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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0일 (토)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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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진리를 찾아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 착한 사마리아 사람

203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8-08-14

[진리를 찾아서 –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착한 사마리아 사람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는 우리 삶에 빛을 비추고, 그 빛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 진리가 숨길 것이 아니라 세상에 전하여 사람들이 구원의 여정에 동참하도록 이끌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는 방법은 우리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투신하여 나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3-14).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에 하늘에 공덕을 쌓는 일이기도 합니다.

 

 

경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가난한 이에게 도움을 줬던 일은 기억에 없고 오히려 먹을 것을 구걸하러 온 걸인이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막아섰던 제 모습이 생각납니다. 낯선 사람이나 낯선 것을 천성적으로 경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때 그분께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무튼 저는 구걸하는 이들, 몸 뉠 곳 없는 가난한 이들을 껄끄러워하며 자랐던 한 사람입니다.

 

신학 공부를 하려고 외국에서 지내는 동안 한 주에 한 번 노숙자들이 이용하는 쉼터에 나가 봉사했습니다. 노숙자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눠 주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나누어 주던 커피의 향과 노숙자 특유의 체취가 뒤섞인 쉼터의 냄새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곳을 오가던 노숙자 대부분은 저를 중국인 봉사자 정도로 취급했지만, 이름을 주고받으며 친구처럼 지낸 이들도 있습니다. 더불어 그곳에서 함께 일한 봉사자들과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봉사자들은 저처럼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찾아온 사람들로 일주일에 단 몇 시간이라도 자신들의 시간을 함께 나누고자 했습니다. 봉사하는 우리가 얻는 것도 있었습니다. 혼자 하는 봉사 활동은 쉽지 않지만, 함께하면 서로 힘을 받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봉사자들은 노숙자들에게 단순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봉사자들은 그곳에 자주 오는 노숙자들을 잘 살피면서 그들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듯이 보이면 이를 일지에 자세히 기록해 뒀습니다.

 

처음 온 이들에게도 다가가 그들의 상태와 기본적인 정보를 알아보고 인상착의와 특징 등을 간단히 기록했습니다. 이 자료들은 그들에게 뭔가 좀 더 도움이 필요할 때 보충 자료가 되었습니다.

 

봉사 활동을 하며 거리로 내몰린 이들의 사연도 듣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삶과 생명이 경시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보며 이 현상을 극복하려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레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도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저항하고 싶었습니다.

 

귀국한 뒤 공동체 형제들과 함께 찾아갔던 곳은 사람의 목숨이 희생된 강제 철거 현장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가게를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해 오던 상인들을 강제로 퇴거시키는 과정에서 공권력이 과도하게 쓰였던 곳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상인들과 경찰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참사가 발생한 뒤 그곳에서 희생된 분들의 유가족과 함께 시민들이 사건 현장을 보존하려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도 그 현장을 지키려고 하루 밤을 그분들과 함께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유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피해를 당한 철거민들의 현실을 모르는 이들은 단순히 이들이 돈을 더 받아 내려고 이른바 ‘알 박기’를 하는 것 아니냐며 무지함을 드러내어 철거민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모든 일을 돈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이들의 악의적인 ‘흠집 내기’였습니다.

 

그곳에서 내몰린 상인들은 생계를 위협받는 이들이었습니다. 가게에 투자했던 모든 시간과 노력이 송두리째 날아갈 판이었는데도 개발 업자들의 논리는 상인들의 그런 위기감에 대해서 공감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성찰

 

공감은 우리가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능력입니다. 공감 능력이 있으면 이웃들의 처지를 내 것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감은 성경에서 강조하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19; 22,39; 마르 12,31; 루카 10,27; 로마 13,9)라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도록 이끄는 내적인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이들과 함께하시며(com) 그들의 고통(passion)에 함께 아파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compassion’(연민)이란 말은 단순히 누군가를 동정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 고통을 같이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이웃의 고통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10,29-37 참조).

 

예수님 시대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인들에게 매우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이방인일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이라는 것만으로도 상종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이 사마리아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이 언짢아 할 이야기를 하십니다. 사제도 레위인도 하지 않는 이웃 사랑을, 그 사마리아 사람이 실천하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여행을 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당해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10,33 참조). 곧 사마리아인은 앞서 그냥 지나친 사제와 레위인과는 다르게 기본적으로 공감할 줄 알며,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의 소유자가 어떤 사태를 ‘보고’ 마음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엇으로 어떻게 강도를 당한 이를 돌볼 수 있을지 ‘판단’하고, 부상자를 도왔습니다. 죽어가는 이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상처를 소독하고 진통을 가라앉히는 응급 처치였습니다.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그를 돌보는 데 드는 비용까지도 갚으려 한 행동은 사마리아인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마리아 사람이 여관 주인을 부상자를 돕는 일에 동참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10,35)하고 말합니다.

 

우연히 시작된 봉사이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 책무를 다할 것임을 여관 주인에게 밝힙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여관 주인에게 한 말을 통해 누군가를 돕는 일에 사람들 사이의 협력이 필수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관한 이 해석은 수도회의 한 영성 강연에서 들었습니다. 사태를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일은 여러 사회 문제에 대응할 때 유용하게 쓰이는 복음적 행동 양식입니다. 강도를 당해 죽어 가던 사람을 돌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 양식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돕는 봉사 수칙으로 이용해 볼 만합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10,36)는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 교사는 대답합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10,37).

 

율법 교사가 이같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그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라는 것은 깨달을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꼭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닮으려는 행위입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크게 울립니다. 알아들었으면 가서 행하는 일이 남은 것입니다.

 

행하는 일, 곧 실천이 너무 어렵게 보일지라도 한 번쯤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다거나 그런 이들이 모이는 현장에 가 봐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서 공감이 일어나는지 확인되면, 그다음부터는 움직이는 것이 조금 수월해집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함께할 이웃을 찾아내면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그만큼 늘어날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곧 이웃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으로 복원될 것입니다.

 

* 박종인 요한 - 예수회 신부. 청소년 사목을 맡고 있으며, 서강대학교에서 ‘성찰과 성장’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교회상식 속풀이」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8년 8월호, 박종인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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