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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구원을 위해 은총만으로 충분한가

59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9-26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구원을 위해 은총만으로 충분한가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따라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이를 위해 인간의 공로가 필수적인가? 이 물음은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지속해서 커다란 논쟁을 일으켰다.

 

성경 안에서도 상반된 입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들이 발견된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라는 구절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신의 은총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 2,14)라는 구절에는 믿음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곧 인간의 공로 없는 구원에 대한 강한 비판이 나타난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답해야 할까?

 

 

아우구스티노와 펠라지우스의 논쟁

 

이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원죄론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신의 은총에 대해 강조했다. 그러나 펠라지우스(Pelagius, 360?-420?)라는 유명한 설교가는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부터 죄의 본성을 물려받았다는 주장은 인간의 모든 노력을 송두리째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오직 은총의 선물이라는 주장은 결국 사람을 전적으로 무능력하게 만들어 파국에 이르게 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펠라지우스는 인간이 아담을 모방하려는 유혹을 굳은 의지로 극복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개인의 공로(merita)에 따라 신의 은총을 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펠라지우스는,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이 확산한다면 신의 은총이 값싼 은총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을 접하게 된 아우구스티노는 펠라지우스의 사상 안에 매우 위험한 ‘위장된 자기 구원론’이 숨어 있다고 반박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인간이 오직 피조물의 본성과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토대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면 신의 아들은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었는가?” 그는 선을 결정하는 데 신의 은총이 필요하고 원죄를 극복하려면 세례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유아 세례를 옹호했다.

 

인간은 늘 거저 주어지는(gratuitas) 신의 은총을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강제로 요구할 수 없다. 펠라지우스를 단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교회에서는 아우구스티노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은총만으로’를 강조한 개신교는 가톨릭 교회를 반-펠라지우스파라고 비판하는 일이 벌어졌다.

 

 

「신학대전」에 나타난 은총의 다양한 구분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이전의 오랜 논쟁들에 쓰인 ‘은총’이란 단어가 매우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원죄에도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신의 특별한 은총이 없이도 선을 행할 수는 있다. 물론 인간의 존재, 자연적 지식은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자연적 조명(illustratio naturalis)을 비롯한 모든 것이 실은 신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이 단계를 가리켜서는 은총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참인간이 되는 문제와 관련된 높은 예지적인 것을 알려면, “인간은 본성적 힘에 추가된 은총의 힘이 필요하다”(I-II,109,2). 따라서 아퀴나스에게 은총이란 일차적으로 인간의 자연적 능력에 더해진 초자연적 선물이다.

 

아퀴나스는 이 초자연적인 은총도 논의되는 맥락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게 구분한다. 우리는 여기서 각 개인이 구원을 얻고자 노력하는 단계에 꼭 필요한 은총이 서로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살펴보겠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원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본성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는 먼저 ‘치유하는 은총’(gratia sanans, I-II,109,4)이 필요하다.

 

“인간이 신에게로 돌아서는 것은 신이 그들을 돌아서게 하는 것 없이는 불가능하다”(I-II,109,4). 따라서 새로운 길을 시작하려면 타락한 인간 본성을 치유해 주는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

 

이 은총은 원죄로 부패했던 인간의 본성이 회복되는 의회(justificatio)를 가능하게 해 준다는 측면에서 ‘의화 은총’(gratia justificans)이라고도 불린다. 개신교에서는 ‘칭의 은총’이라고 번역하며, 이 은총을 통해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퀴나스에 따르면 이 의화 은총은 궁극적인 구원으로 나아가는 시발점일 뿐이다. 의화로 본성을 회복했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니다(I-II,109,8). 따라서 이렇게 은총으로 치유된 인간이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신의 직접적인 도움이 더 필요하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의지를 움직여서 선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주는 은총을 ‘자력(自力) 은총’(gratia operans)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미 선으로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의지가 된 기능들을 신이 지탱해주는 ‘협조 은총’(gratia cooperans)이 필요하다(I-II,111,2). 이런 은총들의 도움으로 인간은 목적을 향해 가는 길에서 진보를 이루게 된다(I-II,114,8).

 

그러나 인간은 은총의 순간을 체험하고서도 계속해서 다시 죄의 나락으로 떨어지곤 한다. 따라서 의인도 모든 유혹의 그물을 거슬러 은총 상태에 항구하게 남아 있는 데에는 바로 ‘궁극적 인내심’(perseverantia finalis)의 은총이 필요하다(I-II,109,10).

 

이 모든 은총의 도움으로 드디어 인간은 영광스럽게 될 수 있다. 지복직관이라는 완성에 이를 수 있게 해 주는 은총이야말로 엄격한 의미에서 ‘성화 은총’(gratia sanctificans)이라고 불릴 수 있다(I-II,109,6). 이렇게 목적이 제시된다는 측면에서 성화 은총은 이미 우리가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작용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은총은 개인들의 죄와 잘못에도 계속해서 남아 있다는 측면에서 ‘상존 은총’(gratia habitualis)이라고도 불린다. 상존 은총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회개의 시작이나 성화 활동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개입을 통칭하는 ‘조력(助力) 은총’(gratia actualis)과는 구별된다.

 

이렇게 은총이 작용하는 다양한 단계를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은총은 치유하고, 작용하고, 협력하고, 인내심을 주고, 영광스럽게 만든다(I-II,111,3).

 

 

아퀴나스의 은총과 공로 사이 균형 잡기

 

아퀴나스는 오랜 논쟁으로 점철된 은총과 공로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서도 ‘중용의 길’을 찾아낸다.

 

선행의 공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의 은총으로 돌려야 하고, 그다음으로 신앙인에게 돌릴 수 있다(I-II,114,1). 물론 ‘상존 은총’은 그것을 받을 만한 준비가 된 수용자에게만 부여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도 맞갖은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신의 은총이 주어져야 비로소 인간이 선을 향해 움직일 수 있으니 인간 측이 준비가 신의 은총에 앞서 올 수 없다(I-II,112,2).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나 업적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고 구원받았다고 추론할 수 없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노와 같이, 인간은 신의 은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아무도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회개와 용서와 의화의 기원이 되는 최초의 은총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의 은총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대체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위에서, 곧 질서가 다른 더 높은 차원에서 일하며, 인간을 참으로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다.

 

오히려 은총을 통해서 아담이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할 때에만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최초의 은총을 받은 우리는 성령과 사랑의 인도를 받아, 우리의 성회를 위해,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요한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공로를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세우는 공로는 자신의 이기적인 구원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이웃과 교회의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9월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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