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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죽음에 대한 성찰: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 살아서도 죽어서도 아파트?

39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6-23

[죽음에 대한 성찰 –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살아서도 죽어서도 아파트?

 

 

‘사람이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

 

천장이 높으면 창의력이 증가한다는 학설이 있음을 아시는지요? 대학 강의실을 세미나실 형태로 바꾸지 않으면 우리 대학의 미래가 없다는 주장을 들어보셨는지요?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 위치를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꾸준하게 나오는 것 아시는지요? 모두 공간의 중요성을 말해 주는 예입니다.

 

이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사유와 행위 양식이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부정하긴 어려울 겁니다. 평생 산만 보고 산 사람과 바다만 바라보고 산 사람의 삶의 양태가 같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똑같이 생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판박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오히려 놀라운 일이 아닐는지요.

 

어떤 공간에서 사는지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의미 체계의 실천이기에,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사회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미니어처 아파트’ 납골당

 

언론에서 가끔 접하는 납골당(봉안당) 광고, 언뜻 보고 ‘숲세권’ 아파트 광고인가 했습니다. 납골당 광고임을 알고 좀 착잡했습니다. 모양새, 위치에 대한 자랑은 물론 지금 사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는 ‘협박’까지, 어쩜 그리 아파트 광고와 닮은 꼴이던지요.

 

‘아파트 공화국’이란 오명을 지닌 대한민국, 급기야 죽음의 공간마저 ‘미니어처 아파트’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화장이 증가하면서 급격히 늘어난 납골당. 모든 납골당이 똑같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납골당 상당수는 딱 작은 아파트처럼 보이지 않는지요?

 

살아서도 아파트, 죽어서도 아파트, 생각만으로 멀미가 납니다. 개인적으로는 죽어서까지 층층 아파트는 사양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납골당은 애도에 적절한 공간일까

 

아파트 판박이 외형 말고도 현재의 납골당 공간이 추모에 적합한지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의문입니다. TV 드라마에 가끔 납골당이 나오지요. 혹시 눈치채셨나요? 배우가 참배하는 납골단의 위치는 거의 다 그가 선 상태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유는 자명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화면 모양새가 좋지 않겠지요. 그 말은 뒤집으면 다른 층의 납골단들은 추모에 그리 적절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 때문에 아파트와 똑같이 위치별로, 층별로 가격 차이가 난다는 것도 비밀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는 평균적 납골당의 모습이 애도의 장소로서 충분한가도 의문입니다. 일단 너무 좁습니다. 납골단 하나의 너비는 한 사람 정도가 그 앞에 서면 꽉 찹니다. 두세 명이 같이 간다고 치면, 얼굴도 모르는 다른 분 납골단 앞에 서야 하겠지요. 꼭 그 앞에 서야 하냐고요? 마음이 중요하지 않냐고요? 그렇다면 사실 굳이 납골당까지 갈 이유는 또 무엇인가요, 마음이 중요한데….

 

그리고 보통 선 채로 참배하는데 얼마나 오래 그곳에 머물 수 있을까요? 그 공간은 과연 추모의 공간입니까, 보관의 공간입니까?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성냥갑 같은 아파트의 축소판, 석재의 과도한 사용, 협소하고 과밀한 납골단 배치, 죽음의 공간에서조차 난폭하게 드러나는 원색적 자본주의…. 아무리 양보를 해도 이 공간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재주가 없습니다.

 

 

적절한 애도의 공간은 왜 필요한가

 

물론 우리 죽음의 모습은 삶의 연장일 수밖에 없으니, 살아서 똑같은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공간이 갑자기 개별적이고 우아하고 품위 있기를 기대하긴 어렵겠지요. 삶의 공간 판박이인 편이 차라리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공간이 우리 삶의 다른 표현이라면, 어딘가에서부터는 변화의 시작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기본적으로 왜 적절한 애도의 공간이 필요한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전쟁, 기근, 전염병 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죽어 어찌할 수가 없게 되자 굴착기와 같은 중장비로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매장하는 모습을 영화에서라도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끔찍하지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그리 끔찍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요? 어차피 시신은 고통을 못 느낄 테고, 우리 모두 다 흙으로 돌아가는데, 위생적으로 경제적으로 잘 처리만 하면 되지 않겠는지요?

 

거의 모든 분이 이 말에는 동의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편리, 위생, 경제적 잣대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죽었으니까요. 나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거나 죽을 것이니까요. 그래서 제주 4‧3 사건 당시 이름 없이 한 동굴에서 몰살되신 분들을 기리며 만들어진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우리는 당시 돌아가신 모든 분의 한 자손이라는 뜻을 지닌 가묘 단지)’ 앞에 서면 가없는 먹먹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실상 우리는 이미 죽음에 관한 많은 것을 편리, 위생, 경제적 잣대로 환원시키지 않는지요? 우후죽순 만들어지는 미니어처 아파트 같은 납골당이 우리 사회의 안타까운 현실을 그대로 말해 주지 않나 합니다.

 

 

찾아갈 수 있고 찾아가고 싶은 ‘죽음의 공간’

 

꼭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삶에 경건함이 필요할 때, 내면에 침잠하고 싶을 때, 끝에서 다시 시작을 준비할 때에 찾아갈 수 있고 찾아가고 싶은 그런 ‘죽음의 공간’, ‘기억, 사유와 성찰의 공간’이 생각나시는지요? 그곳이 납골당인지 묘지인지 수목장림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고맙게도 우리나라에서도 떠오르는 곳이 몇 있긴 합니다.

 

언젠가 ‘무덤 세계 여행’을 하리라 마음먹고 있는데, 꼭 가 보려는 곳 가운데 스웨덴이 있습니다. 오로지 우드랜드 묘지 때문입니다. 건축가 승효상 선생님 책에서 보았던 우드랜드는 정말 경견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탐이 날 만큼 우아하고 품위 있는 죽음의 공간을 지닌 스웨덴이 부러웠습니다. ‘성서적 풍경’이라 불린다는 곳, 내가 죽어 머무를 공간이 저런 모습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국가의 품격’을 말하곤 하지요. 사회 구성원의 마지막을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도 국격의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교회가 앞장서서 좋은 본보기를 만들어 주기를 기대합니다.

 

* 천선영 율리아나 -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20년 5월호, 글 천선영 율리아나,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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