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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거짓 휴식과 참된 휴식: 생명을 살리는 휴식

167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8-17

[경향 돋보기 - 거짓 휴식과 참된 휴식] 생명을 살리는 휴식

 

 

1891년.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악화하는 노동 환경으로 말미암아 고통받던 노동자들과 그 현실에 교회는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는다. 교회는 노동 문제에 관한 최초의 공식 문헌인 회칙 「새로운 사태」를 통해 당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과 그 원인을 고발하고, 보호받아야 할 노동자들과 그들의 권리를 대변함과 동시에 그들과 연대해야 할 교회의 사명에 대해 장엄하게 선포한다. 레오 13세 교황은 이 회칙에서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들의 권리, 적정한 임금과 ‘휴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과중한 노동으로 정신이 무디어지고 육신이 핍진해지도록 노동을 요구한다는 것은 정의도 인간성도 용납하지 않는다”(「새로운 사태」, 31항).

 

어린이들도 주 70-80시간, 최대 100시간을 노동해야 했던 19세기, 교회가 노동자들의 휴식과 쉴 권리를 주장한 것은 당연하였다. 교회는 세상 창조를 마치신 하느님께서 쉬셨고, 이날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도 휴식을 취하고,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계명이 담긴 구약 성경을 근거로 삼았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휴식은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허용되었을 뿐 노예들에게는 절대 허용되지 않던 ‘특혜’였다. 구약 성경은 고대 근동 사회와 문화에 전면적으로 대항한다. 곧 휴식은 하느님의 모습인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이자 의무라는 가히 혁명적인 가르침을 선포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교회는 당시 상황에서 무엇을 발견하였을까? 소수의 가진 자들만의 전유물이 된 ‘휴식’, 노예로 전락한 다수 노동자의 비참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느님께서 금지하신 고대 근동의 모습으로 회귀한 시대상이 아니었을까?

 

“노동 중간에 휴식을 하는 것은 하나의 권리다. …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도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 누림으로써 가정, 문화, 사회, 종교 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간추린 사회 교리」, 284항).

 

‘휴식’은 인간이 노동과 생존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다양한 활동과 삶의 경험을 통해 행복하게 살며, 더 나아가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 완성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휴식을 우리는 충분히 누리고 있는가? 왜 우리는 쉬지 못할까? 그런데도 우리는 왜 쉬어야 할까? 아니, 쉬도록 해야 할까?

 

 

잊지 못하는 경험

 

사제가 된 지도 이제 18년이 되었다. 지금은 부산, 울산, 김해, 양산 등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제들, 그리고 활동가들과 함께 국적과 인종 그리고 종교 등을 초월하여 ‘노동과 노동자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들과 관련된 일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국내 노동 문제는 언제나 고민과 연대의 대상이다. 그런데 종종 떠오르는 지난날의 기억은 나를 아직도 힘들게 한다.

 

보좌 신부 시절 어떤 청년에게 왜 성당에 나오지 않느냐며 야단을 친 적이 있다. 그 청년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다녔습니다. 그래도 미사는 빠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산은 수십 년 전부터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 한때 인구가 500만을 넘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도시가 이제는 340만, 그리고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30년 이후에는 300만도 붕괴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미 수년 전부터 수많은 20-30대가 부산을 떠났다. 일자리를 찾아서 말이다.

 

그들은 ‘21세기 유목민들’이다. 먹고 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을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청년들이 종교 생활은커녕 제대로 쉴 시간이나 있을까? 불안한 고용 형태인 노동의 비정규직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그와 반대로 높은 수준의 의식주 비용은 결혼은커녕 그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결혼과 자녀 양육에 따른 경제적 부담과 가사 분담은 청년들의 휴식을 더욱더 힘들게 한다. 한마디로 ‘쉴 수 없는 시대를 사는 세대’다. 그런 청년들에게 왜 성당에 나오지 않느냐며 다그치던 지난날 보좌 신부 때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정말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때는 고통스러운 형제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왜 쉬지 못하는가

 

어느 연구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국민 소득 가운데 임금 소득 비중은 점점 줄어든 반면에 부동산, 주식, 그리고 금융 자본을 통한 소득 비중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전체 소득 가운데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몫은 늘어나지만,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몫은 줄어들고 있단다. 노동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부는 계속 증가하지만, 노동을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람들은 지금처럼 노동하면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지금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해야, 그리고 ‘저녁이 있는 삶’, ‘휴식’을 포기해야 지금의 생활 수준이라도 유지할 수 있단다.

 

최저 임금은 1인이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저한도의 임금’을 말한다. 올해 최저 임금은 시급 8,350원, 월급은 노동 시간 주 40시간을 기준으로 약 175만 원이다. 한편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올해의 1인 가구 최저 생계비는 102만 원 정도이다. 많은 이가 정부에서 결정하는 최저 생계비가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지만, 정부의 결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73만 원으로 집과 결혼, 자녀 양육, 의료비, 노후 생활을 준비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이 많지 않은 세상이지만, 우리가 휴식을 포기해야 하고, 더 많이 일해야만 생활에 필요한 돈을 어느 정도 벌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가운데 가장 많이 일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왜 더 많이 일해야 할까? 우리나라 임금체계는 기본급과 각종 수당으로 이루어지는데, 수당은 총수입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야간 노동, 휴일 노동 등 ‘연장 근로 수당’과 같은 수당이 없다면 생활에 필요한 여유 자금을 확보할 수 없다. 추가적인 노동을 하지 않고 기본급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40시간만 일해서는 평균적인 삶도 쉽지 않다.

 

한편 장시간 노동은 결코 건강에도 좋을 수 없다. 올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일주일 평균 60시간 이상 노동하는 사람들은 각종 질환이 발생할 위험이 매우 높다고 한다. 결국 생활에 필요한 임금을 획득하려는 장시간 노동은 우리 자신의 휴식, 건강 그리고 생명을 돈과 과로 그리고 죽음(또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 맞바꾸는 행위이다.

 

노동 시간이 늘면 임금은 증가하지만 휴식은 줄고, 휴식을 위해 노동 시간을 줄이면 임금이 부족한 악순환. 이 악순환을 끊는 방법은 없을까? 노동 시간을 줄이고, 기본급을 인상하는 방법뿐인데, 과연 누가 이것을 하려 할까?

 

 

왜 쉬어야 하는가 왜 쉬게 해야 하는가

 

북유럽 국가의 버스 기사는 낮은 노동 강도와 함께 충분한 휴식을 보장받고 있음에도 그들의 월급이 대학교수의 월급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노동 환경임에도, 그들이 그러한 대접을 받는 이유를 들은 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승객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을 생명의 봉사로, 노동자를 생명의 봉사자로 여기는 사회인 것이다. 인간이면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문화가 그곳에는 있었다. 이것은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만이 진정한 휴식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와는 너무 다르다. 노동 시간 단축으로 부족해진 버스 기사를 충원해야 하는 문제에 엇갈리는 시선들, 휴식 시간임에도 활동 지원사와 보육 교사, 요양 보호사 등 사회 서비스 노동자들의 무급 노동을 당연시하는 문화, 과도한 업무 강도와 장시간 노동으로 목숨을 잃는 우체국 노동자들, 대형 유통 업체에서 불법적인 야간 노동을 하는 청소년 노동자의 현실이 마치 잠을 쫓으려고 약을 먹으며 12시간 이상 재봉틀을 돌려야 했던 1960-70년대 평화시장의 수많은 어린 여공을 생각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쉼 없이 돌아가는 재봉틀처럼 휴식을 포기한 채, 또는 박탈된 상황에서 살고 있다. 휴식 포기를 강요하는 사회 안에서 살고 있다. ‘휴식이냐, 돈이냐, 생존이냐?’라는 갈림길 위에서 살고 있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휴식은 권투 선수가 다음 라운드를 위해 잠시 쉬는 ‘1분’과 같은, 다시 노동에 뛰어들고자 잠시 대기하는 시간인 듯하다. ‘대기 시간’을 마치 휴식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사회이다.

 

“인간은 일하려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안식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발터 카스퍼 추기경, 「가정에 관한 복음」).

 

우리는 쉬어야 한다. 제대로 쉬게 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휴식을 돈과 효율성으로 맞바꾸려는 사회는 결국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생명을 포기하는 사회일 뿐이다. 휴식은 나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생명을 지키는 정의로운 사랑 행위이다.

 

휴식은 우리 인간을 하느님의 창조 의지대로 일상의 행복을 뛰어넘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고,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게 하는 해방구이다. 휴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는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이자, 노동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사회이다. 진정한 휴식, 그 길은 아직 멀다.

 

* 이영훈 알렉산데르 - 부산교구 신부. 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8월호, 이영훈 알렉산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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