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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홍봉주 토마스 · 서태순 아우구스티노와 이조여 요셉

183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8-11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15) 홍봉주 토마스 · 서태순 아우구스티노와 이조여 요셉

 

 

홍봉주(토마스, 1814~1866)

 

홍봉주는 순교자 집안 출신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홍낙민(루카)이 그의 조부이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복자 홍재영(프로타시오)은 그의 부친이며, 모친은 정약현의 딸 정조이이다. 또 기해박해 순교 복자 심조이(바르나바)가 그의 부인이고, 성 홍봉주(베드로)ㆍ영주(바오로) 형제는 그의 사촌이다. 

 

홍봉주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친 홍재영이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면서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로부터 신앙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된 그는 부친과 아내가 순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배교해 석방됐다. 죄책감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 1853년 최양업 신부를 만나 회개했다.

 

홍봉주는 이후 메스트르 신부의 명에 따라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를 입국시키는 임무를 맡아 상해로 가서 주교 일행을 모시고 이듬해 3월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베르뇌 주교의 복사로 봉사하면서 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모든 일을 주님의 일로 알고 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격려했다. 그는 1865년 흥선 대원군에게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자고 건의했다. 

 

흥선 대원군은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달리 선교사들의 만남을 미루다가 병인박해를 일으켰고, 홍봉주는 186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와 함께 체포돼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홍봉주는 포교들의 추궁에도 끝까지 교우들을 밀고하지 않고, 선교사들의 거처를 대지 않았다. 형벌 중에 잠시 마음이 약해졌으나 곧바로 뉘우치고 신앙을 증언한 뒤 3월 7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 52세였다.

 

 

서태순(아우구스티노, 1829~1866)와 이조여(요셉, 1843~1866)

 

서태순은 경기도 양지 출신으로 부모에게서 신앙을 물려받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이조여는 충청도 진천 사람으로 어릴 때 천주교에 입교했다. 장성한 뒤 서태순의 딸과 혼인해 처가 식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실천했다. 

 

서태순과 이조여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경기도 광주 뫼룬리 집에서 프랑스 선교사 볼리외 신부를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볼리외 신부는 박해 직후 서울 포교에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고, 서태순과 이조여를 비롯한 마을 교우들은 광주 포교에게 체포돼 남한산성에 있는 유수부로 압송됐다.

 

포교들은 서태순과 이조여가 신부를 모시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재산이 많을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 비해 더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하지만 둘은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굳게 신앙을 증언하면서 결코 형벌에 굴하지 않았다. 특히 “교회 서적을 바치고 아는 교우를 밀고하라”는 문초에도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다. 

 

서태순과 이조여는 동료 교우들과 함께 포교들의 매질을 이기지 못하고 1866년 음력 2월에 순교했다. 당시 서태순이 37세, 이조여가 23세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8월 11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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