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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죽음에 관한 성찰: 이상하지 않아 이상한 병원 장례식장

39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7-22

[죽음에 관한 성찰] 이상하지 않아 이상한 병원 장례식장

 

 

최근에 다녀온 장례식장이 어디였는지 기억나시나요? 도시였다면 병원 장례식장이었을 것이라는 데 한 표 던지겠습니다. 십중팔구 맞을 겁니다.

 

 

장례식 장소가 늘 병원 장례식장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병원에 장례식장이 있다니 살짝 이상하다는 생각, 혹시 해 보셨나요? 장례식장 대부분이 병원에 자리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냐는 질문을 해 보면, 주위 사람들은 질문 자체를 낯설어 했으며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했습니다. 무엇이 이상하냐고도 했지요. 다수가 병원에서 사망하는 현실이니 당연한 일 아니냐고, 무슨 다른 뾰족한 대안이 있느냐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현재 많은 한국인의 탄생지가 병원이고, 사망지도 병원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른 OECD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수십 년 전만 해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삶의 보루인 병원, 죽음의 공간인 장례식장

 

그런데 병원은 본디 무엇 하는 곳입니까? 잘 아시는 대로 병원은 환자를 괴롭히는 육체적, 정신적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전문 의료진의 도움을 통해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림을 목적으로 하는 치료 기관입니다. 병원이라는 공간의 표상은 기본적으로 건강의 회복 또는 건강한 삶을 가리킵니다. 병원은 삶의 최후 보루입니다. 그에 반해 장례식장은 묘지와 더불어 죽음을 연상시키는 전형입니다. 상징적으로 이들은 서로 화해하기 어려운 관계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병원의 역할 범위에 대한 이해가 점점 확장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죽음은 병원의 적극적 소임에는 속하지 않으며, 달갑지 않은 사건입니다. 치료 기관으로서의 병원의 치료 실패, 치료 불가를 선언할 때 죽음이라는 사건이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병원에서 우리는 장례식을 치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새로운 장례식장을 짓기 어려운 도시에서 기존의 병원 장례식장들은 계속 확장되고 고급스러워집니다. 장례식장이 병원의 안정적 수익원이라는 소리도 들립니다.

 

여기서 잠깐! 먼저 이런 현상 자체가 대한국에서만 관찰되는 극히 예외적 상황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병원과 장례식장이 우리처럼 한 공간 안에 붙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일반적인 나라는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요? 우리나라에서만 관찰되는 예외적인 일이라면 앞서가는 사례가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병원 장례식장의 경우는 그렇게 보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의미론적 질문이 생략된 죽음의 공간

 

한국에서 병원 장례식장이 일반화된 배경을 길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런 변화 과정에서 그 어떤 유의미한 사회적 논의도 없었다는 겁니다. 병원 장례식장과 관련해 확인되는 사회적 관심은 경제적인 측면에 한정됩니다. 병원 운영의 ‘숨은 효자’가 장례식장이라느니, 병원 장례식장이 폭리를 취한다느니….

 

병원 장례식장이 처음 자리를 잡게 된 때도, 확산되는 과정 중에도 우리 사회의 관심은 위생과 편리성에 기초한 정책적, 행정적 측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죽음과 장례의 의미론적 배경, 그것의 상징성과 의례성에 대한 논의는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극히 기능적으로 구성되고 배치된 무심한 병원 장례식장이라는 공간. 그곳에서 행해지는 상징적인(종교적인) 의례는 어딘가 조금 어설프게 ‘얹혀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저만 그런가요?

 

장례식장, 묘지, 화장장 등 죽음과 관련된 시설들이 공중변소, 분뇨 처리 시설, 폐기물 처리 시설 등과 동격 범주로 다루어지는 상황, 사체가 쓰레기나 폐기물과 다름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가 달리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애도의 품격

 

죽음이란 사건과 장례라는 의례에 대해 의미론적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한 인간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납골당을 다룰 때도 이야기드렸지만, 우리가 한 인간의 삶이 도구적, 기능적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면, 그의 죽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도구적, 기능적으로만 다룰 수 있을까요? 이는 간단한 산수 수준의 논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병원에 장례식장이 자리하게 된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산업화된 도시 사회에서 위생성과 효율성, 편리성에 대한 고민을 폄하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우리가 한 인간의 삶을 도구적 기능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철석같이 믿으면서, 바로 그 인간의 죽음을 도구적 기능성의 차원으로만 그리 손쉽게 환원시키는 처사는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치 사위가 부엌에 들어가면 대견해하고 아들이 그러면 안타까워하면서도, 본인이 그러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보통의 부모처럼,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그 인간의 죽음의 존엄에 대한 고민에는 깔끔하게 ‘괄호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공간기호학적 상징을 지닌 병원과 장례식장의 기이하고도 편안한 동거, 이 기이한 일이 생겨나고 일반화되는 동안 어느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 기이함. 의미론적 질문과 사회적 성찰이 결여된 죽음의 공간, 그 결여가 어째서 문제인지도 모르는 사회.

 

높아진 국격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랑스러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국격은 국가가 그 구성원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구성원이 걸을 마지막 길이 기형적 병원 장례식장을 거쳐 성냥갑 같은 납골당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아직은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 천선영 율리아나 -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20년 7월호, 글 천선영 율리아나,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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