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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7일 (수)부활 제3주간 수요일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가톨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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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삶의 기원을 찾아가는 성지순례: 이스라엘 (1)

193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9-28

[성지순례기] 삶의 기원을 찾아가는 성지순례 : 이스라엘 (1)

 

 

우리는 이집트 국경을 넘어 드디어 이스라엘 땅에 도착했다.

 

우리의 이스라엘 여정을 안내할 가이드 심 프란치스코는 느릿하고 조용한 음성을 가진 경상도 청년이었다. 예정한 시간보다 우리의 도착이 늦어지자 걱정을 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통관을 한 내 뒤를 이어 자매들이 하나씩 이스라엘 쪽으로 들어오자 마음을 놓았다고 했다. 마침내 예수님이 살아 숨 쉬며 사랑을 가르치시던 땅으로 온 것이다. 모두들 이집트에서의 좋은 기억들에 더해질 이스라엘 순례에 대한 기대로 눈을 반짝였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본 주변 풍경과 도로는 깨끗하고 시원했다.

 

이집트의 척박한 자연과 여러 가지로 비교되었다. 두 나라 모두 시나이 반도와 홍해로 이어지는 광야 지역이지만 이스라엘은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체계적인 광산의 개발로 국토를 보전하고 성경의 역사를 보존하는 근면함이 보였다. 도로 주변의 돌산에서는 광석을 채취하고 있었다. 지하자원을 채취해도 한 장소에서 전부 파내는 것이 아니라 일정량을 파내면 그곳을 잘 복원해 놓고 다른 곳에서 자원을 채취한다고 한다. 그렇게 환경파괴를 최대한 줄이고 있는 것이다.

 

키부츠라 불리는 이스라엘 특유의 집단농장에 잘 자란 열대과일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사막지대인 이곳에 관개시설을 만들이 물을 끌어들여 인공으로 가꾼 옥토라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한참을 가다가 들른 휴게소에는 다양한 과일과 음료수, 신선한 식품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여유롭게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가이드는 우리에게 맛있는 대추야자를 선물로 사주었다.

 

우리가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처음 도착한 도시 예리코는 사해 북동쪽의 유다 광야에 위치한 크고 아름다운 도시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육지가 해수면보다 25m나 낮다고 한다. 원래 요르단 영토였던 이곳은 기후가 온화하고 물과 과일이 풍부한 휴양지역으로 팔레스타인의 정치 중심지였지만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 영토가 되었다. 고고학적으로도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기원전 7000년경의 신석기 시대의 성과 성벽, 둥근 망대 유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 당시에 이미 집안을 그림으로 장식할 정도로 생활수준도 높았다고 한다.

 

구약시대의 예리코는 ‘종려나무의 성읍’이라고 불렸다(신명 34,3). 40여 년의 광야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첫 발을 디딜 때 여호수아의 인도로 정복한 첫 번째 도시이기도 하다. 신약성경에도 예리코가 자주 등장한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소경 바르티매오를 고쳐주셨고(마르 10,46-52) 세리 자캐오의 집에 머무시기도 했다(루카 19,1-10). 또한 이 도시는 순례자들의 통로였는데 예리코와 예루살렘 사이에 유다 광야가 있어서 위험이 많은 곳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을 오가실 때 이 길을 이용하셨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루카 10,29-30).

 

성경 세계의 예리코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도착한 예리코에서 우리가 머물 장소는 세계적인 호텔 체인으로 유명한 인터콘티넨탈 호텔이었다. 우리같은 서민이 모처럼 별 다섯 개의 호텔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 간의 팽팽한 정치적 긴장으로 부유한 휴양객들이 예리고를 찾지 않게 되어 어부지리로 얻은 행운이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시나이 산을 다녀오고 계속해서 긴 시간 동안 광야를 지나와 피곤했던 우리는 시설이 좋은 호텔에서 잘 쉬면서 맛있는 식사로 체력과 탐구심을 되찾았다.

 

 

유혹의 산, 예리코 성 점령 기념터

 

다음날 찾아간 첫 번째 장소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성령께 이끌려 가셨던 광야였다. 예리코의 서쪽에 위치하는 유다 광야에 있는 그 산은 ‘유혹의 산’이라고도 불린다.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머무시며 사탄의 유혹을 받으신 곳이라 해서 ‘과란타나 산(Mount of Quarantana)’이라고도 한다. 유혹의 산 정상 못 미쳐 건물이 서 있는 자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동굴터라고 전해진다. 그 자리에 6세기부터 있던 교회는 13세기쯤에 폐허가 되었고 지금 보이는 건물은 1874년에 지은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다.

 

우리는 유혹의 산을 멀리서 바라보며 성경을 읽고 간단하게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은 예리코 시내 가까운 곳에 있는 산이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험하기 짝이 없는 허허벌판이었을 것이다. 밤이면 들짐승이 울부짖어 두려움이 일기도 하는…. 예수님께서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사탄이 다가와 세상의 모든 영예와 부유함을 보이며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물리쳤다(마태 4,1-4; 8-10). 사람이 자신의 안전과 소유를 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현대의 우리에게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족쇄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조금 자유로워졌다 싶을 때마다 다시 슬며시 다가오는…. 삶의 모든 것에서 은근히 다가오는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유지하는 길뿐이다.

 

예리코 뒤편에 있는 유혹의 산을 멀리 바라보는 것으로 끝내고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예리코 성 점령 기념터였다. 이스라엘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점령한 곳은 지금은 언덕이 무너진 움푹한 흙더미일 뿐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침공할 당시에는 외벽과 내벽이 견고한 성이었다는데 이스라엘인들이 이 성을 공략한 방법도 특이하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에게 엿새 동안 침묵하며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라고 하셨다. 이렛날이 되었을 때 사제들이 부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모두들 큰 소리로 외치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여호 6,20 참조).

 

1900년대 독일과 영국에서 파견된 탐사팀의 예리코 성 탐사 결과는 이러했다. 예리코 성은 이중벽으로 되어 있었고 두 성벽 사이는 5m의 간격이었다. 외벽은 두께 2m의 기반 성벽 위로 7미터 높이의 흙벽돌 벽을 쌓았고, 내벽 두께는 4m, 높이는 10-14m나 되는 견고한 성이었음이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전쟁 때 성을 공략할 때는 외부에서 사다리를 타고 밀고 들어오는 침입자들에 의해 안쪽이 무너지면서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예리코 성은 특이하게도 외벽의 기초 위로 쌓아올려진 성의 흙벽돌들이 모두 성벽 바깥쪽으로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그 무너져 내린 흙벽돌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단처럼 밟고 올라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성이 무너진 원인은 강력한 지진이었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의 외벽에 붙어 있던 집들 중 북쪽의 집들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라합의 집이 성벽 담에 붙어 있었다.’(여호 2,15)는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직접 땅을 흔들어 벽을 무너뜨리신 것이 아닐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을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였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 순례자들을 말없이 맞고 있는 나지막한 그 흙언덕은 고대 신앙의 신조들을 이끄신 하느님의 힘을 감춘 채 순례자들의 마음을 믿음으로 초대하고 있는 듯했다.

 

 

자캐오 나무와 광야 체험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지역인 구약시대의 예리코를 떠나 신약시대의 예리코 지역으로 이동했다. 낮은 건물이 드문드문 서 있는 깨끗한 거리를 지나 가로수가 우거진 조용한 주택가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바로 키 작은 세관장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올라갔던 돌무화과 나무라고 했다(루카 19,1-10). 하지만 이 나무의 실제 나이는 700살 정도라고 하니 아마도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이 근처 어디선가 자캐오를 만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정한 나무인 것 같았다. 굵다란 나무 밑둥에 모자이크로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을 그려놓은 돌판이 붙어 있었다. 또 예수님은 이 근처에서 소경 바르티매오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마르 10,46-52). 주변의 나무들이 잎이 넓은 온대식물 종류인 걸 보아 옛날부터 예리코가 기온이 온화하여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 자신 안에 갇혀 살던 자캐오의 마음의 키를 크게 하셨고, 소경 바르티매오의 치유를 통해서는 사물을 영적으로 볼 수 있도록 변화시키면서 하느님 나라를 가르쳐 주셨음을 생각하니 예리코에 불어오는 바람과 흔들리는 나뭇잎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주 오가셨던 신약의 예리코는 AD 68~69년 사이에 예루살렘을 정벌하러 가는 로마 군대에 의해 무너지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우리가 탄 차는 다시 예리코에서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광야지대로 들어섰다.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는 유다 광야는 험한 바위로 이루어진 이집트의 시나이 광야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 지역은 우기가 되면 땅 속에 스민 물기로 풀이 자라고 작은 꽃들로 뒤덮여 온통 붉고 누런 민둥산이었던 광야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한다고 한다. 우리보다 먼저 순례를 다녀오신 선배 수녀님들은 3월초에 이곳에 도착하여 온통 꽃으로 덮인 광야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했다. 우리도 두 주일 정도 늦게 왔다면 그 좋은 풍경을 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 우리가 만나는 이 풍경도 좋았다.

 

우리는 맑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둘러보다가 십자가가 서 있는 정상으로 올라가 산을 둘러보았다. 이월 중순 기울이지만 우리나라의 봄 날씨 같아 들판 여기저기에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시편을 흥얼거리면서 여유롭게 거닐던 우리는 바위틈에 핀 작은 꽃을 발견하고는 환성을 지르기도 하고, 가파른 계곡으로 떨어지는 가느다란 물길이 신기해서 바라보았다. 이 작은 물줄기는 비가 오면 폭포수가 되고, 빗물로 적셔진 골짜기는 푸른 풀밭으로 변할 것이다. 이런 지역을 아랍어로 ‘와디 켈트’라고 하는데 비가 오면 시내처럼 물이 흐르고 풀이 자라는 골짜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아득히 보이는 계곡 아래로 절벽을 따라 지은 건물이 보였다. 이 건물은 5세기 초 비잔틴 시대에 유다 광야에 세워진 독거수도원 중의 하나로 6세기 말 사이프러스 출신 수도사 성 제오르지오의 이름을 딴 ‘성 조지 수도원’이었다. 야고보 원복음서에 의하면 수도원이 서 있는 지역은 성모 마리아의 아버지 성 요아킴이 천사에게 마리아의 탄생을 예고받은 곳으로 고대에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 봉헌된 유서 깊은 곳이다. 또한 이제벨 왕후를 피해 시나이 산으로 달아나던 예언자 엘리야가 지금의 성 조지 수도원 근처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고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광야로 도망치던 길도 바로 이 와디 켈트 계곡이라고 전해진다.

 

어디선가 조랑말을 탄 아랍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순례자들에게 물건을 팔기도 하고 계곡 아래의 성 조지 수도원으로 가는 사람을 태우기도 했다. 성 조지 수도원은 힘들긴 하지만 걸어서도 갈 수 있다는데 우리에겐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산 위에서 수도원 건물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광야를 며칠이고 걸으면서 광야 체험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접으면서 산을 내려왔다.

 

 

사해, 쿰란

 

아주 짧게 광야를 체험한 우리의 다음 도착지는 사해(死海)였다. 갈릴래아 호수의 물은 요르단 강으로 흘러가 유다 광야를 거쳐 사해에 도착한다. 사해는 지표 400미터 아래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북의 길이가 77km, 동서 최대의 폭이 16km, 전체 면적이 9백65㎢이며 갈릴래아 호수의 6배라고 한다. 수심 4백20m나 되는 사해로 매일 평균 500만 톤의 물이 요르단 강으로부터 유입된다고 한다. 사해 지역의 기온이 워낙 높아서 요르단 강에서 들어오는 양만큼의 물이 계속 증발할 뿐 다른 곳으로 흘러나가는 물이 없기 때문에 항상 일정한 수위를 유지한다고 한다. 사해의 물은 일반 바다보다 염도가 7~8배나 높아(염분 30~33%) 어떤 어류나 미생물도 살 수 없는 곳이다. 나눌 줄 모르면서 받아들이기만 하는 이기심이 죽음의 바다(死海)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염화칼슘 · 쏘디움 · 포타시움 ‧ 미네랄 · 마그네슘 · 유황 · 칼슘 · 우라늄 · 브로마인 같은 광물질이 무궁무진하게 함유된 사해의 진흙은 이스라엘의 주요 수출 품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바닷가로 내려갔다. 아득히 펼쳐진 바다 건너편으로 요르단 땅이 보였다. 모래사장에서부터 진회색의 미끈한 흙이 밝혔다. 이집트의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도 이 사해 진흙으로 아름다움을 유지했을 만큼 바다 주변과 물 속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검은 진흙은 미용효과가 좋은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축축하면서도 찬바람이 부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우리도 신을 벗고 출렁거리는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아무리 추워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사해지만 겨울철이라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발을 물에 담근 채 손으로 진흙을 잡아 문지르며 장난을 치는 우리 모습을 유다인 할아버지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닷물에서 나와 맨발로 샤워 시설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 발을 씻으면서도 자매들은 계속 장난을 친다. 수도생활 연륜 이십오 년이 넘는 중년들인데 아직도 아이들 같다. 출렁대는 푸른 물결은 여느 바다와 다를 바 없는데 바닷물에 닿은 옷이 금세 뻣뻣해지며 변색까지 될 기미를 보이는 것을 보니 사해의 염분이 얼마나 강한지 실감난다. 우리는 이름 모를 풀들이 가득 피어 있는 바닷가 휴게실을 벗어나 해변을 끼고 남쪽으로 5km쯤에 위치한 쿰란 국립공원 지역으로 이동했다.

 

관광품 판매점 앞 주차장에서 차를 내렸다. 쿰란 유적지로 들어가기 위해서 입장권을 사고 들어갈 차례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우리는 관광품 가게 뒤편에 있는 천장이 낮은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은 쿰란의 유래와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에세네파의 생활과 사용하던 기구 등을 기록한 비디오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놀라운 것은 영상 해설이 한국말이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한국인이 많이 오면 한국어 더빙까지 준비했을까. 사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라 이집트를 거쳐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다. 이곳 쿰란에서도 많은 한국인들을 볼 수 있었는데 주로 개신교 순례단들이었다. 비디오에서는 예수님이 오실 길을 닦은 세례자 요한을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에세네파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이곳에서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며 세상과 떨어져 철저하게 신앙을 지키며 살았던 에네세파는 유다교의 분파에서 가장 경건하고 엄격한 집단으로 전해진다. 성경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살며 벌꿀과 메뚜기만 먹고 살았다(마르 1,6 참조)고 하는 걸 보면 믿을 만한 이야기인 것 같다. 비디오는 에세네파 공동체의 생활을 소개했다. 그들의 신앙 정신과 이곳에 자리하게 된 유래, 주거생활, 기도, 성경 필사 작업, 그리고 목욕탕의 구조와 사용법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계단을 내려가 물 속에 잠겼다가 건너편 계단으로 올라오는 의식으로 목욕을 하며 죄에서 죽고 다시 사는 매일의 전례를 거행했다. 오늘 우리의 세례성사에 도입된 의식을 매일 실행하며 살았을 그들의 경건한 신앙심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갈등도 있었을 것이다. 생각으로 이런저런 짓궂은 의문을 가져보며 나는 혼자 웃었다.

 

비디오를 본 다음 쿰란 유적지에서 발굴된 두루마리 성경과 그릇들이 전시된 작은 전시장을 둘러보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가슴이 뻥 뚫리도록 시원하게 트인 널따란 황무지에 솟은 암벽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하얀 석회빛을 띤 바위산 중턱 여기저기에 자연동굴이 뚫려 있었다. 그 유명한 ‘쿰란사본’이 발견된 동굴들이었다. 68년경 유다인 반란을 진압하던 로마 군대가 이 쿰란 공동체로 들어오자 그들은 두루마리에 필사한 성경과 율법서들을 질그릇 항아리에 넣어 맞은편 산에 있는 여러 동굴에 숨겨놓았다. 그 이후 에세네파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그들이 숨겨놓은 사본들은 1900년 동안 동굴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1947년 어느 날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던 베드윈족 양치기 소년이 언덕 위에 있는 동굴 속에 있던 항아리에서 고대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성경 필사 두루마리를 발견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어서 1949년 2월,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가 살았던 유적지를 발굴했다. 그리고 처음 사본이 발견된 동굴 주변에 있던 267개의 동굴을 탐사했는데 그 동굴 중 11개에서 사해사본의 일부인 구약성경의 필사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동굴들은 쿰란 공동체의 주거지역에서 125m에서 1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쿰란이라는 말은 ‘두 개의 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뜻은 아직 알 수 없다. 흔히 사해사본과 쿰란사본을 혼동해서 사용하는데 사해사본은 사해 주변에서 발견된 모든 사본을 말하는 것이고, 쿰란사본은 쿰란 공동체 근처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만을 지칭한다. 그러니까 쿰란사본은 사해사본의 일부인 것이다.

 

쿰란 공동체의 주거지 유적터 앞으로 잔잔한 푸른 사해가 보이고, 뒤편으로는 깊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하얀 암벽 산에 뚫린 자연동굴이 바라다 보였다. 그 중에서도 우리 눈에 잘 띄는 동굴이 두루마리 문서가 발견된 순서로 번호를 붙인 제4동굴이라고 한다. 퇴적화된 암벽산은 만지거나 밟기만 해도 굵은 모래처럼 부서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풀 한 포기 없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양을 칠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하긴 베두인 목동은 잃은 양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고 했으니 돌산 너머에 있을 풀밭에서 건너왔을 것이다.

 

공동체 유적터 사이로 나무로 만들어 놓은 집을 따라가면서 복잡한 구조의 방과 가구와 기도실, 목욕탕, 개인 침실, 공동 식당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물을 저장했던 물탱크, 도기 가마, 하수도까지 있었다. 그 중에 두루마리 성경을 필사하고 보관하던 서고 자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광야에 속하는 지역 특유의 한적함과 이국 정서를 듬뿍 담은 쿰란의 너른 풍경이 마음을 끌었다. 2천 년 전에는 더욱 고요했을 이곳에서 하느님만을 바라며 살았던 에세네파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나도 이런 곳에서 기도만 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외적인 고요가 내면의 소음을 잠재울 수 없다는 생각이 함께 올라왔다. 거룩한 삶이란 장소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자세가 중요한 것이니까.

 

유적지를 둘러보고 돌아오는데 가이드가 마른 나뭇가지에 달린 열매를 가리켰다. 그 열매가 바로 루카복음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둘째 아들이 먹으려고 했던 쥐엄나무 열매라고 했다(루카 15,16), 거칠고 시꺼먼 것이 돼지도 먹기 힘들 것 같은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을 둘째 아들의 불쌍한 처지가 짐작되었다. 이곳 쿰란의 면세점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상품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해 진흙을 원료로 한 화장품이 유명한데 매장은 온통 한국 아줌마들로 북적거렸다. 우리도 값싸고 좋은 선물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면세점인 이곳에서 물건을 사고 받은 영수증을 보관해두면 출국할 때 공항에서 지불한 금액의 10%를 돌려받을 수 있단다.

 

 

나자렛 예수 탄생예고 성당, 성요셉 기념성당

 

우리의 다음 여정은 나자렛이었다. 황량한 광야의 쿰란을 뒤로하면서 점차 푸른 나무들을 만나는가 했더니 차는 복잡한 시가지로 들어섰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커피숍, 스낵 식품, 관광품 가게, 옷가게 같은 여행자들을 상대로 하는 상점이 들어선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길을 가면서 보는 거리는 어딘지 오래된 느낌과 장터같은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달동네처럼 높은 언덕 위에까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 지역이 제법 깊은 산골이 아니었을까 싶다.

 

성모영보 성당의 크고 우아한 건물은 키가 큰 열대 나무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처녀 마리아가 살던 집터 위에 “예수 탄생예고 성당(성모영보 성당)”이 있다. 이곳에 처음 성당이 세워진 것은 326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에 의해서였다. 그 후 네 번이나 성당은 파괴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68년에 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십 세기에 들어와 지어서인지 성당은 현대와 고전이 어우러진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성당의 정면은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는 모습과 네 복음사가가 조각되어 있었다. 성당의 내부는 밖에서 보기보다 더 크고 넓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대리석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어두운 색의 바닥이 은은한 윤기를 뿜어낸다. 예수님의 생애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오후의 빛이 들어오고 있다. 성당 가운데 위치한 돔은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백합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성당 지하에 있는 성모님이 영보를 받으신 동굴로 내려갔다. 밝으면서도 분위기 있는 조명이 동굴을 비추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나자렛의 마리아의 집터란다. 여기서 처녀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동굴이 보이는 제대에 둘러서서 미사를 봉헌했다. “성모영보는 나자렛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육(肉)’이 되셨다. 곧 하느님이신 분이 사멸할 인간이 되심은 성모 마리아의 ‘피앗’에서 비롯된 큰 사건입니다. ‘주님의 뜻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놀랍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주님’의 뜻이기에 마리아는 순종했습니다.” 간결하고 힘 있는 신부님의 강론이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 준 마리아의 ‘네’를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나 또한 성모님을 본받아 매순간 하느님의 부르심에 ‘네’라고 답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한다.

 

우리가 미사를 드리는 동안 옆에 부부로 보이는 외국인 남녀가 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들이 미사에 참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를 나도 모르게 바치고 있었다. 미사를 마치고 다시 대성당으로 올라와 성당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정면 제대 양쪽에 있는 작은 경당에서 짧은 경배를 드렸다.

 

대성당 정원을 둘러싼 회랑 벽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성모자 성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각 나라의 특성을 살린 성모자상들은 정말 다양했다. 우리나라의 성모님은 한복을 입고 색동저고리를 입은 어린 예수님을 안고 서 있는 모자이크 작품이다. 이남규 화백의 작품으로 아래 편에 한글로 ‘평화의 모후여, 하례하나이다’라고 쓰여 있다. 성모님의 피앗을 기념하는 성당은 정말 아름답고 화려했지만 그 어떤 것도 ‘네’라는 응답으로 온 인류 구원의 단초를 놓은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모영보 성당 마당을 지나 약 100여 미터쯤 거리를 두고 성요셉 기념성당이 있다. 그곳은 성가정이 이집트에서 돌아와 정착한 곳이면서 성 요셉의 목공소 자리이기도 하다. 비잔틴 시대 이전부터 성가정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었는데 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 1914년에 다시 지었단다.

 

성요셉 성담으로 들이선 순례자들은 성당 양편에 있는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서 내부를 둘러보게 된다. 곳곳마다 성가정의 일화를 담은 성화와 작은 제대가 놓여 있었다. 지하경당의 성당 창문은 모두 성 요셉의 일생을 그린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져 있었다. 아기 예수님을 돌보는 성 요셉, 소년 예수님이 성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옆에서 대패질을 하는 모습, 예수님이 성 요셉의 임종을 지켜보는 모습 등 좁은 실내에 다양한 성화들이 있어 조금은 복잡하게 느껴진다. 계단 마지막 지하방에 들어서니 요셉과 예수님이 목수 일을 하셨다는 동굴터가 보존되어 있다.

 

성요셉 기념성당은 예수 탄생예고 성당의 부속건물이라고 생각될 만큼 작고 아담했는데 성당 밖에는 두 사람 정도 들어가면 꽉 찰 것 같은 성물판매소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버스 정류장의 매점 규모와 형태가 닮아 있었다. 이 성물방은 건물 벽에 붙어 있다는 게 다를 뿐인데,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걸린 묵주 사이로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성요셉 기념성당도 여러 면에서 성모님과 예수님의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셨던 겸손한 성 요셉을 생각나게 해주었다.

 

소년 예수님이 어머니와 함께 물을 길어오기도 하고, 마을 아이들과 뛰어놀았을 장소, 양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다듬으며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은총의 땅, 지금은 많은 집들이 늘어선 시가지에 속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한적한 산골 마을이었을 것이다. 이곳 지명이 붙은 ‘나자렛 예수’라는 이름이 후일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구원한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 마음에 깊이 머문다.

 

“요셉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마태 2,23)

 

성모님과 성 요셉의 행복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나자렛의 성가정이 누렸던 가난하지만 행복한 일상, 그러한 가정의 소박한 삶이야말로 우리 가정의 근본적인 삶의 태도일 것이다. 세상을 암울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참된 행복을 잃어버린 많은 가정을 성 요셉의 가호에 맡기고 나자렛을 떠났다.

 

 

카나 혼인잔치 기념성당,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다음으로 찾아간 장소는 갈릴래아 지방 카나의 혼인잔치 기념성당이었다. 예수님께서 물을 술로 변화시킨 혼인잔치 기념성당은 아랍인 거주 지역의 좁은 골목길에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의 성당은 1881년에 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 지은 건물이지만 이 성당 안에는 14세기로 추정되는 중세의 건물 유적과 5-6세기경의 그리스도인 무덤, 그리고 5세기의 유적인 안뜰 휘장이 남아 있다고 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성당에서 미사가 거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성당 왼편으로 들어가 회랑을 따라 제대 뒤편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대대적인 발굴로 찾아낸 옛 포도주 항아리와 돌항아리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포도주를 만들던 돌확이 유리 케이스 안에 보관되어 있었고 성당 지하로 내려가는 회랑의 선반에도 여섯 개의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그 밑에 고대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이곳에 여섯 개의 돌항아리가 놓여 있었다.’는 글이 적혀 있다.

 

지하 계단 오른편 문 쪽에는 유리로 덮인 아람어 비문과 함께 오래된 모자이크가 보존되어 있다. 이것은 5세기 유다 교회의 흔적으로 이 모자이크를 만든 이들에게 축복을 비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라고 하고, 모자이크는 당시 교회 안뜰 바닥 장식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지하를 돌아 나오는데 왼손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오른편 발치에는 독수리가 앉아 있는 여성의 전신상이 눈에 띄었다. 눈언저리에 짙은 얼룩이 남아 있는 황토빛 석상의 주인공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하에서 올라온 우리는 미시가 거행 중인 성당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제대 뒤편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혼인잔치에 참석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편에는 물을 술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주변에 항아리가 놓여 있는 그림이 있다. 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는 이곳에 성당을 짓기 전에 원래의 건물터 바닥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카나의 혼인잔치가 있었던 장소라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했다고 한다. 카나에는 두 개의 혼인잔치 기념성당이 있다. 두 성당은 서로 골목길로 연결되어 있어 프란치스코수도회 소속의 혼인잔치 성당에서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기념성당 지붕이 보인다. 성당 앞 상점에서는 카나의 혼인잔치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다는 포도주를 팔고 있었다.

 

성당을 나와 차를 타기 위해 골목길을 걸어 나오는데 가이드가 문이 닫힌 허름한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나타나엘 기념경당이라고 했다. 일설에 의하면 예수님이 참석하셨던 혼인잔치의 주인공이 바로 나타나엘이었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던 나타나엘을 부르셨을 때 그는 결혼날을 기다리고 있던 젊은이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을 본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은 확실한 축복과 기쁨의 이미지를 새겨주셨고 더 나아가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신 구세주이셨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걷는 골목길 양편으로 낡고 허름한 담이 이어졌다. 지저분한 낙서가 있고 칠과 벽돌이 떨어져 나간 시멘트 벽 사이로 잡풀이 자란 빈터도 보였다. 팔레스티나인들이 사는 지역 대부분이 이렇게 열악한 상황이었다.

 

날이 저물었다. 우리는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호텔로 들어섰다. 짐을 들고 천장이 낮은 로비로 들어서는데 적당히 낡은 붉은 카페트가 깔린 좁은 실내가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언젠가 전에 온 적이 있는 듯한 친근한 느낌이었다. 로비에서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식당에서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낯익은 느낌, 이런 것을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하던가.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와 창문을 여니 어둠에 잠긴 갈릴래아 호수의 찰랑대는 물소리가 들린다. 정원으로 내려가 호수를 바라보며 걷는데 예루살렘에서 산다는 한국인 가족이 주말휴가를 지내러 와 있었다. 네다섯 살쯤 된 여자아이 둘이 놀이기구를 타면서 늘고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다시 아침이 밝았다.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다시 호텔 정원으로 나갔다. 열매가 달린 큰 나무들이 서 있는 정원을 거닐며 흐릿한 하늘과 맞닿은 호수의 물결이 축대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의 여정은 갈릴래아 호수 주변이다.

 

 

갈릴래아 호수, 요르단 강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 바람결 따라 들려오는 주의 말씀 들었네….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그 그물을 버리고… 이제 너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상했던 대로 오늘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배를 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스라엘 전체의 1/3의 물을 공급하는 갈릴래아 호수는 이스라엘 북쪽에 있다. 해수면으로부터 약 209m 정도 아래에 있는 호수 수심의 평균 깊이는 약 26m, 가장 깊은 곳은 43m, 호수의 전체 둘레가 52km 된다고 한다. 굳이 숫자를 나열하지 않아도 눈으로 보는 갈릴래아 호수는 한국의 저수지 규모가 아니라 바다라고 할 만큼 넓었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이 호수를 갈릴래아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외에도 이 호수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한데, 유다인들은 호수의 모양에 따라 히브리말로 하프를 뜻하는 킨네렛 호수(Yam Kinneret)라고도 불렀다(민수 34,11; 여호 13,27).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겐네사렛 호수(루카 5,1), 티베리아스 호수(요한 21,1)라고도 했다.

 

아침부터 흐리던 날씨는 우리가 배에 올랐을 때도 여전했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서 모두들 옷깃을 세우고 모자를 눌러썼다. 어디선지 갈매기들이 낮게 날며 배 주위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풍랑을 가라앉히신 복음 말씀(마르 4,35-41)을 듣고 침묵 속에 뱃머리에 부딪히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복음의 내용을 그려보았다. 갈릴래아 호수는 높고 낮은 언덕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평소에는 고요하다가도 기압의 변화를 일으키면 예기치 못한 폭풍이 몰아치기 일쑤라고 한다.

 

이 호수 한가운데서 배를 타고 있던 제자들이 센 파도를 만나 고전하는데 예수님은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복음의 내용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제자들은 겁이 나 안절부절못하는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믿고 잠이 드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우리를 믿으시고 당신의 일을 맡기신다. 하지만 나는 매번 예수님께서 약하고 결함투성이인 내게 당신의 일을 맡기신다는 걸 믿지 못하여 두려워하고 뒷걸음치며 핑계를 대기 일쑤였다. 자연과 바람과 호수를 지배하는 분, 그분이 나를 만드신 분이시고 늘 내 곁에 계셔주시는데 그것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다. 두려울 때, 나를 믿을 수 없을 때 믿음으로 예수님을 소리쳐 부르면 된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니까.

 

우리가 갑판 위에 자리를 잡고 앉자 영화배우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 멋지게 수염을 기른 선장님이 태극기를 돛대에 올리고 애국가를 들어주었다. 신기하고 기뻐서 모두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졌다. 상업적인 의도가 다분하겠지만 한국인 순례자들을 위한 배려에 기분은 좋았다. 배에서 바라보이는 호수 주변의 마을들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신 장소로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의 구원활동이 이루어진 복된 곳들이다.

 

대표적인 갈릴래아 호수 순례지는 서북쪽의 타브가를 중심으로 호수를 끼고 예수님의 고장이라 불리는 카파르나움 성베드로 기념성당이다. 그리고 베드로 수위권 기념성당과 빵의 기적 성당이 있고, 호수 왼쪽에 있는 쉐이크 알리 언덕에는 참행복선언 기념성당이 있다. 그분은 이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마태 4,15.18) 구원사업을 시작하셨다(마태 4,12). 기도하시고 호숫가 산 위에서 참행북을 선언하셨다(마태 5장). 그리고 호수 근처 마을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루카 4,31), 마귀에게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셨다(마르 1,39). 또한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다(마태 4,2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을 통하여 당신이 이룩하신 구원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곳도 갈릴래아였다(마태 28,10). 모두들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호수와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주님의 자취를 찾았다. 갈릴래아 호수는 변덕스러움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가 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뱃멀미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갑판 위에서 발걸음을 떼어 놓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모두들 두 번 다시 오기 어려운 이곳을 마음과 눈에 남기려고 갑판 위에서 사진을 찍느라고 바빴다.

 

우리는 배에서 내려 다시 육지로 돌아왔다. 잠깐 동안 버스를 타고 내린 곳은 요르단 강의 물길이 흐르는 곳이었다. 요르단 강의 물은 남쪽에서 갈릴래아 호수로 들어온다고 했다. 요르단 강은 이스라엘 북쪽, 골란 고원 너머의 헤르몬 산(2,814m)에서 발원하여 갈릴래아 호수를 거쳐서 사해까지 가는데 그 길이가 256km나 된다고 한다. 우리가 본 요르단 강의 물길은 큰 개천 정도였지만 폭이 넓은 곳은 약 30m 정도 된다고 한다. 이스라엘 국민들의 식수원이기도 한 요르단 강물 상류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참행복선언 기념성당(THE MOUNT OF THE BEATITUDES)

 

참행복선언 기념성당으로 올라가는 들판에 들어설 때쯤 흐렸던 하늘이 맑게 개었다. 잘 가꾸어진 열대식물과 큰 나무 사이로 걸어 들어가니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참행복선언 기념성당이 있다. 진복팔단 성당 또는 산상설교(마태 5,1-12) 성당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성당의 돔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가지 참 행복을 상징하는 팔각형 모양이다.

 

아담하고 우아한 성당은 1937년에 이탈리아 사람 발루치(Barluzzi)가 설계했다고 한다. 성당을 둘러싼 아치형 주랑을 제외한 실제 성당의 규모는 전에 사진으로 보면서 생각하던 것보다 작았다. 성당 안은 여덟 가지 행복을 히브리말로 써놓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져 내려오는 빛에 쌓여 온화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순례자들은 성당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감실과 제대 주위를 돌면서 성당을 한 바퀴 둘러보게 된다. 감실 앞 대리석 바닥에는 믿음 · 소망 · 사랑의 복음 삼덕과 지혜 · 정의 ‧ 용기 · 절제의 네 가지 덕이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아름답고 조용한 성당에서 분주했던 발길을 잠시 멈추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참된 행복을 음미하는 시간이 너무 감사했다. 며칠 전까지 종종걸음을 쳐대던 나의 사도직 일상의 의미를 더 깊게 해 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내 곁에 더 가까이 계신 예수님께 언제 어디서라도 세상을 넘어서는 진정한 행복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청했다.

 

우리는 성당 밖으로 나와 주랑의 하얀 기둥 사이로 반짝거리는 호수의 물결을 바라보며 감탄을 쏟아냈다. 지금은 성지를 맡아 관리하는 베네딕토수도회 수녀들에 의해 성당과 주변이 잘 가꾸어져 있지만 그 옛날 예수님 시대에는 평지와 언덕에 풀과 나무들이 무성한 들판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곳에 모인 군중들에게 참행복 외에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이곳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 용서와 화해, 올바른 자선 등의 사랑으로 귀결되는 주님의 가르침들이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모든 이들의 마음까지 도달하는 멋진 야외 강의실이었다.

 

예수님을 찾아 이곳에 모여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자연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피곤하고 아픈 마음과 몸의 상처를 치유받았을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들은 많지만 그들이 위로받고 자존감을 회복하여 행복하게 살려면 예수님 사랑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절감한다. 오늘의 세상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줄 사명을 받은 나는 예수님의 참행복을 얼마나 알아듣고 실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도 이곳을 자주 오갔을 것이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라고 말씀하신 갈릴래아가 바로 이곳인 것이다.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도 이곳이 구원의 메시지가 세상 끝까지 전파되는 출발점이 되기를 원하셨다.

 

참행복선언 기념성당에서 호수 쪽으로 내려가면 작은 동굴 옆에 제대를 마련해 놓은 곳이 있다고 한다. 내려가 볼 수는 없었지만 그곳은 예수님이 찾아오는 군중들을 피해 외딴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장소(마르 1,35; 루카 4,42: 5,16)라고 전해진다.

 

 

빵의 기적 기념성당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타브가(TABGHA)라고 불리는 빵의 기적 기념성당이었다. 타브가라는 이름은 ‘일곱 개의 샘’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헤프다페곤’을 아람어로 옮긴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히브리어로는 ‘엔 세바’라고 하는데 원래 물이 많이 나는 곳이어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시는 기적을 행하셨다는 이곳에 성당이 처음 세워진 것은 350년경이다. 그 뒤 5세기경에 다시 비잔틴 양식의 성당을 지으면서 예수님의 기적과 관련된 바위를 새 제단 아래로 옮기고 제단 주위를 모자이크로 장식하여 성당을 지었다. 후대에 페르시아와 이슬람의 침공으로 폐허가 되었던 것을 1300여 년이 지난 1982년에 독일 베네딕토수도회에서 역사적 고증을 거쳐 복원했다고 한다.

 

양편이 널찍한 녹지대로 가꾸어진 길을 따라가서 베네딕토수도원 소속의 넓은 정원으로 들어서니 초세기 때 사용하던 연자방아와 우물터가 있었다. 5세기 비잔틴 양식 성당을 그대로 복원해 냈다는 성당의 내부 장식은 단순하고 분위기는 조용했다. 우리는 제대 앞으로 다가갔다. 제대 바닥에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놓고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바위 일부가 드러나 있었고, 그 앞으로 5세기경에 만들어진 빵과 물고기의 모자이크가 있었는데 그 문양이 눈에 익었다. 생각해 보니 전에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수녀님께서 이 문양을 한 작은 초받침을 선물로 주셨었다. 그때는 그 그림이 이렇게 유서 깊은 것인 줄 몰랐다.

 

그 옛날 넓은 평야였던 이곳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취하여 시간을 잊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고자 하셨다. 제자들이 가져온 것은 모인 사람에 비해 턱없이 적었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은 모두를 배불리셨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체험하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적 필요까지도 채워주시는 것을 깨달았다. 욕심 없이 가진 것을 나누는 소박한 나눔으로 천국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 옛날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기적,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신 기적(마르 6,30-44: 마태 14,13-21; 요한 6,1-14)을 나타낸 그림에 빵이 네 개밖에 없었다. 그림이 잘못된 것은 아닐 텐데 싶은 생각에 눈길을 돌려 제대를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예수님은 매일 미사에서 제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성변화를 통해 생명의 빵이 되어 오신다. 그래서 제대 아래 사이로 새겨진 네 개의 빵은 그리스도의 몸인 제대와 더불어 다섯 개가 되는 거구나.

 

이처럼 깊은 성체 교리가 초세기 때부터 오늘 나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아름답고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통 속에 불리움 받았음이 새삼스럽게 감사로움으로 벅찼다. 날마다 봉헌되는 미사성제를 통해서 지금도 ‘빵의 기적’은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빵이 되신 예수님처럼 나도 누군가를 위해 빵이 되도록, 그리하여 순수한 누룩처럼 부푸는 사랑이 되어 이 세상에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불리움 받았음을 의식하게 해주는 거룩한 장소에 내가 서 있다는 느낌이 전율처럼 나를 엄습했다. 빵의 기적은 사람의 육체적인 배고픔을 채우는 것으로 드러나지만 실제로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인간의 영적 갈망이 채워지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나는 가난하지 않고 걱정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그것이 진정한 채워짐이기에, 인간의 굶주림을 채우는 진정한 빵, 살아 계신 주님.

 

팔레스티나 지역에 남아 있는 비잔틴 교회 유적 중 특별히 아름다운 작품으로 알려진 이집트 풍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빵과 물고기의 모자이크 앞에서 한참을 묵상에 잠겨 있던 자매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성당의 다른 편 바닥에 호수 지역의 새 ‧ 물고기 · 짐승 · 꽃들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있었는데 제대 앞에 있는 빵과 물고기의 문양에 열중하다가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장식이 없는 초세기 풍의 조촐한 성당에 베네딕토 성인이 교회 건물을 봉헌하는 모습과 예수님, 그리고 성모자를 그린 이콘의 채색이 너무도 선명해서 다소 생소한 느낌을 주었던 것도 기억에 남았다.

 

 

베드로 수위권 기념성당

 

빵의 기적 성당에서 북쪽으로 5백 미터 거리에 ‘베드로의 수위권 성당’ 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 기념성당’이 있다. 4세기 때에 이곳에 기념성당이 바위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13세기에 회교도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그 후 7백여 년이란 세월이 지난 다음 오늘의 기념 성전이 다시 들어서게 된 것이라고 한다.

 

제대 앞에 제법 큰 바위가 있고 순례자들을 위한 몇 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이 전부인 작은 성당이었다. 아마도 4세기경부터 있었던 비잔틴 양식의 성당을 그 크기까지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대 앞의 울퉁불퉁한 바위는 어른 몇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크기였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을 건네시고, 빵과 숯불에 구운 생선을 나누어 주셨다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hristi)’이라 불린다.

 

요한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예수님 부활 이후의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답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 다시 고기잡이가 되었다. 어느 날,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불리움 받았던 다른 형제들과 티베리아스 호수로 갔다. 그들은 고기를 잡기 위해 밤새도록 그물을 쳤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해 허탈한 상태가 되었다. 예수님을 잃은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공허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목적을 잃은 채 무의미하게 시간을 소비하는….

 

붉은 새벽빛이 바다의 어둠을 밀어내는 이른 시각에 누군가가 호숫가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배 위에 탄 사람들에게 말한다. 다시 한 번 그물을 쳐보라고, 그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그물을 쳤을 때 셀 수 없이 많은 고기가 걸려들었다. 그때 베드로와 함께 있던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저분은 주님이시다!” 요한의 짧은 외침에 마음의 눈이 열린 베드로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 그분을 향해 헤엄쳐 나왔다.

 

예수님은 뭍으로 올라오는 제자들을 위해 널찍한 바위 위에 고기를 구워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해가 떠오르기 전의 추위를 녹여주는 따스한 모닥불과 구운 생선에 담긴 예수님의 깊은 정,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쏟았던 사랑을 원점으로 돌려버리고 만 제자들의 죄책감과 무안함을 덮어주고 있다. 예수님의 자상한 배려 속에 제자들은 믿음을 회복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집어주시는 생선과 빵을 묵묵히 받아 먹으면서 말이 필요 없는 용서와 사랑을 느꼈을 터이다(요한 21,1-14).

 

요한복음의 그 부분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그리던 갈릴래아 호숫가가 바로 이곳이다. 비잔틴 양식에서 보여주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경건함과 단순함을 잘 보여주는 성당 벽은 옛스런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거친 회색 벽돌로 되어 있어 옛날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준다. 성당 옆문으로 통하는 낡은 돌계단은 오래된 바위와 맞물려 있었는데 커다란 바위틈에 순례자들이 남긴 기도 쪽지가 여기저기 끼워져 있다. 호숫가로 내려가던 자매 중 한 명도 작은 쪽지에 기도를 적어 바위틈에 끼워 넣는다.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함께 기도했다. 기나긴 세월의 흐름 속에 이어지는 기도를 통해 바로 그분, 같은 주님께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음이 고맙고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성당에서 호숫가로 내려가는 길바닥에 하트 문양의 돌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아마도 예수님과 베드로, 그리고 제자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잘 보고 마음에 새기라는 의미인 듯했다. 성당을 나서면 바로 갈릴래아 호수와 만난다. 사람들이 호숫가에서 조용히 물을 만지거나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쪼개져 내리는 햇빛으로 주변이 온통 금색으로 빛났다.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는 갈대, 그 사이로 햇빛에 빛나는 물결이 소리 없이 오가는 그곳 분위기는 그 옛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행복과 평화가 그대로 전달되어 오는 듯했다.

 

성당 왼쪽 무성한 나무 사이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는 모습의 검은 대리석상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는데 우거진 나무 아래에서 미사를 드리는 순례팀이 보인다. 아저씨 한 분이 지키고 있다가 방해가 될까봐 그러는지 엄한 얼굴로 다가오지 말라고 손을 흔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예전의 이름 ‘시몬’으로 부르시어 베드로가 처음 부르심 받던 때의 처지로 되돌아갔음을 깨우쳐 주신다.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한 배반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슬픈 가운데서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받아들이시고 예수님은 더 큰 사명을 맡기셨다.

 

"나를 따라라.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15-19) 이러한 무조건적인 예수님의 신뢰는 오늘 나에게도 되풀이된다.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니?’ 나도 베드로처럼 대답한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날마다 주님을 배반하는 저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지, 하지만 이 모습 그대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받은 상처를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기회가 되면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조건 없는 예수님의 용서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자 굳은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무안하지 않게 나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는 주님, 그러면서 더 큰 부르심으로 이끄시는 주님, ‘주님, 배반과 악을 사랑으로 갚으시는 당신의 마음을 온통 저에게 쏟아주십시오.’

 

 

예수님의 마을 카파르나움

 

예수님의 공생활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카파르나움은 베드로 수위권 성당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예수님 시대의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에 인접한 중요한 상업 지역이었다고 한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고장(마태 9,1), 예수님의 집이 있는 곳(마르 2,1)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님의 공생활과 밀접한 곳이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첫 제자들 시몬 베드로 · 안드레아 · 야고보 · 요한을 부르셨다(마르 1,16-20; 요한 1,35-42). 그리고 세관에서 일하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태오)도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마르 2,13-14; 마태 9,9; 루카 5,27-28).

 

카파르나움은 어느 곳에서보다 예수님의 많은 기적이 행해진 곳이다.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 치유(마르 1,29-31), 죽었던 야이로의 딸 소생(마르 5,35-43), 마귀들린 이의 치유(마르 1,21-28), 중풍병자를 치유시키셨으며(마르 2,1-12), 고관의 아들을 낫게 하신 기적(요한 4,46-58) 동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님은 이곳 카파르나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기도하시는 일상을 보내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일상은 오늘도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이들이 나날이 더욱 그 순도를 높여가야 할 일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보고도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회개하는데 더디어 예수님께 크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 싶으냐?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마태 11,23)

 

‘예수님의 마을 카파르나움’이라는 팻말이 달린 문으로 들어서면 잘 가꾸어진 정원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베드로 동상을 만나게 된다. 한 손에 하늘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는 그 동상에서 크고 힘찬 베드로 사도의 위용이 느껴진다. 그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베드로의 집터 위에 배 모양으로 지은 성 베드로 기념성당이 있다. 5세기 초엽에 이미 베드로의 집터에 있던 경당이 갈릴래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경당은 614년 페르시아군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894년에야 프란치스코수도회의 발굴작업으로 시나고가와 베드로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사도 베드로의 집터에서 ‘베드로’라는 그리스어의 푯말과 어선 그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성당은 발굴된 유적지를 보존하기 위해 큰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배 모양으로 지어졌다. 외부의 모습이 보이도록 투명유리로 지어진 성당은 전체적으로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긴다. 우리는 어선의 내부 같은 성당 중심에 있는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오늘 신부님의 강론은 부르심에 관한 것이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신다. 사랑으로 주님을 따르라 하심은 나 혼자만의 부르심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주님 곁에 머물고 배우며 그분의 일을 하도록 부르심 받았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프란치스코수도회 수사님이 그렸다는 벽화들이 인상적이다. 가이드는 우리를 성당 아래로 데려가더니 투명한 유리바닥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 베드로의 집터가 보였다. 내려다보이는 집터를 보면서 예수님께서 아픈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하시는 모습을 상상했다.

 

베드로의 장모는 유능한 고기잡이 사위가 어느 날 갑자기 어부 일을 그만두고 예수님과 어울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참에 예수님을 집에까지 데려오자 그만 홧병이 난 게 아닐까. 그런데 장모는 자신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자 그 동안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바뀌는 걸 느낀다. 예수님에게서 전해지는 평온함, 확신을 느끼면서 사위 베드로가 왜 모든 걸 버리고 그분을 따르는지 이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못마땅함에서 오는 신경질적인 병이 금세 사라지고 예수님을 접대하는데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까. 누구나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의 인품에서 우러나는 자비와 사랑에 매료되었을 테니까.

 

베드로의 집터 위에 세워진 성당에서 나와 열대나무들과 꽃이 만발한 작은 정원을 지난다. 그곳은 작은 야외 전시장으로 발굴현장에서 나온 조각품들, 기둥의 일부, 돌로 된 절구, 포도주를 짜는 확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예수님 당시 주거지역의 풍경도 볼 수 있었다. 검은 현무암으로 된 집안은 대부분 좁았고 마당이 없었다. 문이 마주보이는 사이로 난 좁은 길이 큰길로 이어졌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 살다보면 이웃의 사정을 잘 알게 되는 이점도 있겠지만 부작용도 많았을 것이다. 우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이웃 몰래 먹을 수 없어 무엇이든 나눌 수밖에 없었을 테니 욕심스러운 이웃의 불편이 컸을 것 같다.

 

밤늦게 친구를 위해 이웃을 찾아온 친구에 대한 비유가 떠올랐다. 아무리 밤이 깊었어도 저렇게 붙어 있는 집이니 쉽게 찾아가 졸라댈 수 있었을 것이다. 잠을 깬 친구는 귀찮아서도 빨리 빵을 주었을 것이다. 저렇게 작고 복잡한 집안이니 동전을 잃어버린 여자가 그걸 찾기 위해 얼마나 애썼을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성지순례를 다녀오면 성경시대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던 선배 수녀님들의 말씀이 새삼 실감났다.

 

주거지역 옆으로는 흰 대리석의 유다인 회당 시나고가가 있었다. 우리가 보는 건물은 4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예수님이 “생명의 빵”에 관하여 말씀하신 회당 자리라고 한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순례를 하면서 자주 시간을 넘어서서 그분이 서 계시던 바로 그곳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경이로움으로 마음이 두근거린다.

 

카파르나움 주택가의 검은 돌로 지은 촘촘한 집들과 시나고가의 희고 웅장한 건물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우리는 다시 갈릴래아 호수 근처로 갔다. 갈릴래아 호수에 사는 물고기의 종류는 20여 종이나 된다는데 가장 많이 잡히는 물고기는 청어, 그 다음으로 ‘베드로 물고기’라고 하는 생선이라고 한다. ‘베드로의 물고기’라는 이름은 그리스도교가 생길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들어간 호수 근처 식당은 한국인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와 식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음식이 나왔다. 접시에 놓인 생선 튀김이 사람 수대로 놓여졌다.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에 덜 벗겨진 굵은 비늘과 억센 가시를 가진 생선으로 모양새가 험했는데, 바로 이것이 말로만 듣던 베드로의 물고기였다. 생선을 좋아하는 나도 알뜰하게 발라먹기가 어려웠다. 생선에 소금간이 전연 없는 걸 보니 역시 갈릴래아는 바다가 아니라 호수가 분명하다. 생선 튀김은 레몬 조각이 곁들여 나오긴 했지만 싱거운데다 느끼했기 때문에 고추장이 필요했다. 이런 생선은 간을 해서 조리거나 찜을 하면 더 맛있을 텐데 그런 요리법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올리브유로 튀겼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잠시 동안 호수 근처를 돌아보았다. 물 속에 잠긴 바위에 갈매기 몇 마리가 한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늘어진 나무 사이로 보이는 빈 의자가 운치 있어 보이지만 우리는 그곳에 앉을 시간이 없다. 짧은 산책 시간을 보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할 시간이 되어 버스를 타러 가는데 큰 키가 눈에 띄는 외국인이 보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회 서명원 신부님과 김광현 교수님 일행이었다.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길이고 그분들은 식사를 하러 이곳에 도착하신 것이다. 이국땅에서 아는 분을 만나니 더욱 신기하고 기뻤지만 만남의 반가움을 사진 촬영으로 대신하고 헤어졌다.

 

 

타보르 산,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기념성당

 

한낮이 되자 날씨가 더워졌다. 우리가 탄 버스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평야지대로 들어서서 산간지방을 향해 달렸다. 약 30여 분을 갔을까 주변 풍경이 눈 아래로 펼쳐지는 제법 높은 지대로 올라와 버스가 멈췄다. 그곳은 타보르 산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차를 바꿔 타는 중간 정거장으로 또 어김없이 기념품 상점이 있었다. 멀리 타보르 산 정상의 예수님 변모 기념성당 탑머리가 보인다. 해발 588m의 타보르 산,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산’이라고도 하는 그곳은 걸어 올라갈 수도 있지만 시간이 넉넉지 못한 우리는 두 팀으로 나누어 택시를 타야 했다.

 

나는 첫 번째로 봉고택시에 올라 약 십여 분쯤 가다가 차에서 내리니 주변 공기가 아주 청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널찍한 평지에 오래된 큰 건물들과 잘 가꾼 정원들이 있어서 산정상에 올랐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성당으로 걸어가는 길 양쪽으로 사이프러스 나무가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기념성당을 가운데로 오른편에는 성지를 관리하는 프란치스코수도원이 있었다. 왼편으로는 무너진 석조건물과 정원이 운치 있는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폐허가 남아 있었다.

 

두 번째 차를 타고 자매들이 모두 올라오자 가이드는 먼저 대성당 옆 오른쪽에 있는 전망대로 우리를 데려갔다. 산 아래로 벚꽃 같은 화사한 꽃을 가득 피운 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무성한 숲 뒤로 이어지는 산자락도 보인다. 그곳에서 마르코복음 9장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부분을 읽고 잠시 동안 묵상에 잠겼다. 그런 다음 가이드의 설명을 따라 산 아래로 펼쳐지는 동쪽으로 요르단 계곡과 골란 지방, 남쪽으로 널따란 이즈르엘 평야와 산악지대, 서쪽의 나자렛과 카르멜 산, 북쪽으로 갈릴래아 산악지대를 둘러보았다. 지명이나 지역을 모두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구약시대 때부터 중요한 의미가 있는 타보르 산의 전경을 마음에 담고 싶어 쉽게 시선이 돌려지지 않았다.

 

타보르 산은 이사카르 · 납탈리 ‧ 즈불룬을 구분하는 경계 지역으로 구약시대 때 가나안 족들이 섬기던 바알 신전이 있던 곳이다(호세 5,1 참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열두 지파가 땅을 나눌 당시 타보르 산은 즈불룬 · 이사카르 · 납탈리 지파 사이의 중요한 경계가 되었다고 한다(여호 19,10-19). 또 여예언자 드보라는 타보르 산에서 사람들을 모아 이즈르엘 평야에서 가나안 족과의 대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판관 4-5장).

 

신약시대 타보르 산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이루어진 곳이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전파 사명을 주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신 곳(마태 28,16-20)이기도 하다.

 

이렇듯 신구약에 걸쳐 중요한 의미를 지닌 타보르 산은 4세기경부터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여 ‘초막 셋’을 상징하는 커다란 성전이 세워졌다. 그 성전은 7세기 초에 페르시아 군에 의해 무너지고, 12세기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소유가 되었지만 십자군의 패망과 더불어 살라딘 군에 의해 다시 폐허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4백년 후 1931년에야 프란치스코수도회가 이슬람교 군주의 허락을 얻어 상주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의 순례도 자유롭게 되었다.

 

우리는 전망대에서 내려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기념성전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성당은 1924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성당 안은 외부의 밝음을 가라앉혀주는 차분한 느낌이었지만 모자이크가 화려했다. 2층의 중앙제대 벽에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을 표현한 모자이크 그림이 있었다. 중앙 제대 양편으로 모세 기념경당, 엘리야 기념경당이 있다. 아래층의 중앙 제대는 윗층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기념경당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둥근 아치형의 창은 불멸을 상징하는 공작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었다. 공작의 활짝 핀 날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아 아름답고 고고한 기품을 풍겼다.

 

순례자들은 아치 양편에 놓인 의자에 앉아 둥근 천장화를 볼 수 있다. 그곳엔 예수의 탄생, 어린양이신 예수, 부활하신 예수, 성체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미하며 경탄하는 천사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들을 통해 구원자 예수님의 여러 면을 묵상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사실 때 타보르 산에 여러 차례 올라가셨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타보르 산에서 예수님은 산 아래로 펼쳐지는 평야를 바라보면서 요셉과 마리아가 들려준 구약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이스라엘 민족 안에 이루신 하느님 역사의 완성을 위해 파견된 자신의 신분을 의식해 가가지 않으셨을까. 또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발현 장소를 타보르 산으로 정한 것은 신구약에 드러나듯이 이스라엘 민족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곳임을 전제로 하신 것일 게다. 성당에서 나와 차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혼자 여행하는 한국 청년을 만났다. 경북 포항에서 혼자 성지순례를 온 청년이라는데 신부님과 가이드와 잠깐 인사를 하는 듯 보이더니 다시 걸어서 산을 내려간다.

 

 

카르멜 산(MOUNT CARMEL)

 

이스라엘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맥 동쪽은 이즈르엘 평야가, 서남쪽으로는 샤론 평야가 펼쳐진다. 제일 높은 곳이 해발 546m이라고 하는 카르멜 산 끝자락, 엘리야의 기적이 일어난 전설적인 장소에 세워진 카르멜수도원을 찾아갔다. 가는 길에 가이드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이즈르엘 평야에 쌓인 돌무더기를 가리키며 그곳이 고대 팔레스타인 중요 도시였던 므깃도라고 알려주었다. 현재는 메깃도(Tel Megiddo)라고 부르는 그곳은 옛날 무역 중심지로 페니키아 여러 도시들과 예루살렘, 요르단 강 유역까지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솔로몬 때 건축한 성벽, 성문, 저택들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 마구간이 어림잡아 450마리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고 하니 솔로몬의 전차대와 말 교역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1열왕 9,15). 923년경 이집트의 시삭(Sisak)이 므깃도를 침략하여 파괴하였고 그 후 아합 왕 때 다시 재건되었다. 요시야 왕이 북진하는 이집트 군대를 이곳에서 맞아 싸우다가 전시한 곳이기도 하다. 카르멜 산악지대로 이어지는 길 들판에 고대부터 이어지는 인류의 흥망성쇠의 역사가 돌무더기와 잡풀들에 싸여 잠자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포도밭’이라는 의미의 카르멜 산은 히브리어로 ‘케렘’ - ‘포도밭’, ‘과수원’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처럼 대부분 민둥산인 이스라엘의 산들과 달리 숲이 무성했다.

 

카르멜 산은 어느 산봉우리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드넓게 펼쳐져 있는 산악지대 전체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기원전 16세기의 이집트 문헌에도 ‘거룩한 산’으로 기록될 만큼 카르멜 산은 옛날부터 신성한 산으로 전해졌다. 구약성경에서는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엘리야가 바알 신을 섬기는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한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1열왕 18,20-40). 이렇게 유장(悠長)한 역사가 담긴 카르멜 산 지역은 현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아름다운 숲이 이어지고 이름 모를 풀꽃들과 화려한 양귀비꽃이 어우러져 순례객들의 눈길을 끈다.

 

우리가 카르멜수도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가 넘었는데 수도사들이 기도하는 시간이라서 문이 닫혀 있었다. 이 수도원이 있는 주변이 바로 기원전 860년경 북부 이스라엘 아합 왕 때 엘리야가 바알신 숭배자들과 대결한 곳(1열왕 18장)으로 ‘무흐라카’ 곧 ‘불의 장소’, ‘불이 내려온 곳’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갖고 있다. 우리는 수도원 담밖에 있는 바위 위에 올라가 수도원 정원에 있는 칼을 휘두르는 엘리야 예언자의 석상 뒷모습만을 보고 돌아서야 했다. 수도원에 들어가 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섭섭했다.

 

12세기경 성지 탈환을 위해 참전한 십자군 중 프랑스 기사들이 엘리야가 450여 명의 바알 예언자들을 물리친 다음 아합 왕의 보복이 두려워 피신했던 동굴(1열왕 19,8-13) 근처에 모여 엘리야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수도 생활을 시작한 것이 오늘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카르멜회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카르멜수도회는 특별한 창설자가 없이 구약을 거쳐 신약에 이르는 성경을 토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수도회 삶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날이 저물었다. 우리는 예루살렘 시 중심가로 들어가 그랜드 코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드디어 오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머물게 된 것이다. 해발 700-800m 높이의 산악 지역에 위치하며 ‘평화의 도시’, ‘평화의 근원지’라는 의미를 지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수도이다. 예루살렘은 세계 3대 유일신 종교인 그리스도교 · 이슬람교 · 유다교의 신앙의 중심지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루살렘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구원을 완성하신 거룩한 장소이다.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마호메트가 승천한 성지요, 유다인들에게는 영원한 다윗의 도성으로 정신적인 고향이다. 이처럼 여러 종교의 중요한 성지 예루살렘은 첨예한 종교 간의 갈등으로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과 달리 끊임없이 전쟁이 계속되는 ‘평화가 필요한 도시’이다.

 

일반적으로 예루살렘 성지라고 하면 술레이만 2세(1520-1566 재위)에 의해 1532년-1539년 사이에 재건과 보수가 계속되었던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말한다. 현재는 구시가지의 모체였던 다윗 도시 터와 그리스도교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시온 산은 성벽 밖에 위치하고, 유다교 · 이슬람교 · 그리스도교 · 아르메니아 정교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호텔에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있었다. 유다인이 경영하는 호텔이어서 전에는 유다인에게 금기시 되는 돼지고기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인지 뷔페식 식당에는 신선한 과일과 다양한 종류의 고기, 생선들로 풍성했다. 한국을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다. 날마다 새롭고 의미 있는 성지를 돌아보는 것이 흥미롭고 즐겁지만 빡빡한 일정에 지칠까봐 가이드는 우리에게 음식을 골고루 많이 먹으라고 한다.

 

 

목자들의 들판

 

예루살렘에서의 날이 밝았다. 오늘은 지도 신부님의 절친한 후배이며, 이스라엘에서 안식년을 지내고 있는 신부님이 우리 순례에 동행하신다고 했다. 또 이스라엘에 파견근무를 하고 계신 무관 한동욱 베드로님과 부인 세레나 자매, 딸 제르트루다가 순례 출발 시간에 맞춰 호텔로 오셨다. 우리는 새로운 분들의 출현이 반가워 떠들썩하게 인사를 나누며 차에 올랐다. 우리는 우선 시온 산 성지로 가면서 성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우리의 첫 행선지는 돌로 된 성채처럼 우람한 건물 사잇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성모영면 기념성당이었다. 하지만 성당 문이 열리지 않은 이른 시간이어서 베들레헴으로 방향을 바꿨다.

 

목자들의 들판과 예수성탄 기념성당이 있는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아랍인 지역이다. 우리가 탄 차는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게이트 앞에 있는 베들레헴 체크포인트 앞에서 멈췄다. 그곳은 바로 팔레스타인 지역과 유다인 지역을 구분하는 분리 장벽이 시작되는 곳으로 유다인들의 검문소가 있었다. 이스라엘 안전 요원들이 방탄 유리 건너편에 앉아 순례자들에게 여권과 허가증을 보이라며 엄격하게 검문을 했다. 검문소 주변엔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총을 멘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분위기도 험악했다. 우리는 모두들 긴장한 얼굴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여권을 꺼내들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차에서 내리게 하더니 아랍인 버스 기사의 신분증을 확인하는 것으로 검문을 마쳤다. 차는 다시 달려 아랍인 거주 지역으로 들어섰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천년 전 한밤중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에서 양들을 지키던 가난한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구세주의 탄생을 알려주었다는 그곳엔 우리나라의 벚꽃처럼 생긴 화사한 아몬드 꽃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옛날의 자연동굴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목자들의 들판에 서서 루카복음 2장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으로 아름답고 성스런 그 밤의 정경을 묵상했다. 겨울이라지만 한의 봄날 같은 온화한 날씨여서 언덕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다. 눈앞으로는 들판과 구릉이 보였는데 그 옆으로는 아파트 같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 풀을 뜯고 있는 진짜 양들을 보자 우리 모두는 탄성을 질렀다. 그 옛날 거룩한 밤에 목동들과 함께 있던 그 양 떼를 우리도 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들판 여기저기에 사람이 들어가 쉴 만한 석회석 동굴이 있어 우리가 몸을 구부리고 들어가니 작은 제대가 있어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하늘에 천사들의 군대가 나타나 목자들에게 구세주의 탄생을 알려주었다는 이 들판은 베들레헴에서 동쪽으로 약 3.2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밤이었지만 그 당시 양을 치던 젊은 목동들은 아마 30여분 만에 아기 예수님이 계시던 곳까지 달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찬 기운이 내려앉는 유난히 환했던 그 밤, 몸을 녹일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아 졸거나,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양 떼를 지키고 있었을 가난한 목동들, 선택받은 이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변두리 들판에서 양 떼를 돌보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맨 먼저 기쁜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천사의 말을 들은 목자들은 그 밤으로 구세주 아기를 찾아간다.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아기는 소외된 삶을 사는 목동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으려고 그들과 같은 가난한 처지를 택하셨다. 이것은 사람들 사이에 천막을 치신 구세주 예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지금 이 들판에 보이는, 우리가 허리를 굽히며 들어갔던 그 동굴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목동들이 피곤한 몸을 쉬던 동굴 위에 세운 목자들의 기념성당을 둘러보았다. 이곳의 바위 천장에 뚫린 별 모양의 구멍에서 내리비치는 빛은 바닥의 모자이크로 된 별에 가 닿는다. 이는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큰 별이 머문 위치를 나타낸다고 한다. 지금은 목자들의 들판과 베들레헴의 예수님 성탄 성당 사이에 잘 닦여진 도로가 생겨 차를 타고 가게 되니 그 옛날 거룩한 밤 별빛을 쫓아 목자들이 달려갔던 들판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목자들처럼 꾸밈없고 가난한 마음에 구세주가 오시는 그 순수한 마음에 깊이 담는 것으로 그 느낌을 대신해 본다.

 

[회지 하나되어 38호(2012년, 성바오로딸수도회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발행), 김 가브리엘라 수녀(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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