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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행복을 찾아서: 소망 - 바라고 바라면

97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0-30

[행복을 찾아서 – 소망] 바라고 바라면

 

 

불만족스러운 삶. 고단한 하루. 권태로운 관계. 삶은 완벽하게 만족스럽지 않다. 불만족스러움에서 잠시 벗어나는 순간, 행복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지만 이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다시 무엇인가 부족한 상태. 삶은 그렇게 영원히 불만족이라는 사슬로 우리를 꽁꽁 얽어매고 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소망하는 것일까?

 

 

소망이 없는 사람

 

뇌신경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모든 생물이 두 가지 기본 정서를 가진다고 했다. 부정적인 정서와 긍정적인 정서다. 완벽하게 영점으로 조정된 정서가는 없다. 부정적인 정서를 느끼면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긍정적인 정서를 느끼면 현재 상태에 머무르려고 한다. 모든 복잡다단한 감정은 바로 이 기본적인 정서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꺼리고 무엇을 원할까? 그 기준은 바로 생존이다. 배고픔과 고통, 위협은 죽음과 관련된 자극이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려고 한다. 포만감과 안전, 행복은 생존과 관련된 자극이다. 될 수 있는 한 오래, 할 수 있는 한 많이 누리려고 한다. 생물학의 아주 단순한 원리다. 어떤 생물도 이 기본 원리를 위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예외가 있다. 바로 인간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인간은 유일하게 자살하는 동물이다. 나그네쥐가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자살한다는 코끼리나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만, 모두 전설일 뿐이었다. 소망이 사라진 상태, 어려운 말로 ‘무욕증’이라고 부르는 상태는 우울증 환자에게 자주 보이는데, 인간 외에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 마치 안분지족의 경지에 오른 도사라도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니다. 중증 우울증을 앓는 환자가 가끔 이러한 상태에 빠지는데,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 무엇을 해도 기쁘지 않고, 또 슬프지도 않다. 어떤 동기나 의욕, 소망이 없는 상태다. 사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살도 하지 않는다. 죽음을 실행에 옮길 의지조차 없다.

 

1944년 겨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수만 명의 유다인이 갇혀 있었다. 이들은 막연하게 성탄절이 되면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근거 없는 희망이었지만, 그들을 살게 만드는 힘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일주일 사이에 많은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 희망이 사라지자 제풀에 죽은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한 달 뒤인 1945년 1월 26일 해방되었다.

 

사실 무엇을 소망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무엇인가 소망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삶은 활기를 찾는다. 그러나 소망이 없이 힘만 얻으면 죽음으로 이어진다. 우울증 환자는 종종 회복 초기에 자살한다. 마음가짐은 여전한데, 자살을 실행에 옮길 힘만 생긴 것이다.

 

탐욕, 음욕 등 칠죄종의 약 절반이 과한 욕심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바라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도 만만치 않게 위험하다. 소망이 사라진 상태를 칠죄종에서는 나태라고 한다. 그냥 배부르게 먹고 편히 누워 노는 나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의욕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사라진 상태가 곧 우울이다.

 

 

던져진 존재

 

우리는 어느 순간 삶에 던져진 존재다. 운명은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의 나로 사는 것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특징을 바로 ‘던져짐’이라고 하였다. 분명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있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태다.

 

이러한 근원적 불안은 제멋대로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수용소에서 희망을 잃은 수감자 가운데 몇몇은 체념에 빠져 강제 노동을 거부했다. 수용소에서 작업 거부는 곧 죽음이다. 그럼에도 고집이 대단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천천히 막사에 누워 몰래 숨겨 둔 담배를 피웠다. 마지막 소극적 저항일까? 불안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자포자기하고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

 

탐욕과 음욕, 탐식 등의 쾌락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삶을 위험으로 이끌다가 결국에는 깊은 권태에 이르게 한다. 불안은 종종 우울로 이어진다. 어쩔 줄 몰라 근심하다가 깊은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다. 던져진 존재로서의 불안이 일으키는 삶의 무기력이다.

 

 

의미로서의 소망

 

소망은 단지 로또 당첨이나 대학 합격, 승진이나 건강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쾌락 추구의 수단일 뿐이다. 세계 여행이나 번지 점프처럼 색다른 경험에 관한 위시 리스트도 아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를 ‘오인된 자유라는 편안함으로의 도피’라고 하였다. 이런 가벼운 해결책은 점점 깊은 권태를 일으킬 뿐이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삶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삶에서 뭔가를 얻어 내려는 무익한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 근원적 삶이라고 해도 좋고, 신이라고 해도 좋고, 전체 정신이라고 해도 좋다. 뭐라고 부르든 과연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소망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불행할 수도 있고, 비극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삶의 목적은 행복이나 성공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찾아내는 것이다. 바로 삶의 의미로서의 소망이다.

 

* 박한선 - 정신과 전문의. 신경 인류학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강사로 지내며,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에서 인간의 정신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목동병원, 서울대학교 병원, 성안드레아병원에서 일했다.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토닥토닥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9년 10월호, 글 박한선,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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