법 도입은 천주교와의 관계가 아니라 1810년을 전후하여 중국에 우두법이 소개되어 시행되던 상황12)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1854년경에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에서 우두법이 실행된 것을 중국의 영향이라고 했듯이,13) 귀양 가기 전부터 종두법(種痘法)에 관심이 많았던 다산이,14) 중국에서 새로운 방법이 유행하는 사실을 알고 지인(知人)을 통해 스탄튼의 글을 구해 보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지인을 통한 방법은 정약용이 1821년에 콜레라(괴질)의 처방문을 구한 과정을 통해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1821년 가을에 조선에는 콜레라가 유행하여 수십만 명이 사망했는데, 이때 다산은 중국의 섭동경(葉東卿, 1779~1863)에게 부탁하여 그해 겨울 유리창에서 간행한 처방문을 받아 볼 수 있었다.15)

 

섭동경은 섭지선(葉志詵)을 말한다. 그는 중국에서 장서가로 알려진 인물이며 서법에 능한 문인이다. 그리고 고증학자로 이름이 높은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섭지선은 장인인 옹방강이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교류하게 되면서, 정약용 등 조선의 문인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다산은 섭지선의 박식함에 대해 명말청초의 학자인 모기령(毛奇齡, 1623~1713)에 못지않다고 높이 평가하였다.16)

 

섭지선은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리하여 1850년에는 《신농본초경찬(神農本草經贊)》이라는 본초학 책을 저술하여 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청나라 4대 약방 중의 하나인 섭개태 약방(叶开泰 药店)의 후손으로 약방 일에도 일정 부분 관여하였다.17)

 

다산은 섭지선과 의약과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치료법을 알 수 없었던 괴질이 1821년에 유행하자 섭지선에게 도움을 청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1828년에 작성된 스탄튼의 글도 다산이 섭지선을 통해 구해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한편 정약용은 해배 이후 여러 사람들과 학문적인 교유를 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1834년에 좌의정에 임명된 홍석주(洪奭周)도 있었다. 두 사람은 홍석주의 동생이자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를 통해 1827년부터 교류하였다.18) 그런데 홍석주는 정약용이 지은 《마과회통》을 개편하여 《마방통휘(麻方統彙)》(1802년)를 간행했고, 1831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따라서 정약용과 홍석주의 교유 관계, 의학에 대한 홍석주의 관심 등을 통해 볼 때, 스탄튼의 글은 1831년 북경을 다녀온 홍석주에 의해 정약용에게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다.19)

 

요컨대 다산이 스탄튼의 글을 소장하게 된 것은, 천주교와의 관계보다는 1821년의 사례에서 보듯이 섭지선과 같은 중국의 지인을 통하거나, 국내 지인이 연행(燕行)할 때 구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다산이 새로운 의서에 관심을 보인 것은, 북학파인 박지원이 중국에서 중국과 서양의 새로운 의서를 구하려고 노력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20) 즉 당시 서양 의학에 대해서는 여러 실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21) 그러므로 서양 의학에 대한 다산의 관심을 반드시 천주교와의 관련 속에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 후기에 활동한 신자 의원들이 서양 의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22) 그런데 초기 교회의 신자 의약인들은 대체로 약국을 운영했다. 이들은 의술을 조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약을 팔며 진료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문적인 의원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이 약국을 운영한 것은 가난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러한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 《주제군징》과 같은 서학서를 읽고, 의학을 연구하면서 약국을 운영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들은 이원순의 견해처럼 정황상 전통적인 한방 의술로 병자를 치료하고 시약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23)

 

베르뇌(Siméon François Berneux, 張敬一, 1814~1866) 주교 때에 설치된 시약소도 서양식 의료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즉 “본 약국은 그 내용이 밝혀지지 아니하였으나, 종래의 한의법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서양의법에 속한 것임은 거의 틀림없을 사실이므로, 그 당시에 상당한 서양 의약품들의 수입을 보게 되었으리라고 믿어진다.”24)는 것이다.

 

그러나 시약소에서 서양 의법이 시행되었다는 근거는 없다. 단지 서양인인 프랑스 선교사가 설립한 의료 기관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추정한 것이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박해시대(1866년 이전)에는 시약소가 설치되지도 않았다.

 

결국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조선 후기 천주교의 의료 활동’에 대한 기존의 이해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이 주제는 앞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사항별로 깊이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박해시대 천주교회의 의료 활동 상황이 정확하게 기술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박해시기 천주교의 의료 활동에 대해 정리하고, 기존에 잘못 알려진 내용들을 바로잡고자 한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박해시대 신자 의약인들의 존재와 활동을 살펴보고, 3장에서는 시약소의 설치 문제를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4장에서는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질병과 치료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천주교와 서양 의학의 도입 문제를 간접적이나마 언급해 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정리한 내용들이 새로운 가톨릭 의료사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 조선 후기 신자들의 의료 활동

 

조선 후기 의약업에 종사했던 신자들을 정리해 보면 [표1] · [표2]와 같다.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18세기 후반 의약업에 종사한 신자는 14명이 찾아진다. 이 중 본인이 직접 약국을 운영한 사람은 10명(손경윤, 손경욱, 손인원, 손경무, 현계흠, 정인혁, 최필공, 최필제, 옥천희, 윤지헌26))이며, 의원 집안 출신이 3명(최창현, 김종교, 허속)이다. 그리고 이중배는 양반의 서자로 의술을 익힌 자였다.

 

14명 중 윤지헌은 양반이었고, 이중배는 양반의 서자였으며, 옥천희는 신분을 알 수 없다. 그리고 나머지 11명은 모두 의원 집안 출신이라는 점에서 중인 계층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약국을 경영하던 10명 중 7명은 혈연과 지인 관계로 얽혀 있었다. 즉 손경욱과 손경윤은 형제이며, 손경무는 이들의 사촌이다. 그리고 현계흠은 손경무의 장인이었다. 따라서 손경욱, 손경윤, 손경무, 현계흠은 같은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최필공과 최필제는 사촌 형제이며, 정인혁은 최필공의 5촌 고모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이 3명도 혈연관계에 있었다. 아울러 손경윤이 1790년에 최필공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것으로 보아, 최필공과 손경윤은 일찍부터 알던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당시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7명은 혈연과 지인 관계를 통해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의업이 가업으로 전해지고, 같은 직업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 교류가 있었으며, 그러한 관계가 전교로 이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표1]의 14명 중에 최창현은 한국 교회의 총회장이었다. 당시 부친인 최용운이 약국을 운영하였고, 최창현은 아버지의 약국 일을 도왔다고 한다. 최창현은 1784년 이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며, 1786년에는 평신도 신부로 활동했다. 그리고 1791년 이후에는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주문모 신부의 영입을 주도했다. 그 결과 1795년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그를 총회장에 임명하여 한국 교회의 일을 총괄하도록 했다.27)

 

최필공은 1790년에 입교했고, 1791년에 체포되었다. 당시 함께 체포된 동료들은 대부분 배교하고 석방되었지만, 최필공만은 신앙을 고수했다. 그러자 정조는 어떻게 해서든지 최필공을 배교시키고자 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런 다음 최필공을 평안도 심약(審藥)으로 임명하고 결혼까지 시켜주었다. 당시 정조가 최필공의 배교에 공을 들인 것은, 그만큼 최필공의 신앙이 강하고, 교회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필공과 같은 인물을 배교시키면, 신자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였다.28)

 

손경윤은 1790년에 최필공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큰 집을 매입한 후 바깥채는 술집으로 꾸미고, 안채는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삼아, 신자들이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틈틈이 교리서를 베껴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현계흠은 명도회의 회원이자, 그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의 책임자였다. 명도회는 주문모 신부가 조직한 평신도 단체로, 당시 한국 교회는 명도회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명도회는 하부 조직으로 여섯 곳의 모임[六會]이 있었는데, 그 모임은 황사영 집, 김여행 집, 홍필주 집, 홍익만 집, 이름을 알 수 없는 집, 그리고 현계흠 집에서 이루어졌다.29) 따라서 현계흠은 18세기 말 한국 교회의 핵심 인사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인원도 명도회의 회원이었다. 황사영에 따르면 손인원은 자신이 이끄는 육회 모임의 구성원이었다.30) 그리고 평안도 선천 출신인 옥천희는 교회의 밀사로 활약했다. 따라서 손인원과 옥천희도 당시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18세기 말 의약업에 종사하던 신자들은 총회장, 회장, 명도회 하부 조직 책임자, 명도회 회원, 교회 밀사 등으로 교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교리를 연구한 후 신자들에게 가르쳤고 신자들의 첨례 모임을 주관했으며,31) 외교인들을 교회로 이끄는 활동을 하거나, 북경 교회와의 연락을 맡음으로써 교회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한편 의약업에 종사하던 신자들의 구체적인 의료 활동에 대해서는 알기가 어렵다. 남아 있는 기록이 약국을 개설했다거나 매약(賣藥)했다는 정도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다만, 최필제와 이중배의 경우 단편적이지만 활동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다른 신자들의 의료 활동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최필제는 최필공의 사촌 동생이며, 1790년 최필공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는 약국을 운영했는데, 그가 파는 약은 값이 싸고 약재가 좋아 모두가 믿었다고 한다.32) 당시 약국에서는 약재의 품질을 속이는 사기가 성행하여 좋은 약재를 속지 않고 사는 일이 중요했다. 그리하여 정약용도 ‘소합원(蘇合元)33)과 같은 약재는 재료가 희귀하여 약국에서 만들어 주는 것은 대개 가짜이므로 집에서 직접 만드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34) 이러한 상황에서 최필제는 싼 값에 좋은 약을 팔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필제는 신자들에게만 약을 판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행동은 외교인들에게 좋은 표양으로 남아 선교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싼 값에 좋은 약을 파는 것은 최필제에 국한된 행동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중배의 치료 활동을 통해서도 당시 의원 신자들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중배는 여주 출신으로 1797년 김건순을 통해 입교하였다. 그리고 1800년 부활대축일 모임 이후에 체포되었다. 그는 여주 감옥에 6개월 넘게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때 병자들을 치료한 기록이 황사영의 〈백서〉에 남아 있다.

 

[자료1] 마르티노는 본래 의술을 조금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깊지는 못했는데, 옥에 갇힌 후에 혹 와서 병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그런 다음에 침을 놓고 약을 쓰니,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그의 명성이 크게 퍼져서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옥문 앞이 저자와 같았습니다…

 

김건순은 일찍이 말하기를, 남들이 혹 마르티노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물으면 자신의 이름이 남의 입에 너무 오르내릴까 하여 열에 여덟 아홉은 고친다고 대답하지만, 실상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효험을 보지 못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옥리가 의술의 비방서를 보자고 하였으나, 대답하기를 내게는 비방서가 없습니다. 다만 천주를 공경할 뿐이니, 당신도 의술을 배우고자 하거든 마땅히 주님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35)

 

[자료1]에 의하면, 이중배는 직업적인 의원이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의술을 공부하여 병자가 치료를 부탁하면 시료(施療)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효험을 보지 못한 이가 없다는 말에서, 이중배는 의술이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치료해 준 사람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중배의 의료 활동에서 주목되는 점이 있다. 치료하기 전에 천주의 도움을 먼저 구한 것(先求主佑)과 천주를 공경하는 것이 의술의 비방(我無方書 只是恭敬天主)이라고 말한 것이다. 즉 이중배는 신앙을 토대로 의술을 펼쳤고, 의술을 매개로 천주교를 전파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의학 지식을 활용하여, 육신의 병을 고칠 뿐만 아니라 외교인의 영혼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중배는 옥중에서도 늘 책을 베끼고 경문을 외웠고, 도리를 강론하며 남들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권하였다. 그 결과 옥졸 한 사람이 마음을 움직여 천주교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36)

 

기록상 18세기 말 의약업에 종사하는 신자들은 대부분 약국을 운영하였고, 치료하는 경우는 이중배의 기록이 유일하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약국을 운영한 신자들은 주로 약을 파는 약종상일 가능성이 컸다. 물론 의원이 약국을 개설하는 경우도 있었고,37) 약종상들도 약간의 의학 지식을 가지고 진료하는 경우가 많았다.38) 따라서 당시 약국을 운영하던 신자들이 의원이었는지 약종상이었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의원이든 약종상이든 환자를 진료하던 신자들은 이중배와 같은 마음과 자세로 병자들을 돌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 의약인들의 표양은 이 시기에 훌륭한 선교 방법의 하나로 기능했다고 생각한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18세기 말 의약업에 종사하던 신자들은 당시 교회를 이끈 지도급 신자였고, 신앙을 바탕으로 의료 활동을 펼친 의료 전도사였다고 할 수 있다.

 

 

 

[표2]는 19세기에 의약업에 종사했던 신자들의 명단이다.40) 16명 중 1839년에 순교한 권득인을 제외하면 나머지 15명은 모두 병인박해기의 신자들이다.

 

권득인은 형인 권 프란치스코와 함께 배오개 네거리에 약계를 차려 생활하였다.41)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논담배 장사도 하고, 주교가 나오신 후에는 주교 댁에서 심부름도 했으며, 고상과 성패를 만들어 생활했다.’42)는 증언으로 보아, 권득인은 전문적인 의료인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외 기해박해 때 순교한 신자 중에는 약국에서 일한 사람이 더러 있었다. 예를 들어 장성집 성인은 광흥창(廣興倉) 서원(書員) 출신으로 남의 약국에서 일한 적이 있으며,43) 박종원 성인도 한참 동안 약국의 거간으로 생활했다고 한다.44) 이것은 당시 사설 약국이 성행하던 상황에서,45) 신자들이 생계를 위해 약국에 취업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이 되면 이전 시기와는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이 시기 의약업에 종사하는 신자들은 대부분 직접 의술을 실시하는 의원들이었다. 특히 김 주부와 이신규는 내의원에 선발될 정도로 의술이 뛰어났다. 물론 이 시기에도 의원 신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주 노를리와 진산 진밭들 등지에 거주했고, 1866년 1월에 진잠 바랑골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이 바오로는 직업이 약장수였다.46)

 

둘째, 다수의 양반 출신이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표2]의 이의송, 김문원, 권복, 이신규는 신분이 양반이었다. 특히 권일신의 증손인 권복, 이승훈의 아들인 이신규처럼 초기 교회의 양반 신자 후손들이 의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아마도 이들은 천주교 때문에 집안이 몰락한 상황에서 생계를 위해 의업에 종사한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 몰락 양반들은 대부분 훈장과 의원으로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47)

 

셋째, 여성 의원의 존재도 주목된다. 이 사람은 의녀 출신48)으로 추정되며, 침을 통해 여자 신자들을 치료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19세기의 의원 신자들도 18세기 후반과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자익은 병인박해 당시 리델(Ridel)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키는 일에 관여하였고, 김여강과 최 베드로는 회장직을 수행했다. 그리고 신여석은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였다. 이외 구체적인 교회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도, 지역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원 신자들은 전교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황해도 출신의 이의송은 이덕보와 함께 황해도 전 지역을 순회 전교하였고,49) 평안도 의원인 전 주부는 장연읍에서 약국을 경영하며 교우들과 교류하고 외교인들을 권화(勸化)하였다.50) 그리고 김진은 재상집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권면하기도 했다.51)

 

19세기에도 신자들의 의료 활동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남아 있는 것도 ‘의술로 생계를 삼았다.’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도 신자 의원들이 어떻게 의술을 펼쳤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이치영과 최 베드로를 통해, 당시 의원 신자들의 활동의 일단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치영은 경기도 광주에 살던 사람으로 의술이 있었다. 그는 1845년경에 김석조가 사는 양구에 가서 머물렀다. 그러면서 병이 든 김석조의 부인을 치료해 주었고, 그 인연으로 김석조에게 전교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다.52) 홍주에서 체포된 최 베드로 회장도 의술에 박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의술을 통해 외인 영해에게 위험 대세를 많이 주었고, 외교인 부녀들을 권화했다고 한다.53)

 

이치영과 최 베드로가 전문적인 의원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의술을 전교에 활용하고 있었다. 즉 의술로서 육신의 병을 치료해 주고, 이어 천주교를 전함으로써 구령(救靈)을 시도하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외 다른 의원 신자들도 이런 방식으로 병자들을 치료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즉 황해도를 순회 전교했던 이의송은 의술을 바탕으로 전교 여행을 했을 것이고, 전 주부가 장연에서 많은 새 교우들을 권화한 것도, 약국을 매개로 치료와 전교를 병행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부의 복사였던 신여석이 의술에 밝았다는 것은, 그의 활동에 의술이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김진이 ‘재상가를 권면했다.’는 것은, 재상 집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 그것을 매개로 천주교를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 말과 마찬가지로 19세기의 의원 신자들도 교회를 이끈 지도자였고, 신앙을 매개로 의술을 펼친 의료 전도사였다. 특히 이들이 대부분 순교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이들의 의술이 신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3. 시약소의 설립 문제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다음과 같이 시약소의 설립 사실을 수록하고 있다. “중요한 도시의 하나에 세운 시약소 덕택으로 저희는 더 많은 수의 우상숭배자 자녀들에게 임종 때에 세례를 줄 수 있게 되어 그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54)

 

이것은 베르뇌 주교가 포교성성 장관에게 쓴 1859년 11월 7일 자서한 내용이며, 이를 통해 조선 대목구에는 1859년에 시약소가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약소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식 시료 사업이 시작된 곳으로 평가되어 왔다.55)

 

한편 시약소의 설립 시기에 대해, 기존에는 대부분 1857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857년은 연구자들이 1859년 11월 7일 자 서한을 1857년 11월 7일 자 서한으로 착각한 결과였다.56) 이것은 1857년이라고 쓴 논문에서 인용한 서한 내용이 1859년의 서한 내용과 같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약소의 설립 시기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달레 신부가 인용한 베르뇌 주교의 1859년 11월 7일 자 서한 내용이, 하루 전인 11월 6일 자 서한과 하루 뒤인 11월 8일 자 서한 내용과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료2] (베르뇌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59년 11월 6일 자 서한) : 꽤 규모가 큰 도시에서 신자 몇 명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올 겨울 그곳에 시약소 하나를 개설해서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사용하려고 합니다.57)

 

[자료3] (베르뇌 주교가 성영회 회장 르바쇠(Levasseur) 신부에게 보낸 1859년 11월 8일 자 서한) : 이 잔액 중 일부는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한 시약소 설립 비용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시약소 설립을 맡고 있는 제 부주교인 아콘의 주교의 편지들이 아직 제게 오지 않았으니 이에 대한 보고는 내년에 하겠습니다.58)

 

[자료2](11월 6일 자 서한)와 [자료3](11월 8일 자 서한)에 따르면, 시약소는 1859년 겨울에 세울 계획이었고, 다블뤼(Daveluy) 주교의 책임 아래 진행 중에 있었다. 그런데 달레 신부가 인용한 11월 7일 자 서한에는 시약소가 이미 설립되었다고 하였고, 연구자들도 이 서한을 근거로 1859년에 시약소가 설립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시약소는 1859년에 설립되지 않았다.

 

[자료4] (베르뇌 주교가 성영회 회장에게 보낸 1861년 9월 29일 자 서한) : 박해 때문에 아직 시약소나 고아원이나 학교를 단 한 곳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건물은 우리가 신자임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이틀도 존속하지 못할 것입니다.59)

 

[자료5] (베르뇌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 장상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62년 11월 18일 자 서한) : 우리 처지에서는 성영회 사업을 더 이상 확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우리가 위험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받은 보조금으로 당분간은 충분하니 더 이상 참사회에 요청할 것은 없습니다. 저는 시약소를 하나 세워보려 합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해 말씀드리기에 앞서 저는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갖고자 하고, 뒤따를 경비에 대한 보다 명확한 정보를 얻고자 합니다.60)

 

[자료6] (베르뇌 주교가 성영회 회장에게 보낸 1864년 11월 15일 자 서한) : 1863년 6월 1일부터 1864년 5월까지의 사업 현황−우리는 고아원도 학교도 시약소도 기부금도 없습니다.61)

 

[자료4]는 1861년 9월까지의 성과를 성영회에 보고한 서한인데, ‘박해 때문에 아직 시약소를 세우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다. 박해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선교사와 신자들을 위험에 빠트릴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천주교회사》에 소개된 1859년 11월 7일 자 서한 내용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시약소를 언급한 다른 자료들과 비교해 볼 때, 그 내용은 번역상의 오류라고 생각한다. 즉 11월 7일 자 서한만 본다면, ‘Une pharmacie établie dans une des principales villes’는 ‘중요한 도시의 하나에 세운 시약소 덕택으로’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자료와 비교해서 이 문장을 보면, ‘중요한 도시 중 한 곳에 시약소가 세워지면’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62) 관련 자료들이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범할 수밖에 없었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박해 때문에 시약소의 설치가 어려웠지만, 베르뇌 주교는 시약소의 설립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862년 11월에 작성한 보고서 [자료5]에서 다시 한 번 시약소의 설립을 거론하였다. 그러나 [자료6]에서 알 수 있듯이, 1864년 5월 현재 조선에는 시약소가 없었다. 1862년의 계획도 주교의 바람으로만 끝이 났던 것이다. 그 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베르뇌 주교의 의료 기관 설립 계획은 1886년에 자신의 후배 교구장에 의해 실현될 수밖에 없었다.63)

 

한편 시약소를 설립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인 사제들도 조선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리하여 김대건 신부는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45년 3월 27일 자 서한에서,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즉 천연두)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방법(Modum)을 저에게 명확히 적어 보내 주시기를 청합니다.”64)라고 하였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50년 10월 1일 자 서한에서, “비위생적인 물을 개량할 처방(remedium)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질병이 물의 비위생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니 물을 정화하는 방법을 아시면 분명하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65)라고 하였다.

 

베르뇌 주교가 시약소를 계속 설립하려고 한 것이나,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천연두를 퇴치하는 방법과 물의 정화법을 알고자 한 것은, 병으로 고통 받는 조선인들을 치유하고자 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프랑스 선교사들의 질병과 치료

 

조선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것은 1831년 조선 대목구가 설정된 이후이다. 최초의 입국자는 1836년에 입국한 모방(Maubant) 신부였으며, 이후 1866년까지 20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입국하여 활동하였다.

 

 

 

20명 가운데 12명은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고, 5명은 병사했으며, 나머지 3명은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병사한 5명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대부분 낯선 환경과 격무 때문에 병을 얻거나, 지병이 악화되어 고생하였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자신의 병을 어떤 방식으로 치료했을까?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와 4~5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활동한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서한을 통해, 당시 선교사들의 질병과 치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1853년 2월에 사망한 페레올(Ferréol) 주교의 병과 치료에 대해, 다블뤼 신부는 1852년 10월 18일 자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료7] 페레올 주교님의 병세가 위중하다고 알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병일까요? 그 병은 위의 아래 부분과 심장 부위 쪽에 자리 잡은 일종의 농양(膿瘍) 같은 것으로, 매우 크고 단단합니다. 그것 때문에 계속해서 고통스럽게 토하시는 것 같고, 전혀 드실 수가 없어 지쳐 계시니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명성이 자자하고, 외교인들도 진료를 하고 있는 교우 의사들(les médecins chrétiens)을 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약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온갖 처방을 해보았지만 병세는 차도가 없고, 구토도 주기적으로 하시는데, 여전히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69)

 

[자료7]에 의하면 페레올 주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취한 조치는 교우 의사들을 불러 진료하고 약을 쓰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의 의사는 한의약을 익힌 사람이고, 약 처방도 조선인들에게 쓰는 약이었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조선의 의술로 치료받은 사실은 다블뤼 신부에게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블뤼 신부는 1847년 봄에 기력이 떨어져 고개를 가누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러자 교우들은 날씨가 더워질 즈음, 기력을 보강하고 병을 예방할 겸 인삼과 녹용이 들어간 약을 지어 먹게 했다. 그러나 인삼에 대한 부작용으로 몸이 불덩이가 되어 열까지 나고 음식도 소화시키기 곤란한 지경이 되자, 의원을 불러 치료하였다.

 

[자료8] 한 노인이 도착했는데,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의원들 중 한 사람인 그는 근엄하고 학자연하는 태도로 딱한 환자를 떨게 했을 게 틀림없어. 민간요법 약제가 부족하지는 않았지. 더 할 수없이 쓰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약한 맛을 내는 모든 약제를 나를 위해 한데 모아놓았으니까. 그것을 다 마셔야 했어. 그리고 사람들이 뭔지 모르는 역겨운 반죽으로 내 얼굴과 두 팔에 펴 바르는 거야. 정말이지, 나는 멀리서라도 그렇게 더러운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어. 어찌 되었든 칭찬은 돌팔이 의원들에게 돌아갔지. 그 약제가 효과가 있었는지 몸속의 열이 내렸고, 차츰 본래의 내 상태로 돌려놓았어. … 나는 돈 주고 병을 얻어서 돈 주고 그 병을 고친 거잖아. 더군다나 고치는 데 든 비용보다 병을 얻는 데 쓴 비용이 두 배나 더 들었거든.70)

 

다블뤼 신부는 조선인 의사를 과학적 의학을 무시하고 경험만으로 치료하는 돌팔이라고 폄하했다. 그러나 조선인 의사의 치료를 받고 나았다.

 

[자료9] 1월에 멀리 있는 교우촌들을 사목 순방하기 위해 출발하기로 정한 날 바로 전날에 병이 났어요. 며칠 지나지 않아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교우인 의사가 즉시 달려와 저를 간호했는데, 그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밤낮으로 제 곁을 지켜주었어요. … 증세에 맞춰 저에게 제공된 독한 그로그주(grogue)71) 덕분에 저는 위기를 벗어났으나 회복될 때까지는 두 달여간의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72)

 

[자료10] 주교님의 죽음에 극도로 상심했던 것이 저의 병을 도지게 했다고 의원은 말합니다. 저는 다시 병이 나서 앓았는데요, 너무나 헌신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저의 건강 상태를 꾸준히 살펴주는 착한 노 의원의 의술과, 비록 과학적 의학을 무시하고 경험에만 의존하는 의술이기는 하지만요, 그의 정성 덕분에 병이 길게 가지는 않고 후유증도 없으리라 생각됩니다.73)

 

[자료9]와 [자료10]은 1850년과 1853년에 다블뤼 신부가 부모에게 보낸 서한이다. 이때에도 다블뤼 신부는 발병했을 때 조선인 의사의 경험에 의존하는 의술과 탕약 덕분에 회복될 수 있었다.

 

1856년에 입국한 베르뇌 주교도 입국하기 전부터 여러 가지 병을 앓고 있었다.

 

[자료11] 주교님께서 친절히 보내주신 1858년 12월 21일 자 서한과 아편 정기, 그리고 중탄산소다를 지난 1월 15일에 받았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 제 건강에 신경 써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저는 주교님께서 주신 약을 썼고,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제가 이전에 느끼곤 했던 신장 통증에서 저를 거의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아직 위장을 치료하는 일이 남았는데, 우리의 오랜 친구인 비신자 의원 이씨의 말에 따르면 그것 때문에 계속 등쪽이 아픈 것이라고 합니다. 차쿠에서 아팠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로 인해 극도의 쇠약함과 지속적인 불면증이 생겼는데 특히 여름에 더 심합니다. 이 때문에 머리가 텅 비어 두 가지 생각을 하나로 엮을 수가 없습니다.74)

 

[자료11]에 따르면 베르뇌 주교는 자신의 병에 대해 오래 전부터 비신자인 조선인 의원과 의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선교사들은 여러 가지 병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치료는 대체로 조선인 의사와 한약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서양 의술과 서양 약품을 들여와 조선인들의 치료에 사용했을 것이라는 설은 성립하기 어렵다.

 

물론 선교사들을 통해 외국에서 몇 가지 치료제가 조선에 도입되기도 했다. 만주대목구의 베롤(Verolles) 주교는 신장 통증과 위장병을 앓던 베르뇌 주교에게 아편정기와 중탄산소다를 보내주었고[자료11],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알브랑 장상 신부에게 구충제 세멘시나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75) 세멘시나는 자신이 써본 구충제 중에 제일 효과가 좋으며, 회충으로 자주 고충을 겪는 선교사들에게 아주 훌륭한 치료약이라고 평가하였다. 회충제는 1863년 9월에 병사한 랑드르(Landre) 신부도 요청한 바 있다.

 

따라서 베르뇌 주교의 병세를 알고 베롤 주교가 보내준 아편정기와 중탄산소다, 랑드르 신부가 요청한 황산아연을 제외하면, 당시 조선의 선교사들이 외국에서 들여온 약은 구충제가 전부였다.76)

 

한편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1856년에 입국한 프티니콜라(Petitnicolas) 신부가 ‘약간의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게 치료를 받은 많은 신자가 그가 준 약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기록이 있다.77) 그리고 데지레(Désiré) 신부가 쓴 그의 전기에도, ‘그는 의학 지식이 매우 해박하였기에 이따금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위로도 주었다.’, ‘(배론에서) 병자에게 성사를 주러가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의학 지식을 활용하여 치료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78)는 내용이 있다. 프티니콜라 신부가 신자들에게 어떤 치료를 하고, 어떤 약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프티니콜라 신부의 사례는 일상적인 활동이라기보다는, 간헐적으로 또는 병자성사 때 자신이 알고 있는 의약 상식을 말해준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프티니콜라 신부도 자신의 병에 대해서는 조선 의원과 약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프티니콜라 신부는 사목 활동 중에 병을 얻었고, 그 때문에 1862년 9월에는 배론 신학교로 전임되었다. 프티니콜라 신부는 배론에서 불면증과 두통을 심하게 앓았는데, 고통을 덜 방법이 달리 없을 때는 오른손 검지 끝을 찔러 피를 내는 조선의 의료법에 의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평소 조선의 침술사들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한약에는 유럽에서도 알려진 치료제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약 처방은 좋아했다고 한다.79)

 

프티니콜라 신부의 의학 지식과 관련해서 리델 신부의 사례가 주목된다. 리델 신부는 ‘화주(火酒)를 만들어 복통 약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회충으로 고생하는 여아(女兒)에게 베르뇌 주교로부터 받은 구충제를 먹여 낫게 했으며, 독사에게 물린 아이의 상처에 물로 희석한 브랜디를 발라 낫게 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조선인들은 감탄해 마지않았고, 그러면서 아픈 곳이 있으면 신부를 찾아와 치료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델 신부는 ‘나는 의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들에게 약을 줄 수 없고, 만일 준다면 오히려 당신들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었다.80)

 

이것으로 보아 프티니콜라 신부의 의학 지식도 소독 등 리델 신부가 알고 있던 정도의 의학 상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박해시기 선교사들의 의료 활동과 관련해서, 1822년에 출판된 사천 시노드의 교령 안에 중요한 지침이 있다. 사천 시노드는 1803년에 개최되었고, 시노드 교령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1841년 11월 30일 자 서한을 통해 조선 대목구의 모든 사제들도 준수해야만 했다.81) 그런데 그 교령의 제10장 20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자료12] 참으로 긴급하고 중대하게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명목으로도 어떤 식으로도 의학을 익히지 말아야 한다. 사실 그것은 교회법으로 자주 엄중하게 금지된 것이다. 또한 어떤 환자의 동맥의 맥박을 측정하거나 살피지 말아야 한다. 한편 만일 누가 그의 병세를 알고 죽음의 위험을 살핀다는 명목과 핑계로 여자의 맥박을 잡았다면, 다양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유혹한 자나 강요한 자로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82)

 

이와 비슷한 내용이 1884년에 개최된 조선 대목구의 시노드 이후 1887년에 간행된 《조선교회 관례집》에 수록되어 있다.

 

[자료13] 선교사들은 육체의 병을 치료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유럽의 약은 위험한 것이 아니고, 또 선교사가 이러 저러한 병에 정확하게 사용할 줄 아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83)

 

《조선교회 관례집》에 위와 같은 내용이 수록되었다는 것은,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의료 활동을 금지하는’ 사천 시노드 교령 10장 20항의 내용이 박해시대 조선 대목구에서 지켜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지침을 통해 선교사들의 의료 활동과 약을 나누어 주는 행동이 제한되었고,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의약품도 구충제 정도였다는 점, 그리고 조선인 의사와 약제로 선교사들의 병을 치료했다는 사실에서, 비록 구충제가 일부 신자들에게 나누어졌지만, ‘박해시기에 서양의 의술과 의약품이 천주교를 통해 조선에 도입되어 조선인들을 위해 쓰였을 것’이라는 설은 성립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5. 맺음말

 

이상에서 조선 후기 천주교회의 의료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조선 후기 의약업에 종사하던 신자 30명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신자들을 가르치고, 신자들의 모임을 주관했으며, 전교 활동을 펼치고 북경 교회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등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둘째, 최필제, 이중배, 이치영, 최 베드로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 의약인들은 신앙과 의료를 접목시켰다. 이들은 신앙을 바탕으로 의료 활동을 전개했고, 의술을 매개로 전교 활동을 펼친 의료 전도사였다.

 

셋째, 조선 천주교회는 1857년에 시약소를 설립하여 서양 의약품을 나누어 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1857년은 1859년의 오류라는 점과 시약소는 조선에 설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천주교회는 1859년과 1862년에 두 차례에 걸쳐 시약소를 설립하고자 했으나 박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넷째, 조선 후기 ‘서양 의학의 도입’은 조선 천주교회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았다. 박해시대 선교사들은 서양의 의술이나 약보다는 오히려 조선인 의사와 한약을 통해 자신의 병을 치료하였다. 아울러 당시 교회의 규정도 선교사들의 의료 활동을 제한하였고, 외국에서 도입한 서양 의약품은 구충제 정도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조선 후기 천주교회의 의료 활동은 ‘서양 의약의 도입’이라는 틀 속에서 이해되고, 또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앞으로 조선 후기 천주교회의 의료사 연구는, 이러한 선입견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교회 구성원들의 구체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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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석우, 〈한국 가톨릭과 의료사업의 전개〉,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2) 박태봉, 〈한국 천주교회와 의료사업의 전개과정〉, 《한국 천주교회 창립 이백주년 기념 : 한국교회사 논문집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3) 조규상, 〈한국 가톨릭 교회의 의료 활동〉, 《한국 가톨릭 문화활동과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 맹광호, 〈가톨릭 의료 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4) 김두종, 《한국의학사》, 탐구당, 1966, 360~369쪽.

 

5) 여인석, 《주제군징(主制群徵)》에 나타난 서양의학 이론과 중국과 조선에서의 수용 양상〉, 《의사학》 제21권 제2호(통권 제41호), 대한의사학회, 2012. 8, 273쪽.

 

6) 신동원, 〈한국 우두법의 정치학〉, 《한국과학사학회지》 제22권 제2호, 2000, 153쪽 ; 여인석 · 이현숙 · 김성수 · 신규환 · 박윤형 · 박윤재 지음, 《한국의학사》,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2012, 192~193쪽.

 

7) “歲憲廟乙未 聞中土復出一種奇方 丁茶山鏞藏之云(人事篇, 技藝類, 醫藥 〈種痘辨證說〉).”

 

8) 다산은 《마과회통》을 편찬한 이후에도 새로운 자료들을 증보해 갔는데, 그 결과 1828년의 스탄튼의 글이 《마과회통》의 말미에 덧붙여질 수 있었다(신동원, 〈유의의 길 :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 《다산학》 10, 다산학술문화재단, 2007, 176 · 204쪽).

 

9)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17쪽, 185~186쪽.

 

10) 정약용이 1791년 이후 신자가 아니었다는 주장은, 김상홍, 〈茶山의 天主敎 信奉論에 대한 反論〉, 《東洋學》 20집,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0 참조.

 

11) 김두종, 《한국의학사》, 366쪽 ; 권복규 · 황상익 · 지제근, 〈정약용의 우두법 도입에 미친 천주교 세력의 영향 : 하나의 가설〉(《의사학》 제6권 제1호(통권 제10호), 대한의사학회, 1997)도 천주교 측의 기록을 토대로 정약용이 천주교 세력을 통해 우두법을 입수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12) 신동원, 〈유의의 길 :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 204쪽 ; 여인석 · 이현숙 · 김성수 · 신규환 · 박윤형 · 박윤재 지음, 《한국의학사》, 193쪽.

 

13) 김두종, 《한국의학사》, 365쪽.

 

14) 정약용은 1799년에 종두법(인두법)에 대한 글을 보았고, 1800년에는 박제가와 함께 인두법의 시행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신동원, 〈유의의 길 :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 186~188쪽).

 

15) 신동원, 〈유의의 길 :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 203쪽 ; 다산연구회 역주, 《역주 목민심서 Ⅱ》, 창작과비평사, 1988(5판), 53~54쪽.

 

16) 박향란, 〈葉志詵과 19세기 초 한중 문인의 교유〉, 《국문학연구》 33, 국문학회, 2016, 161~163쪽.

 

17) 章原, 〈清代学者叶志诜及 《汉阳叶氏医学丛刻》 绍述〉, 《中医文献杂志》, 2014年 4期, 50쪽.

 

18) 김문식, 〈尙書 연구서를 중심으로 본 丁若鏞과 洪奭周의 政治思想 비교〉, 《한국사론》 20, 서울대 국사학과, 1988, 357쪽.

 

19) 권복규 · 황상익 · 지제근, 〈정약용의 우두법 도입에 미친 천주교 세력의 영향 : 하나의 가설〉, 52쪽.

 

20) 김대원, 〈18세기 민간의료의 성장〉, 《한국사론》 39, 서울대 국사학과, 1998, 234쪽.

 

21) 의학에 관심을 둔 실학자에 대해서는, 신동원, 〈조선후기의 의학과 실학〉, 《韓國實學思想硏究 4》,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5, 502~512쪽, 514~516쪽 참조.

 

22) 박태봉, 〈한국 천주교회와 의료사업의 전개과정〉, 854쪽.

 

23) 이원순, 〈초창기 천주교회의 의료활동〉, 《가톨릭중앙의료원 50년사》, 가톨릭중앙의료원, 1988, 32~33쪽.

 

24) 김두종, 《한국의학사》, 368쪽.

 

25) 이 [표]는 《사학징의》, <백서>(황사영), 《벽위편》(이기경) 등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이중 시복(諡福)된 인물들에 대한 자료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간행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시복자료집 1~4집, 2005~2007)에 수록되어 있다.

 

26) 윤지헌은 ‘약을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賣藥爲業).’고 했는데, 약국을 개설한 것으로 추정된다(《사학징의》,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16쪽). 윤지헌에 대해서는, 최근에 의원으로서의 윤지헌을 주목한 연구가 발표되었다(김수태, 〈윤지헌의 천주교 신앙과 순교〉, 《진산지역 윤지충 가문의 천주교 수용과 순교》, 제2회 진산성지 교회사 학술발표회 발표문, 2017. 11. 4).

 

27) 최창현에 대해서는, 방상근, 〈최창현의 삶과 신앙〉, 《교회사학》 10, 수원교회사연구소, 2013 참조.

 

28) 금경숙, 〈최필공의 생애와 신앙활동〉, 《한국근현대사와 종교문화》, 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2003, 89~95쪽.

 

29) 방상근, 〈초기 교회에 있어서 명도회의 구성과 성격〉, 《교회사연구》 11,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219쪽.

 

30) 방상근, 〈초기 교회에 있어서 명도회의 구성과 성격〉, 219쪽.

 

31) 신자들의 약국은 전교 장소 또는 신자들의 모임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최필제는 길가에 약국을 차려놓고, 한편으로는 약을 팔면서 안쪽 방에서는 신자들과 함께 신앙모임을 가졌다. 그러다가 주님봉헌축일에 자신의 약국에서 첨례를 보다가 발각된 후 체포되었다(〈백서〉 22~23행).

 

32) “家貧親老 賣藥爲生 價廉而材精 人皆信之(〈백서〉 52행)”; “托名藥局 聚會去來之妖人 隱然爲邪學之淵藪 厥惟久矣(《사학징의》, 75쪽).”

 

33) 토사곽란에 처방하는 약.

 

34) 김호, 〈18세기 후반 居京 士族의 衛生과 의료〉, 《서울학연구》 Ⅺ, 서울학연구소, 1998, 122·131·134쪽.

 

35) “瑪爾定本來畧知醫術 而不甚精工 入獄後 或有問疾者 則先求主佑 後施鍼藥 莫不痊愈 從此聲名大播 遠近輻輳 獄門如市 … 金健淳嘗言 人或問瑪爾定療病之能 俱名稱之太藉 答以爲十之八九 然其實十之十 百之百 無一不效 獄吏求見醫方 答曰我無方書 只是恭敬天主 汝欲學醫亦當信主(〈백서〉 9~10행).”

 

36) “獄中常鈔書念經 講道勸人 獄卒一人 動心信從 亦爲熱心之人(〈백서〉 11행).”

 

37) 신동원, 〈조선후기 의약생활의 변화 : 선물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역사비평》 75호, 역사문제연구소, 2006, 388쪽 ; 신동원, 〈조선후기 의원의 존재 양태〉, 《한국과학사학회지》 제26권 제2호, 2004, 198쪽.

 

38) 신동원, 〈조선후기 의원의 존재 양태〉, 223쪽.

 

39) 이 [표]는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치명일기》, 《병인치명사적》, 《포도청등록》 등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40) 신자 의원으로 김동익(1868. 5. 8 신문, 배교)과 조학문(1870. 3. 4 신문, 배교)도 《포도청 등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신자 의원으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41)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천주교 수원교구, 2011, 625쪽.

 

42)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천주교 수원교구, 2012, 435~437쪽.

 

43)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73쪽.

 

44)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473쪽.

 

45) 김호, 〈18세기 후반 居京 士族의 衛生과 의료〉, 119~121쪽.

 

46) 《병인치명사적》 21권, 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6 · 122쪽.

 

47) 신동원, 〈조선후기 의원의 존재 양태〉, 214쪽.

 

48) 의녀에 대해서는, 신동원, 〈조선후기 의원의 존재 양태〉, 218~219쪽 참조.

 

49)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411쪽.

 

50) 《병인치명사적》 21권, 131쪽.

 

51) 《병인치명사적》 9권, 7쪽.

 

52) 《포도청등록》 하, 보경문화사(영인), 1985, 549쪽.

 

53) 《병인치명사적》 3권, 7~8쪽.

 

54) “Une pharmacie établie dans une des principales villes, nous procurera, je l’espère, les moyens d’ouvrir le Ciel à un plus grand nombre d’enfants d’idolâtres, auxquels nous pourrons conférer le baptême à l’article de la mort(Ch. Dallet, 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tome seconde, Paris victor palmé, 1874, p. 452 ; 《한국천주교회사》 하, 296쪽).”

 

55) 이원순, 〈초창기 천주교회의 의료활동〉, 32쪽.

 

56) 최석우 몬시뇰이 1982년의 논문에서 연도를 착각하면서, 이 논문을 인용한 후속 글들도 잘못을 답습하게 되었다. 다만, 유홍렬 선생의 《한국천주교회사(상)》(가톨릭출판사, 1962)을 인용한 김두종 선생의 《한국의학사》에는 1859년으로 되어 있다.

 

57) “Dans une ville très considérable où nous commençons à avoir quelques chrétiens, nous allons établir cet hyver une pharmacie qui en baptisant les enfants, travaillera à la conversion des payens(《베르뇌 주교 서한집》 上,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731쪽).”

 

58) “Une partie de cette somme qui reste a dû être employée pour l’établissement d’une Pharmacie destinée au baptême des enfants. Les lettres de Mgr d’Acônes, mon Coadjuteur, chargé de former cet établissement, ne m’étant pas parvenue, j’en rendrai compte l’an prochain(《베르뇌 주교 서한집》 下,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43쪽).”

 

59) “Je n’ai pu réussir encore, à cause de la persécution, à établir, une seule pharmacie, aucun orphelinat, ni école. Une maison de ce genre nous ferait connaître pour chrétiens, et ne subsisterait pas deux jours(《베르뇌 주교 서한집》 下, 217쪽).”

 

60) “Dans notre position nous ne pouvons pas donner plus d’extension à l’œuvre de la Ste Enfance, sans nous compromettre, et l’argent qui nous a été alloué jusqu’ici suffisant pour le moment, je n’ai rien de plus à demander au Conseil de l’œuvre. Je vais tenter d’une pharmacie mais avant d’en parler, je veux être plus assuré du succès et avoir des données moins vagues sur les dépenses qu’elle entrainera(《베르뇌 주교 서한집》 下, 299~301쪽).”

 

61) “Nous n’avons ni orphelinat ni écoles, ni pharmacies, ni offrandes(《베르뇌 주교 서한집》 下, 593쪽).”

 

62)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2018년에 간행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下, 31쪽)에도 이 부분이 “주요한 도시 중 한 곳에 시약소가 세워지면”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63) 블랑 주교는 1886년부터 양로원 병원(hôpital asile 혹은 hospice-hôpital)을 운영하였다.

 

64)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169쪽.

 

65) 청주교구 배티성지 · 양업교회사연구소 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천주교 청주교구, 2009, 82쪽.

 

66) laudanum. 아편을 알코올로 삼출한 약제로, 진통제로 사용한 듯하다.

 

67) bicarbonate de soude. 약한 염기성을 띠는 흰색 결정 물체로 제산제라는 점에서 위통에 사용한 듯하다.

 

68) 세정제, 안과제, 양치제 등으로 사용되는 약품이라는 점에서, 개인 위생을 위해 요청한 것으로 생각된다.

 

69) 다블뤼 신부가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52년 10월 18일 자 서한.

 

70) 1848년 8월 다블뤼 주교가 형제들에게 보낸 서한(유소연 옮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8, 92쪽).

 

71) 그로그주는 럼주에 물을 탄 것인데, 다블뤼 신부는 탕약을 말하려고 한 것 같다.

 

72) 유소연 옮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151~152쪽.

 

73) 유소연 옮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186쪽.

 

74) 베르뇌 주교가 베롤 주교(만주대목구장)에게 보낸 1859년 8월 2일 자 서한(《베르뇌 주교 서한집》 上, 677쪽).

 

75) 베르뇌 주교의 1861년 9월 4일 자 서한(《베르뇌 주교 서한집》 下, 201~202쪽).

 

76) 회충 등 기생충 감염은 조선시대 최다의 질환이었다. 그러나 기생충의 감염 경로라든지 기제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치료약이 개발되기 어려웠다(김호, 〈18세기 후반 居京 士族의 衛生과 의료〉, 139쪽). 이러한 상황이었지만, 베르뇌 주교의 서한에는 신자들에게 구충제를 나눠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랑드르 신부가 다량의 회충약을 요청하였다는 사실에서, 기생충 때문에 고통을 받는 주변의 신자들에게는 구충제를 나누어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리델 신부는 유충 때문에 고생하는 14세짜리 여아에게 베르뇌 주교로부터 받은 구충제를 복용시켜 병을 낫게 하였다(《리델문서Ⅰ》,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65쪽).

 

77) 《한국천주교회사》 하, 416~417쪽.

 

78) 데지레 신부 지음, 연숙진 옮김, 《미셸 알렉산드르 프티니콜라 신부의 생애》, 배론성지 문화영성연구소, 2012, 199 · 283쪽.

 

79) 《미셸 알렉산드르 프티니콜라 신부의 생애》, 284쪽.

 

80) 《리델문서Ⅰ》, 65~66쪽.

 

81) 한윤식, 〈해제〉, 《쓰촨 대목구 시노드》(장신호 옮김),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10~16쪽.

 

82) 《쓰촨 대목구 시노드》, 164쪽.

 

83) 한윤식 · 박신영 옮김, 《조선교회 관례집》, 부산교회사연구소, 2013, 63~64쪽. 

 

 

참고문헌


1. 자료

 

〈백서〉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1~2), 천주교 수원교구, 2011~2012.

 

《리델문서Ⅰ》,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베르뇌 주교 서한집》 上 · 下,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병인치명사적》, 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사학징의》,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포도청등록》 하, 보경문화사(영인), 1985.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시복자료집 1~4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05~2007.

 

데지레 신부 지음, 연숙진 옮김, 《미셸 알렉산드르 프티니콜라 신부의 생애》, 배론성지 문화영성연구소, 2012.

 

유소연 옮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8.

 

장신호 옮김, 《쓰촨 대목구 시노드》,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청주교구 배티성지 · 양업교회사연구소 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천주교 청주교구, 2009.

 

한윤식 · 박신영 옮김, 《조선교회 관례집》, 부산교회사연구소, 2013.

 

2. 저서

 

김두종, 《한국의학사》, 탐구당, 1966.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 ·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여인석 · 이현숙 · 김성수 · 신규환 · 박윤형 · 박윤재 지음, 《한국의학사》,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2012.

 

3. 논문

 

권복규 · 황상익 · 지제근, 〈정약용의 우두법 도입에 미친 천주교 세력의 영향 : 하나의 가설〉, 《의사학》 제6권 제1호(통권 제10호), 대한의사학회, 1997.

 

금경숙, 〈최필공의 생애와 신앙활동〉, 《한국근현대사와 종교문화》, 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2003.

 

김대원, 〈18세기 민간의료의 성장〉, 《한국사론》 39, 서울대 국사학과, 1998.

 

김문식, 〈尙書 연구서를 중심으로 본 丁若鏞과 洪奭周의 政治思想 비교〉, 《한국사론》 20, 서울대 국사학과, 1988.

 

김상홍, 〈茶山의 天主敎 信奉論에 대한 反論〉, 《東洋學》 20집,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0.

 

김수태, 〈윤지헌의 천주교 신앙과 순교〉, 《진산지역 윤지충 가문의 천주교 수용과 순교》, 제2회 진산성지 교회사 학술발표회 발표문, 2017. 11. 4.

 

김호, 〈18세기 후반 居京 士族의 衛生과 의료〉, 《서울학연구》 Ⅺ, 서울학연구소, 1998.

 

박태봉, 〈한국 천주교회와 의료사업의 전개과정〉, 《한국천주교회 창립 이백주년기념 : 한국교회사 논문집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박향란, 〈葉志詵과 19세기 초 한중 문인의 교유〉, 《국문학연구》 33, 국문학회, 2016.

 

방상근, 〈초기 교회에 있어서 명도회의 구성과 성격〉, 《교회사연구》 11,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 〈최창현의 삶과 신앙〉, 《교회사학》 10, 수원교회사연구소, 2013.

 

신동원, 〈한국 우두법의 정치학〉, 《한국과학사학회지》 제22권 제2호, 2000.

 

———, 〈조선후기 의원의 존재 양태〉, 《한국과학사학회지》 제26권 제2호, 2004.

 

———, 〈조선후기의 의학과 실학〉, 《韓國實學思想硏究 4》,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5.

 

———, 〈조선후기 의약생활의 변화 : 선물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역사비평》 75호, 역사문제연구소, 2006.

 

———, 〈유의의 길 :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 《다산학》 10, 다산학술문화재단, 2007.

 

여인석, 〈《주제군징(主制群徵)》에 나타난 서양의학 이론과 중국과 조선에서의 수용 양상〉, 《의사학》 제21권 제2호(통권 제41호), 대한의사학회, 2012.

 

이원순, 〈초창기 천주교회의 의료활동〉, 《가톨릭중앙의료원 50년사》, 가톨릭중앙의료원, 1988.

 

조규상, 〈한국 가톨릭 교회의 의료 활동〉, 《한국 가톨릭 문화활동과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최석우, 〈한국 가톨릭과 의료사업의 전개〉,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章原, 〈清代学者叶志诜及 《汉阳叶氏医学丛刻》 绍述〉, 《中医文献杂志》, 2014年 4期.

 

[교회사 연구 제53집, 2018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방상근(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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