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자료실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6일 (금)부활 제4주간 금요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신학자료

sub_menu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8세기 후반 정약용의 서학(西學) 연구와 사회개혁 사상

113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1-22

18세기 후반 정약용의 서학(西學) 연구와 사회개혁 사상

 

 

본고는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성장기에 큰 영향을 준 두 가지 사고 중에서 외적요인인 서학(천주교)의 영향력에 주목하여 그가 언제 어떠한 서학서(천주교서적)를 어느 정도 읽고 소화하여, 과연 그 학습한 내용을 얼마만큼 그의 현실 개혁적 사상을 수립하는데 활용할 수 있었는지 하는 문제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다산은 1784년부터 1791년까지 대략 8년간 7~8종의 서학서(천주교서)를 열람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중에서도 그의 개혁적 역사관을 추동할 수 있는 사회교리를 담고 있었던 대표적인 서적이 바로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진도자증(眞道自證)》이었다.이 책들에는 민중의 추대에 의한 위정자 선출이라는 참여 민주주의적 사고를 제공한 교황제도에 대한 언급이 공통적으로 있었으며, 백성들의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지향하는 제도의 개혁을 추동할 수 있는 재산의 공유와 모든 인간의 평등에 대한 원칙적 개념, 그리고 현실적 불평등을 개선해나가는 온건한 방법론, 노동생산의 계획, 지식인의 정신노동과 계몽적 역할 등에 대한 언급과 기존의 지리적 중화주의 사상의 한계성을 초월하는 개방적 세계관 등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사회교리들이 담겨 있었다.

 

 

Ⅰ. 머리말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집대성자로 조선후기 사상사 연구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수많은 이들이 다산의 사상에 대해서 연구해 왔으며 그의 다양한 사상적 편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기타의 측면에서 여러가지 방법론을 동원하여 그의 사상적 특질을 다양하게 해명하고 그 사상이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결론을 도출해왔다. 필자는 본고에서 다산에 대한 기존의 무수한 연구분야 중에서도 사상사적 측면에 한정하여, 그중에서도 서학1)과 다산의 관계를 논증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이글을 전개하고자 한다.그리하여 젊은 시절 다산의 서학연구의 실상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러한 서학 연구의 결과가 그의 개혁적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상관관계에 대해서 사상사적 방법으로 해명하고자 한다.

 

본고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선행연구 성과들은 서학의 성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으로 대별된다. 《천학초함(天學初函)》(李之藻, 1628년)의 분류에 따를 경우, 서학(西學)은 ‘이(理)’적 측면의 서학, 즉 천주교(天主敎)와, ‘기(器)’적 측면의 서학, 즉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로 세분된다.2)

 

다산과 서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1836년 다산 선종후 176년이 지난 2012년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지속적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왔다. 이 문제는 분명히 순수한 사상사적 고찰의 대상이라는 측면 외에도, 연구자의 학문외적 의리나 종교적 관점에 좌우된 측면도 있었기 때문에 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충돌을 거듭해올 수밖에 없었고 객관적인 해법을 도출하기 위한 고심도 많았다.3) 조선후기 사상사에서 유교와 서학의 관계를 연구해온 한 중견 연구자의 이 분야 연구사 정리에 의하면, 다산사상과 서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의 경향을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대별했는데, 그 하나는 다산의 천주교 신앙적 생애와 이를 통해서 본 다산학 내지 다산사상의 서학적 요소를 검출하는 외형적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다산의 저술에 나타난 다산사상과 서학의 관계를 살펴보는 내면적 연구이다.4) 필자의 본고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겸한 고찰로서, 다산학 가운데서도 특히 경세학(經世學)에 속하는 조선 사회 개혁사상을 피력한 사환기(仕宦期) 다산의 저술에 포함된 서학사상 내지 천주교의 영향력을 분석해본 논고이다.5)

 

필자는 본고를 쓰기 전에도 다산 서학의 연구 성과를 분석해본 적이 있는데6), 특히 다산이 젊은 시절 읽었던 것으로 확인되는 서학서(西學書)의 대표격인 《천주실의(天主實義)》의 내용을 분석하여, 1801년 유배 이전 시기에 다산이 쓴 개혁사상 관련 논문들의 내용과 상호 비교 분석해 본 적이 있었다. 필자와 마찬가지로 다산 서학사상의 내용을 그가 읽었던 《천주실의》의 내용과 비교, 분석해본 몇몇 논문들이 나왔지만7), 다산이 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종류에 이르는 서학서의 내용을 분석하여, 이를 다산사상(茶山思想)의 특징적 내용들과 비교 분석하여 전자가 후자에 미친 영향을 구조적으로 분석해본 논문은 없었다. 필자는 이러한 작업을 장기적 연구과제로 삼아, 본고에서는 우선, 다산이 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서학서(천주교서)들의 내용이, 다산사상 중에서도 그의 젊은 시절(=1801년 유배 이전)에 표방된 개혁사상의 형성에 끼친 영향만을 중점적으로 조명해보았다.

 

 

Ⅱ. 서학 연구의 추이와 열람 서학서의 목록


1. 서학 연구의 추이(유소년기~1800년)

 

지금까지 다산에 대해 연구한 이들은 다산의 생애를 몇 시기로 구분하여 다산사상(茶山思想)의 다양한 측면이 나타나게 된 개인적 삶의 배경과 시대적 현실을 분석하고자 했다.8) 필자도 이전의 논문에서 다산 사상의 특징이 1801년 유배 이전과 이후의 시기로 크게 나뉘어 변화되는 것으로 파악했다.9) 물론 다산사상의 어떤 부분은 젊은 시절 형성된 것이 한평생 지속되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생애의 각 시기별로 약간씩 변화되더라도 전체적인 통일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본고를 통해 해명하고자 하는 다산의 개혁사상(改革思想)의 경우 1801년 신유박해(=관찬기록의 辛酉邪獄)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생활환경이 크게 바뀜으로 인해서 유배 이전시기 즉 다산의 젊은 시기 개혁적 사고가 유배 이후 일정한 측면에서 상당한 정도로 후퇴하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난다고 파악된다.10) 또한 다산이 서학서를 접하고 개인적으로 그 내용을 열람하거나, 또는 서학서 연구모임에 참가하여 서학의 내용을 토론하거나, 천주교 신자로서, 동료 신자들과 함께 교회활동에 참가하던 시기 등 그가 몸담고 있던 주위환경으로부터 오는 서학의 현실적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던 시기가 아무리 길게 잡아도 1801년을 넘어갈 수 없다. 특히 1801년은 천주교 박해를 계기로 당시 세도정권이 조선의 모든 지식인을 포함한 백성들에게 천주교 서적과 서양과학 기술관련 서적을 포함한 일체의 서학서에 대한 공식적 금서령(禁書令)을 내린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다산이 1801년 이후에도 서학서를 접하고 이를 연구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매우 어려웠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필자는 본고에서 연구의 대상시기를 1801년 이전, 즉 18세기 후반, 다산의 진보적 개혁의식이 살아있던 득의(得意)의 젊은 시기, 일명 다산의 사환기(仕宦期)로 제한하여 연구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다산이 그 일생을 통해서 서학과 일정한 관련을 맺었는데, 그가 ‘자찬묘지명’(광중본)에서 언급한 다음의 회고를 바탕으로 삼아, 서학과 다산의 관련성 정도를 분석해볼 수 있다.

 

㉮ 상상(上庠)하여 이벽(李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 정미년(1787, 정조 11)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 신해년(1791, 정조 15)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

 

㉱ 을묘년(1795, 정조 19) 여름에 중국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하여졌다. 이에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豪族)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 등이 서교의 일로써 발계(發啓)하여, 이가환 · 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下獄)되었다. 얼마 뒤에 두 형 약전(若銓)과 약종(若鍾)도 용(鏞)과 함께 체포되어 하나는 죽고[사형] 둘은 살았다[유배].

 

이상과 같은 언급을 통하여, 필자는 다산이 주위 환경의 영향으로 자의든 타의든 서학에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1801년 이전의 시기도 다음과 같은 몇가지 기준을 근거로 여러 시기로 다시 세분하여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구분 기준은 첫째 다산이 주위의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서학서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던가? 둘째 다산이 천주교 또는 서학연구와 관련된 모임에 참가할 수 있었던가? 셋째, 서학 또는 천주교와 관련된 일체의 관계를 그 스스로 어떻게 규정했던가 등을 따져보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감안하면서, 앞서 인용한 다산 자신의 서학 관련 언급(㉮~㉲)을 따라서 1801년 이전 다산의 생애는 모두 5시기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 시기구분의 계기가 되는 변곡점은 각각 1784년, 1787년, 1791년, 1795년이다. 1784년은 다산이 그 자신의 회고와 국왕 정조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최초로 천주교 서적을 접했다고 하는 시점이고, 1787년은 다산이 바야흐로 서학사상에 심취하여 가장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하던 시기이며, 1791년은 호남 천주교 신자 윤지충, 권상연의 폐제분주(廢祭焚主) 사건으로 전국에 걸쳐 조정의 공식적인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진 시점으로서 다산 스스로 서학과의 관계를 정리(단절)하고자 결심하였던 시점이며, 1795년은 다산이 천주교와 관련된 혐의로 공적 견제인 좌천에 처해진 시점으로서 다산이 서학과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종전의 소극적 태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서학을 배척하고 천주교를 탄압하던 시점이다.

 

 

1) 서학에 처음 접촉한 시기 : 출생(1762년) 이후~ 1783년까지 서학서 열람 여부는 불명.

 

다산은 그 자신의 회고록이자 자서전인 위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壙中本)에서, 상상(上庠)한 후, 곧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한 후, 이벽과 교유(交遊)하면서 서교(西敎=천주교)에 대해 처음 듣고 서학서(西學書)를 처음 보게 되었다고 말했다.11) 여기서 그가 성균관에 입학한 시점은 과거공부를 하면서 초시(初試, 生員進士科)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된 후, 곧 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던 갑진년(=1783년) 봄에 해당된다.12) 그러나 아래 본고에서 다루게 되겠지만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集中本), 〈사암선생연보〉 등에 의하면 그가 이벽에게서 처음 천주교에 대해서 문견한 것은 갑진년(=1784년) 봄이므로, 다산이 서학서를 보게 된 것은 성균관에 입학한 그 다음 해라고 할 수 있다.

 

엄밀하게 따져볼 때 1783년 이전에도 그가 서학(西學)을 접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것은 그가 4세 때(=1765년)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 때(=1768년) 오언시(五言詩)를 짓고, 10세 때(=1771년)부터 부친 정재원(丁載遠)에게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배우기 시작하여, 마침내 16세 때(=1777년)는 성호 이익(李瀷)의 글[遺著]을 읽고 기쁜 마음으로 학문[儒學]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다산이 16세 때 성호 이익의 저서를 접하게 된 것은 성호학파의 일원이었던 이가환(李家煥) 및 자형(姊兄)인 이승훈(李承薰) 등과 학문적으로 교유하면서 비롯된 일이었고, 성호의 유저 가운데에는 서학(西學)과 관련하여 언급한 부분이 다수 있었기 때문에, 성호의 학문을 사모했던 다산이 이즈음부터 이가환, 이승훈 등 성호학파 선비들의 영향으로 서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산은 16세부터 이가환, 이승훈 등과 함께 성호가 남긴 유저를 읽으면서 성호를 사숙(私塾, 祖述)하였기에, 성호가 관심을 두고 언급했던 서학(西學)에 대해 다산도 호기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시기에 이미 서학서를 한두 번 시험삼아 보았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만은 없게 된다. 더구나 당시 성호의 제자인 녹암 권철신(權哲身)을 수장으로 하던 녹암계(鹿庵系)의 여러 학자들이 양근, 여주, 광주의 산사에서 종종 강학(講學)을 개최하다가, 1779년 무렵에는 마침내 유학과 함께 서학(西學)까지도 집단 학습하기에 이르러, 그때까지 조선에 이미 전래되었던 서학서를 여러 학자들이 함께 독서하고 토론을 벌였을 것이기 때문에, 다산은 이 강학에 참여했던 형(정약전)을 통하여 최소한 천주교와 서양과학을 포함한 ‘광의의 서학’에 대해서 몇 마디 이야기는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다산이 교유했던 이가환과 이승훈 및 다산의 형 정약전 등은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 앞서 모두 수학과 기하학 등 서양과학에 적극적인 관심이 있었고 다산도 그 영향을 받아 수학, 기하학, 천문, 역법 등에 상당한 지적 호기심을 두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다산이 아직 ‘광의의 서학’ 중 한 분야인 천주교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때문에 이로부터 40여년 쯤 지난 1822년 자찬묘지명을 지을 때 회고(回顧)에서 1770~1780년대 초반 그가 천주교와 관여한 일이 생각나지 않아서, 1783년 성균관에 입학한 후 이벽과 교유한 때부터 서학서[천주교서]에 접하기 시작했다고 기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이벽의 설교를 듣고 서학서를 열람하던 시기 ; 수표교, 명례방 집회기

1784년 봄~1786년, 천주실의, 칠극, (영언여작, 주제군징) 등을 열람

 

다산이 서학서 중에서도 천주교 서적에 접하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자찬묘지명(광중본) 외에도 자찬묘지명(집중본), 선중씨묘지명 등 자신의 회고기록에서 언급했고, 이와는 별도로 천주교회 측에서도 관련기록을 남기고 있어 당시 상황을 검토할 수 있다.

 

㉮ 일찍이 이벽(李檗)과 교유(交遊)하다가 역수(曆數)의 학(學)이 있다는 말을 듣고, 기하원본(幾何原本)을 연구하여 그 정미하고 오묘한 것을 분석하였으며 마침내 새로운 서교(西敎, 천주교)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 갑진 4월 보름날 맏형수의 기제(忌祭)를 마치고 우리 형제가 이덕조(李德操, 이벽)와 함께 배를 타고 내려갈 때 주중(舟中)에서 천지조화(天地造化)의 시작과 형신생사(形神生死)의 이치를 듣고 황홀하여 망연자실할 정도로 놀라왔다. (마치) 은하수가 한정 없는 것 같이 여겼더니 서울에 와서 덕조를 따라서 실의(實義)와 칠극(七克) 등 수 권을 얻어 보고 비로소 기쁜 마음으로 쏠리게 되었다. [先仲氏墓誌銘]13)

 

㉯ 갑진년(甲辰年) 여름에 이벽을 따라 배로 두미협(斗尾峽)을 내려가다가 비로소 서교(西敎, 천주교)의 말을 듣고 한권 책을 얻어 보았다. [自撰墓誌銘 集中本]14)

 

㉰ 이벽은 그의 누이의 1주기를 기회로 마현(馬峴) 정씨(丁氏) 집에 얼마동안 머무른 다음 1783년(癸卯) 초여름 4월 15일에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와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 주제는 역시 그들이 늘 하고 있는 철학 연구였다. 신의 존재와 그 유일성, 천지창조, 영혼의 신령함과 불멸성, 후세의 상선벌악(償善罰惡) 등의 문제를 차례차례로 검토하고 해석하였다. 배에 탄 이들은 그렇게 아름답고 위로되는 진리를 처음 듣고 놀라고 황홀해졌다.15)

 

위 인용문들을 통해서 볼 때 다산이 처음으로 접한 서양학문은 서양과학에 속하는 역상(曆像), 수리(數理)의 학문이었고, 이윽고 서교(西敎) 즉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용문들의 공통된 사항 중의 하나는 다산이 이벽의 전교연설을 듣고서 비로소 천주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곧 천주교 관련서적을 읽어 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시점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대체로 갑진년 음력 4월(=즉 1784년 초여름)으로 해석된다.16) 이때부터 다산은 1786년경까지 최소 2권, 많게는 4권 이상의 천주교 서적을 열람한 것으로 보인다.17) 위 인용문 ㉮를 통해서 볼 때, 이때 다산이 처음으로 접한 천주교 서적은 《천주실의》와 《칠극》임이 명시되어 있다. 이중에서 《천주실의》는 이미 16세기 초반 북경으로부터 사신(使臣)들의 손을 거쳐 국내에 유입된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서적이자, 한문을 이해하는 유학자 층을 대상으로 마테오 리치가 유교에 영합적인 관점에서 저술한 천주 교리에 관한 가장 기본적이고도 보편적인 한문 서학서였다는 점에서 다산뿐만 아니라 동시대 조선의 지식인 유학자들에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18)

 

한편 다산이 쓴 묘지명 외에도 다산의 후손 정규영이 정리한 〈사암선생연보〉에 의하면 다산은 《영언여작(靈言蠡勺)》, 《주제군징(主制群徵)》 등 이미 성호 이익이 읽고 촌평을 남긴 서적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당시 조정에서 이 책들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선비들도 변론하여 배척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점에서 볼 때, 1784년 당시는 천주교서에 대한 척사론자(斥邪論者)들의 비난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에, 다산도 그가 사숙한 성호 선생이 언급한 《영언여작》, 《주제군징》 등의 천주교 서적을 자유롭게 열람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열람의 명시적 증거는 찾지 못했다.

 

다산이 16세 무렵부터 교유하기 시작한 이승훈(1756~1801, 베드로, 蔓川)은 1784년 서울 수표교 이벽의 셋집에서 다산을 비롯하여 이벽,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풂으로서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으며, 다산은 조선에서 제 1세대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세례명 요한). 이승훈은 1784년 초(양력1~2월) 북경 천주당에서 세례를 받을 때, 조선에 천주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결의를 보인 후에야 비로소 그곳 선교사들의 동의(허락)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교리학습의 기간이 짧았고 교리지식도 많이 부족했다. 이에 선교사들은 그가 장차 조선의 베드로 사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베풀고, 조선에 돌아온 후 그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지식인들이 천주교에 대하여 선교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교리를 습득해갈 수 있도록, 이전에 천주당에 들른 이들에게 한 두권씩 선물하던 것과는 달리, 다양한 천주교 관련 서적을 대량으로 적어도 수십권에서 많게는 수백권에 이르기까지 선물로 꾸려주었고, 이승훈은 이런 서학서들을 부친 이동욱이 연행사 일행의 휴대품 검사를 책임진 서장관이었던 덕택에 아무런 제지를 받지않고 무사히 국경을 통과하여 조선에 가져올 수 있었다.19)

 

이승훈은 1789년 밀사 윤유일을 통해 북경 천주당 선교사들에게 쓴 편지20)에서, 1784년 입국이후 천주교회의 일꾼으로서 그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제가 갖고 온 책들을 가지고 제가 믿는 종교에 대하여 공부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저의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즉 이승훈은 1784년 봄부터 북경에서 가져온 교회서적을 그 스스로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또 동료들에게도 읽기를 권하여 서로 읽은 내용을 토론하고 이를 통해 천주교리에 대한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예비자들을 대상으로 그해 겨울에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이다. 다산이 이때 이승훈으로부터 최초로 세례 받은 제1세대 한국 천주교회 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승훈으로부터 천주교 서적을 빌려서 열심히 독서하고 궁금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승훈, 이벽, 권일신 등과 함께 수표교 이벽의 집에 자주 모여서 일종의 독서토론회를 가짐으로써, 천주교에 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축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21) 1784년 겨울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고난 뒤 다산은 그의 중형 정약전, 권일신, 최인길, 최창현, 지황, 이존창 등과 함께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 종종 모여서 천주교리와 관련된 이벽의 가르침을 들었다.22) 그러나 불과 몇 개월 후인 1785년 봄에 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사령들에게 적발되어 공동체는 일시에 해산되고, 다산은 그의 형 약전과 마찬가지로 부친으로부터 엄한 꾸중을 듣고, 천주교를 다시 믿지 않겠다는 일종의 배교선언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종의 가문박해가 다산은 물론 이승훈, 권일신 등 천주교 때문에 비슷한 탄압을 경험해야 했던 지식인들의 신앙의 열기를 일시적으로 식힐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단절시키지는 못했다. 다만 이 1785년 형조의 천주교 단속사건(=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당시 조선 천주교회 창설의 주역이자 교회학자였던 이벽이 가문박해를 당해 굶주림과 질병으로 순교했고, 명례방 공동체의 집주인이었던 중인 김범우가 도배(徒配)를 당해서 지방으로 간 지 얼마 후 곧 순교하였다.23)

 

 

3) 이승훈과 함께 서학서를 숙독하고 토론하던 시기 ; 반촌 집회기

1787년 반촌사건~1791년 가을, 진도자증, 만물진원, 성세추요 등을 읽고 토론

 

이벽과 함께 조선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인 이승훈은, 1785~1786년경 이벽의 죽음으로 인한 교회 지도층과 신자들의 불안심리를 극복하는 동시에 더욱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 곧 세례(洗禮)를 비롯한 각종 성사(聖事)의 집행을 통해서 입교자(入敎者)를 늘리는 한편 기존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해주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이승훈 등 조선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은 원칙적으로 무효가 되는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수립하고, 이 제도에 입각한 각종 성사의 집행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신도들의 교계조직과 성사집전이 교회법적으로 불법이고 무효라는 사실을, 교리서를 정독한 어떤 신자가 제기하자24), 얼마 후에 가성직단을 해체하고 성사집행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이승훈은 스스로 교리지식의 부족함을 절감하게 되었고 몇몇 주요 평신도 지도자들이 모여서 일종의 교리서 강독회를 개최하였다. 1787년(정미년)에 모임의 실상이 척사론자들에 의해 폭로된 이른바 정미반회사(丁未泮會事)가 바로 이 교리강독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성균관이 위치한 반촌(泮村) 김석태의 집 또는 이기경의 강정(江亭) 등지에서 이승훈을 비롯하여 정약용, 이기경, 강이원 등 성균관의 진사들이 모여 복음전교에 필요한 교리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 몇몇 한문서학서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그 내용을 토론하였다. 이같은 움직임과 관련하여 다산은 그 자신이 천주교에 입교한 연유와 내력을 설명한 1797년의 〈변방사동부승지소(辨謗辭同副承旨疏)〉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국왕 정조에게 고백했다.

 

신이 소위 서양의 사설(邪說)에 대해서 일찍이 그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 책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말을 박절하게 하지 않으려고 해서 “책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지 참으로 책만 보는 데서 그쳤더라면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대개 일찍이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사모했으며 그 내용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한 적이 있습니다. 본원(本源)의 마음자리가 기름이 스며들고 물이 젖어들어 뿌리가 튼튼히 박히고 가지가 얼기설기 뻗어나가는 것 같아서 스스로 깨닫지 못했습니다.25)

 

다산은 자신이 한때나마 천주교 서적에 심취하였던 사실을, 단지 그 책을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기뻐할 정도로 그 내용에 감동했고 나아가 그 내용을 다른 이에게 알리기까지, 즉 전교하기까지에 이를 정도였다는 말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앞서 보았듯이 그가 1822년(61세 때)에 저술한 자찬묘지명(광중본)에서 언급한 바 “정미년(=1787년) 이후 약 4~5년간 ‘서교(西敎, 천주교)의 학설을 듣고 그 책을 보는 것[聞西敎見其書]’에 마음을 기울였다.”26)고 하는 기술과도 일치하는 내용이 된다. 이같은 다산의 고백은 그를 천주교 신자로 고발한 척사론자들이 진술한 내용, 즉 반촌의 모임(강독회)이 얼마나 진지했던지 이승훈, 정약용 등 집회 참가자들이 성균관 식당에 가서 출석점검(원점)을 받는 일조차 궐할 정도였다고 한 내용과도 잘 부합된다.27) 그러므로 다산은 1787년 이른바 정미반회사(丁未泮會事) 때부터 신해년(=1791년) 진산의 폐제분주(廢祭焚主)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4~5년간 천주교 서적을 숙독하여 교리지식을 함양하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여기서 정약용과 이승훈 등이 정미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서교 연구에 집중한 배경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래 이들의 서교(西敎, 천주교) 신봉은 서학(西學) 연구에서 한 단계 발전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와 관련하여 서학에 대한 초창기 집단 학습을 이끌어온 것은 광암 이벽이었다. 이벽은 1783년 초겨울 이승훈이 자제군관으로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훈에게“북경의 천주교 선교사들을 방문하여 서학을 힘써 배워오라”고 권유했던 인물이었고, 다산이 1785년경 정조로부터 ‘중용(中庸)’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오도록 과제를 부여받고, 그와 더불어 답안을 작성하여 제출함으로써 정조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서교에 대한 관심이나 유학에 대한 조예가 모두 깊었던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이론적 대가였다.28) 그런데 이벽이 1785~1786년 부친에 의해 집안에 유폐되어 병사한 후, 이승훈 등은 천주교세 확장을 위한 ‘가성직단(假聖職團)’을 조직하여 운영했으나 불과 1~2년 만에 이러한 행동이 가톨릭 교리(敎理)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나온 불법적인 행위였음이 어느 신자에 의해서 지적되었고, 가성직단의 활동은 수치스러움 속에 그 추진력이 약화되다가, 마침내 슬그머니 중단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가성직단’을 주도한 이승훈 등은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깊은 천주교리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29)

 

정미년 무렵부터 이승훈과 그 동료 정약용 등이 가성직제도 문제와 관련하여 천주 교리에 대한 무지(無知)를 자각한 후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발분망식(發憤忘食)하면서 강독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이들이 함께 읽었던 천주교 책들은 전부터 읽어오던 《천주실의》나 《칠극》과 같은 교리나 수신(修身)의 입문서(入門書) 내지 개설서(槪說書)가 아니라, 그들의 부족한 교리지식을 보강해줄 좀더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교리를 서술한 호교론서(護敎論書)나 종합적 교리서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성격의 책들로서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당시 함께 읽고 토론했을 책으로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 천주당에서 가져온 《진도자증(眞道自證)》, 《만물진원(萬物眞原)》, 《성세추요(盛世芻蕘)》 등을 거론해볼 수 있다.30) 이러한 사정은 반촌집회 때 정약용, 이승훈 등과 한때나마 함께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다가 곧 척사론자로 바뀐 이기경(李基慶)이 1791년 11월 13일 임금(정조)에게 올린 상소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에서 일어난 廢祭焚主事件)을 전후하여 이기경은 홍낙안 등과 함께 대표적인 척사론자로 등장하여, 남인 내의 소장학자들이 천주교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 진산사건의 여파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은 이기경을 불러 구체적으로 어떤 선비들이 천주교에 관련되었는지를 질문하였는데, 이기경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포함하여 자신이 처음부터 다산 정약용과 함께 했던 천주교 학습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조에게 보고했다.

 

대신(채제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도 또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보았다.” 신(이기경)이 대답하기를, “《천주실의》는 그 학술 중에 처음 배워 입도(入道)하는 글입니다.”… 당초 반회(泮會)에서 승훈(承薰)이 하는 일에 대해 참견한 것은 다만 신 한 사람뿐만이 아니니 모임에 참석한 자는 전 정언(前正言) 정약용(丁若鏞)과 진사(進士) 강이원(姜履元)이 있었습니다. … 약용(若鏞)이 《천주실의》와《성세추요(盛世芻蕘)》31) 등등의 책을 신에게 보내와서 신이 그 책들을 보게 되었는데, 이후부터 약용을 대하면 의논하게 되어 혹 그 허망하고 황탄한 것을 배척도 하고 혹 신기한 것은 인정도 한 것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 정미년(丁未年) 10월경 승훈의 무리가 다시 천주학을 숭상한다는 소문이 귀가 따갑도록 들려오기에, 신이 마음속으로 가만히 의심하여, “전날에 빌려다가 본 책은 그다지 혹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이들이 이렇듯 함은 어쩐 일인가? 반드시 장차 그 글을 자세히 보아서 그 까닭을 시험하리라” 하고 드디어 서양책 빌리기를 승훈에게 청하였더니, 승훈이 말하기를, “그 교는 믿지 아니하고 다만 그 책을 보느냐?”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좋아하고 배척함은 오직 본 후에 결정될 것이다. 책이나 빌려 달라”하였더니, 어떤 날 승훈이 수등본(袖謄本) 《진도자증(眞道自證)》 세 권을 팔소매에 넣고 해질 무렵에 왔습니다. 신이 시험삼아 그 책을 보니,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다만 어버이가 나를 길러준 줄만 알고 천주(天主)의 돌보아주심이 어버이보다 나은 것을 모르며, 다만 임금이 다스려주는 줄만 알고 천주의 주관하심이 임금보다 나은 것을 모르도다.’ 또 ‘떡과 술이 있어 하늘에 제사하는데 밀떡 먹기를 살[肉]같이 하고 술마심을 피[血]와 같이 한다’는 등의 말에 선뜻한 느낌이 들어 그 책을 다 보지 않고 곧 던져 돌려보냈더니, 한 열흘 후에 승훈, 약용, 이원이 성균관에 가서 공부할 때 여러 번 신을 보고 찾아와 모임에 가담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전해 들으니 세 사람이 성균관 근처 마을 김석태(金石太)의 집에 모여 때로는 식당에도 들어가지 않고 전적으로 그 책만 본다고 하였습니다.32)

 

이상에서 인용한 이기경의 언급을 통해서, 다산 정약용이 이승훈을 통하여 중국에서 입수한 한역서학서 《천주실의(天主實義)》, 《성세추요(盛世芻蕘)》, 《진도자증(眞道自證)》 등을 열심히 읽었으며, 초기에는 《천주실의》와 같은 입문서를, 한참 향학열에 불탔던 정미년 반회 때는 《진도자증》과 같은 보다 전문적인 교리서를 열심히 읽고, 그 속에 나오는 ‘천주대군대부(天主大君大父)’, ‘성체성혈(聖體聖血)’ 등에 대해서 서로 토론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진산사건으로 서교를 포기하고 유교로 복귀한 시기 : 천주교 단념기

1791년 겨울부터 1795년 봄까지 제사문제로 천주교를 포기하고 유학으로 회귀

 

다산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4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 때 오언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하고 학문에 뛰어났기에, 22세 때인 1783년 초시(初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곧 성균관에 입학한 후 약 10여 차례에 이르는 각종 시험에서 여러 번 수석을 차지하여 궁중의 각종 신간서적을 상으로 받고 임금 정조의 지극한 관심과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초시 후에 치르는 회시(會試)에서는 번번히 낙방하다가 성균관에 입학한 지 무려 6년이 지난 1789년 28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2등으로 합격하여 석갈(釋褐, 벼슬자리에 나감)할 수 있었다.33) 그런데 이처럼 어려서부터 탁월한 글재주를 자랑했던 다산이 성균관에서 수학한 지 6년 동안 회시에 급제하지 못한 이유로는, 그가 회시를 위한 공부보다는 성균관에 입학한 다음 해(=1784년)부터 교회창설과 각종 신앙집회에 참여하면서 서학(천주교) 공부에 더 골몰하였던 사실을 지목할 수 있다. 즉 다산의 성균관 동료들이 표현한 바와 같이, 다산은 이승훈 등 소수의 천주교리서 강독자들과 함께 식당에 들러 밥을 먹는 일조차도 자주 궐할 정도로 천주교 교리서 집단 강독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회시 준비를 제대로 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다산의 회시 합격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국왕 정조는 그가 회시에 합격하기 1년 전인 1788년 3월경 반제(泮製)에 수석을 차지한 다산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회시에 자주 떨어진 일을 문책하였는데, 다산에게는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천주교 모임과 과거(회시) 준비 중에 어느 한쪽에 치중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1789년 회시에 합격한 후에도 다산은 한동안 천주교 서적 열독과 관직생활 충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자 나름대로 성실히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정미년 이후 약 4~5년간 서학서에 경심(傾心)했다는 일인 것이다.34) 그런데 다산이 관직생활과 천주교 신자로서의 집회 및 신앙생활을 더 이상 병행할 수 없는 사건이 터졌으니, 1791년 겨울 당시 전라도에 속했던 진산(珍山) 고을의 양반출신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 권상연 등이 윤지충의 모친 장례와 제사를 유교식 법도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사는 치르지 않고 신주는 불에 태워(또는 땅에 묻고, 즉 廢祭焚主하여) 집안과 인근 유림들의 집단적인 비난과 배척에 직면했고 마침내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다.35) 성리학적 윤리강상을 중시하던 정조는 남인 채제공의 건의에 따라 이 사건을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엄중하게 처리하고, 아울러 전국적으로 천주교회 지도자에 대한 체포령과 천주교도 단속 등 공식적인 천주교 탄압을 시작했다.(1791년 신해박해)

 

진산에서 천주교도의 폐제분주사건이 터진 후 다산과 함께 반촌집회에 참석하여 서학서를 열독하며 서학을 함께 공부하던 이기경(李基慶)이 돌연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 중 이승훈을 거명하며 반촌집회 사실을 조정에 고발했는데, 정조가 오히려 이기경 스스로 근신해야 할 거상(居喪) 중에 남을 모함한다고 하여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다산은 이기경의 척사운동이 장차 이승훈 뿐만 아니라 반회 참석자 모두에게 그 화를 미치게 할 것으로 염려하다가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회의 입장이 성리학적 윤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을 이유로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였고36), 이후부터 자연스럽게 교회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언급한 자찬묘지명(광중본)에서 “신해년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고 한 다산 자신의 진술이 이해가 된다.

 

다산이 1791년 이후 비록 천주교회를 내심으로 떠나 슬그머니 유교로 회귀한 후에도 한동안은 천주교 신자들과 비공식적인 친교관계를 계속 유지해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즉 비록 냉담해지기는 했지만, 천주교회를 공식적으로 비난하거나 배척하거나 또는 신자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다산의 태도는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밀입국하였을 때 그가 취한 행동에서 간접적으로 추찰된다. 당시 이승훈은 이러한 사실이 장차 척사파에 알려지면 그들의 상소에 의해 남인 시파가 정치적으로 큰 위기에 처해지는 또 한 차례의 대규모 박해를 예상하고, 차라리 조정에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을 알리고자 했지만, 다산의 만류로 그만두었다.37) 당시 다산은 이승훈과 마찬가지로 비록 마음으로부터 천주교를 떠났지만, 아직 교회에 해를 끼칠 마음이 없었기에 남인 시파의 정치적 이해보다는 교회의 안위를 더 걱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다만 1791년 이후 1795년 사이 다산이 마음으로부터 교회를 떠난 후에 천주교 서적을 보았는지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남아있지 않는데, 이미 제사문제 등으로 전통적인 유교의 충효윤리를 고수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은 다산이 이와 다소 상충되는 점이 노출되기 시작한 천주교의 서적을 읽었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여겨진다.

 

 

5) 금정찰방에 좌천되어 천주교 거부 입장을 공적으로 표명한 시기 ; 천주교 탄압기

1795년 6월 금정찰방 좌천시부터 1801년 신유박해 직전까지 천주교 탄압과 거부

 

다산은 1791년 이래 마음속에서 이미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고 공식적인 교회활동을 그만두었지만, 1795년까지는 교회에 대해 비난이나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1795년 주문모 입국사건이 진사 한영익에 의해서 고발되고 국왕 정조의 지시로 포도청이 주문모 신부의 입국에 관여한 최인길, 지황, 윤유일 등 3명의 천주교 밀사를 체포하여 장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조정에서 척사파가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 천주교에 관여했던 관리들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를 계기로 정조가 이들로 하여금 비난의 화살을 피하면서 천주교회와 관련된 혐의를 확실히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서울에서 충청도로 모두 좌천시켰다. 다산도 중앙정계에서 벼슬 살다가 충청도 금정역의 찰방으로 좌천되었는데, 이때부터 다산은 공적으로 천주교회를 탄압하고 신자들을 억압하여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는 인물이 되었다. 또한 공주 봉곡사 서암에서 이삼환 등 성호의 학맥을 잇는 유자들과 함께 서암강학을 개최하여 유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기에 힘썼으며, 퇴계의 글을 읽으며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지어서 정통유학자로 회귀했음을 주위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드러냈다.38) 따라서 이 시기에 다산이 천주교 서적을 읽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그러나 ‘광의의 서학’ 중의 천주교를 제외한 서양 과학기술과 서양식 제도에 대해서만은 여전히 호감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과 같은 녹암계(鹿菴係, 권철신 등 남인 親西派)에 속했던 황사영의 언급에 의하면, 다산은 이가환, 이승훈, 홍낙민 등과 함께 비록 겉으로는 천주교를 배교했지만, 속으로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신(死信)’이 남아있다고 했는데39), 이를 서학사적 의미에서 해석한다면 1801년의 시점에서 다산은 비록 분명하게 배교(또는 기교)를 표방했지만, 그 마음속에는 젊은 시절 읽었던 서학서의 영향이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열람 서학서 목록

 

이상에서 설명한 내용을 바탕으로 다산이 1801년 유배를 떠나기 전 서울과 광주 마재 등 지방을 오가며 벼슬살이 하면서 그가 읽고 감동하거나 그 내용에 영향을 받았을 서학서의 제목과 그 책의 주요 내용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고찰해보았다. 이러한 기술을 종합하여 18세기 후반 다산이 읽었음이 분명하거나 읽었을 가능성이 있는 서학서들을 도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상의 도표를 통해서 볼 때 다산이 1801년 이전 시기 중에서도, 서학서를 읽은 것은 그가 성균관에 들어간 다음해인 1784년부터 신해박해와 제사문제로 인해 교회를 떠난 1791년까지 대략 8년 정도의 기간에 해당되는데, 처음(1784~1786년)에는 《천주실의》, 《칠극》과 같은 천주교 입문서나 개설서를 읽고 세례를 준비하다가, 차츰(1787~1791년) 교리지식을 심화하고 전교활동을 강화하기 위해서 《진도자증》, 《만물진원》, 《성세추요》 등의 전문적이고도 종합적인 교리서들을 숙독하는 단계로 발전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Ⅲ. 서학서의 숙독과 개혁사상의 형성

 

앞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다산이 천주교 신앙생활을 하면서 서학서를 읽은 것은 이벽의 전교에 의해 천주교 서적을 처음 접하면서 세례를 준비하다가 영세 후 명례방 집회 등에 참여하여 교리를 익히던 시기(1784~1786년)와 교리지식의 심화를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서학서를 열독(숙독)하던 시기(1787~1791년)의 두 부분으로 크게 대별되는데, 필자는 이를 편의상 각각 ‘1단계 서학서 열람기’와 ‘2단계 서학서 숙독기’로 규정하고 두 시기별로 읽었던 서학서의 주요내용 중 다산의 사회비판 인식 및 개혁사상에 영향을 주었을 부분을 추출하여 본다.

 

 

1. 1단계 서학서 열람기(1784~1786년) - 《천주실의(天主實義)》 독서의 영향

 

다산이 처음으로 천주교 서적을 접한 것은 1784년 봄, 광주 마재에서 한강 수로를 통해 배를 타고 서울로 귀경하면서 선상에서 이벽의 설교를 듣고 감동된 것이 그 계기를 이루었다. 이때 그가 열람한 최초의 서학서는 《천주실의》와 《칠극》 등인데 이중에서도 《천주실의》야말로 당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이 서학(천주교)에 처음 접하여 그 교리의 대강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대화체(문답체)로 저술된 천주교 입문서였다. 저자 마테오 리치가 이 책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주요 교리 내용은 다음과 같은 제1~8편의 목차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40)

 

1. 천주(天主)가 만물을 창조(創造)하고 주재(主宰)하며 안양(安養)함

2. 세상 사람들이 천주에 대해 오해하는 내용을 바로 잡음.

3. 사람의 영혼(靈魂)은 불멸(不滅)하여 동물과 크게 다름

4. 귀신 및 사람의 혼에 대해 풀이하고 천하만물(天下萬物)은 일체가 아님

5. 윤회설(輪回說)과 살생금지설(殺生禁止說)을 반박하고 재계(齋戒) 소식(素食)을 설명.

6. 상선벌악(償善罰惡), 천당지옥(天堂地獄)

7. 인간 본성의 본래적 선(善)을 논하며, 천주교인은 올바로 배워야 함을 설명.

8. 서양풍속에 대해 설명하고 성직자 독신(獨身)의 의미를 논함.

 

이상 《천주실의》의 내용을 4대 교리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천지창조(천주존재), 상선벌악 등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지만, 강생구속(降生救贖)과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 등에 대해서는 매우 소략하거나 아예 언급이 안 되고 있다. 이는 모두 이 책의 영합주의적 교리설명 방식 때문에 중국인에게 익숙한 육경(六經) 속의 상제(上帝)를 천주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데 치중한 반면, 중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의 십자가 죽음[代贖]이나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했기 때문이다. 다산도 이 책을 접했을 때 유교의 옛 경전들에 나오는 상제의 관념으로 천주의 존재와 속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매우 쉽고 친숙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천주실의》에는 다산의 젊은 시절 그의 개혁적 역사인식을 추동하는 요인이 되었을 내용들이 상당수 존재한다.41)

 

 

 

위 표42)를 통해서《천주실의》의 제3편과 8편 중의 상당부분을 다산이 당시 조선사회의 구조적 혼란스러움을 개혁하는 데 응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특별히 맨 먼저 언급된 ① 교황을 신자들이 현명한 사람으로 선택한다는 《천주실의》의 구절은, 중국 상고시대에 황왕(皇王, 황제나 국왕)을 백성들이 추천하여 옹립한 것을 다산이 언급하면서, 황제나 국왕 등 위정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백성이 소중한 존재임을 역설하는 데에 일정한 자극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② 《천주실의》(제8편)가 언급한 서양 수도회에서 사유재산이 없고 재산을 공유한다[財産共有]는 내용은 다산이 〈전론〉3에서 ‘여전제’ 논의를 제시한 배경으로 이해되며, 당시로서는 매우 독특한 제안인 여전제 개혁안을 도출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③ 《천주실의》(제3편)에서 언급한 서양 선비들이 주야로 연구하고 정신노동을 한다는 내용은 다산이 〈전론〉5에서 언급한 바, 조선의 사족들도 놀고 먹지 말고 농업기술이나 종자의 개량 등 특히 기술개발에 주력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서술하는 데 일정한 자극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④ 《천주실의》(제3편)에서 백성의 직업을 언급할 때 농부, 상인(여객), 백공(장인), 사대부(지식인) 순으로 서술한 것은 다산이 〈전론〉에서 국민개로(國民皆勞)를 설명하면서 농부와 사족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한 것과 일정한 관련성이 추찰된다.

 

⑤ 《천주실의》(제8편)에서 서양 수도회에서 자기 마음대로 일하지 않고, 노동(작업)을 할 때 오로지 책임자(長上)의 명령에 따라 계획적으로 일한다고 한 부분은 다산이 〈전론〉3에서 여장(閭長)의 작업계획에 따라 여민(閭民)들이 노동을 하도록 한다고 서술한 부분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위표에서 언급된 다산의 저서인 〈원목〉, 〈탕론〉, 〈전론〉등은 1790년대 후반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지며, 다산이 아직 유배를 당하기 전에 그의 개혁 정치적 소신을 자유롭게 표현한 저작물로 이해된다.43) 따라서 다산의 개혁적인 사고방식은 그가 아직 서학에 대한 예전의 지식을 망각하지 않은 채 천주교를 제외한 서학의 나머지 부분, 즉 서양의 과학기술이나 정치, 경제, 신분, 법제 등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인식을 하고 있다가, 자신의 사회개혁에 대한 견해를 피력할 때 기왕에 익힌 서학지식을 자연스럽게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2단계 서학서 숙독기(1787~1791년) - 《진도자증(眞道自證)》 숙독의 영향

 

다산이 1787년 정미년경부터 약 4~5년간 당시 교회를 이끌고 있던 이승훈 등과 함께, 성균관 근처의 김석태의 집이나 이기경의 강정(江亭) 등지에서 이기경, 강이원 등과 함께 발분망식(發憤忘食)하고 서학서를 정독하여 교리지식을 심화시켜 나갔을 때는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선물로 받아 국내에 들여온 《진도자증》, 《만물진원》, 《성세추요》 등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교리서들을 읽었을 것이다. 이중에서 《진도자증》은 다른 두 교리서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사회교리의 편린들이 종종 드러나고 있어 젊은 시절 다산의 개혁의지를 추동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진도자증(眞道自證)》은 프랑스 예수회 출신 선교사 샤바냑(沙守信, Chavagnac)이 저술하여 그의 사후 1718년경에 북경에서 4권 2책으로 간행되었던 책이다. 이 책은 특히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천주실의》에서 부족했던 강생구속, 삼위일체 등의 교리가 매우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어 다산과 그 동료들의 부족한 교리지식을 상당한 부분 보완해주었을 것으로 보인다.44) 또한 이 책은 《천주실의》에 버금갈 정도로 사대부 지식인 사이에 유명한 책으로 18세기 후반 안정복, 홍정하 등 척사론자들이 그 내용을 비판했을 정도로 이들 교리서에 담겨진 내용의 독서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다.45) 다산이 읽었던 《진도자증》의 내용 중에서 다산의 개혁사상과 관련된 부분만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진도자증》에는 다산이 〈탕론〉과 〈원목〉 등에서 언급했던 상향식 민주주의적 선거방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46), 이 부분은 《천주실의》와 마찬가지로 서양의 교황(敎皇)제도에 대해 서술하는 구절에서 나온다.47)

 

《진도자증》에는 인간의 본질적 평등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여러 번 나온다. ⓐ 성경에 의거하여 구세주의 재림 날에 “모든 인간은 귀천(貴賤), 빈부(貧富)의 구분이 없게 되며 오직 행위의 선악(善惡)으로 구분된다.”48)

 

ⓑ “사람의 평등함에 대해서 말해본다. …… 대저 인간은 한 근원에서 나왔으니 한 조상의 소생으로 같고 함께 올바른 마음과 올바른 지향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소, 원근, 빈천의 다름을 말하지 않고 모두 사랑으로써 함께 하며 출신과 명분과 이해관계를 특별히 따지지 않는다”49)

 

ⓒ “천주께는 복종하며 위없는(無上의) 공경을 드리고 인간들은 평등하여 사사로움 없이 사랑하며”50) 등이 그 예에 속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진도자증》에는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일단 시인하고 각자 직분에 충실하는 한편, 상하 빈부가 서로 협조하고 도와주어 화목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51)는 식의 개량주의적, 온정주의적 서술도 있는데, 이런 구절이 적어도 유배이전 젊은 시절의 다산에게는 거의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이나, 말년에 다산의 주장들 즉 《목민심서》 단계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개혁방안을 제안할 때는 오히려 적절히 부합되는 측면이 되었을 것이다.

 

《진도자증》에는 중화주의(中華主義) 사고방식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서술도 보인다. 즉 구세주가 왜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공자가 노나라에서 탄생하시고 진이나 초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은 왜 그런가? 요컨대 한 지방에서 태어나도 도(道)는 천하에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세상을 구하는 도는 만민의 공번된 도이니 만국에 통행됨이 마땅하다. 중국을 말하자면 예부터 바다로 왕래를 금하여 만국의 주요한 도리가 감추어져 있으니 중국 밖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52)라고 하였다. 이는 중국 밖인 조선에서도 성인이 나올 수 있다는 조선중화주의의 논리로도 원용될 수 있는 구절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다산이 1799년 연행사로 파견된 교리(校理) 한치응(韓致應)을 송별하면서 한 발언 즉 “무릇 동서남북의 한 가운데에 중(中)이 있으니 어디를 가나 중국인데 어찌 우리나라를 동국(東國)이라 부르는가? 또한 가는 곳마다 중국인데 무엇으로써 중국이라고 부르는가?”53)라고 한 발언과 상통한다. 곧 다산이 젊은 시절 숙독했던 《진도자증》에는 이미 이와 같은 탈중국중심주의(脫中國中心主義) 내지 탈중화주의(脫中華主義) 또는 조선중화주의적(朝鮮中華主義的) 인식을 조장했을 구절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도자증》에는 다산이 이미 표방했던 바와 같이, 지리적 중화주의를 극복하고 문화적 중화주의를 표방한 논리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것이 젊은 시절 다산의 개방주의적 세계관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서학서 《진도자증(眞道自證)》은 이를 숙독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다산이 그의 젊은 시절에 주창했던 사회개혁의 논리를 수립하는 데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Ⅳ. 맺음말

 

본고는 다산 정약용이 18세기 후반에 읽었을 서학서(천주교 서적에 한정)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서학사상의 형성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 개혁주의적 요소를 추출하고, 이러한 개혁사상에 미친 서학의 영향력을 개략적으로 가늠해 본 글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활동하던 시대는 탕평정국에서 세도정국으로 통치체제가 바뀌어지고 경제적으로 토지제도와 균역, 환곡 등 봉건왕조의 근간이 된 삼정(三政)이 점차 문란해져 가던 시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민(백성)의 인권(人權)에 대한 관심과 자각이 높아졌던 시대로서 자연스럽게 신분차별의 철폐와 인간평등에 대한 요구가 사회저변에서 분출되던 시기였고, 청·일(淸·日)과의 제한된 교류를 통해서나마 선진적 서양문물제도에 대한 수용의 욕구를 점진적으로 실천에 옮겨가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 다산 정약용은 당대의 다양한 사상들, 즉 성리학, 원시유학, 불교, 천주교, 민간신앙 등 다양한 사상과 종교에 관심을 보이며 서로 다른 성격의 사상이나 학문들 간에 보다 원활한 지적 소통을 도모하면서 자신의 회통적(會通的) 사고를 확충시켜 나갔다. 성균관에서 유학을 배우며 사환을 꿈꾸던 다산이, 당대의 위험한 사상으로 인식되던 천주교 서적을 비밀리에 탐독하면서 그 지식을 쌓아갔던 사실은 이같은 그의 사상적 경향성을 극명하게 잘 드러내 준다. 이러한 다산의 젊은 수학시절(修學時節)과 사환기(仕宦期) 의식의 성장에 큰 영향을 준 외적 사상이 있었다면, 바로 중국에서 들여온 한문서학서를 연구함으로써 얻게 된 서학적 사고요, 내적 사상으로는 남인 성호학파의 전통적 학문방법인 육경(六經) 중심의 원시유학적 사고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다산의 개혁사상에 영향을 준 원시유학 사상에 대해서 수많은 논문들을 남겼지만, 다산의 개혁사상과 서학의 관련성을 고찰한 논문은 상대적으로 소수이며 그나마 서학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한역서학서와 다산의 저술을 비교 분석해본 연구는 더욱 희소한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산의 서학사상과 개혁사상의 상관관계를 보다 심도 깊게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본고는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성장기에 큰 영향을 준 두 가지 사고 중에서 외적요인인 서학(천주교)의 영향력에 주목하여 그가 언제 어떠한 서학서(천주교서적)를 어느 정도 읽고 소화하여, 과연 그 학습한 내용을 얼마만큼 그의 현실개혁적 사상을 수립하는데 활용할 수 있었는지 하는 문제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다산은 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이듬해(=1784년) 회시를 준비하던 성균관 진사(進士) 시절부터 회시에 합격한 후 벼슬길에 나아간 후인 1791년 진산의 폐제분주(廢祭焚主) 사건으로 천주교를 포기하고 유교로 회귀하기 직전까지 대략 8년간 7~8종의 서학서(천주교서)를 열람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중에서도 그의 개혁적 역사관을 추동할 수 있는 사회교리를 담고 있었던 대표적인 서적이 바로 《천주실의》와 《진도자증》이었다.

 

이 책들에는 민중의 추대에 의한 위정자 선출이라는 참여 민주주의적 사고를 제공한 교황제도에 대한 언급이 공통적으로 있었으며, 백성들의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지향하는 제도의 개혁을 추동할 수 있는 재산의 공유와 모든 인간의 평등에 대한 원칙적 개념, 그리고 현실적 불평등을 개선해나가는 온건한 방법론, 노동생산의 계획, 지식인의 정신노동과 계몽적 역할 등에 대한 언급과 기존의 지리적 중화주의 사상의 한계성을 초월하는 개방적 세계관 등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사회교리들이 담겨 있었다.

 

개혁적, 개방적 내용을 담고 있는 서학서들을 숙독하면서 젊은 시절 서학지식을 축적해갔던 다산은 역사를 움직여 나가는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 중국 옛 유교경전의 상제(上帝)에 비견되는 천주(天主)가 천지만물(天地萬物)을 주재(主宰)한다는 관념론적 역사관을 견지하면서도, 서학서에서 말하는 인간의 고귀함과 만민평등의 사상 등을 바탕으로 사농공상의 직업에 종사하는 생산자 민(民, 백성)이 역사의 주체로서 사회개혁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민중중심의 역사관을 형성할 수 있었다.

 

다산의 민중중심 사상을 뒷받침한 요소로 민(백성)의 천거에 의해 위정자가 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상향식 통치자 선발 사고가 언급될 수 있다. 아울러 토지소유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방법으로서 토지공유론(土地共有論)에 입각하여 공동노동을 실시하고 업적에 따른 균등분배를 주창하는 〈전론〉의 여전제(閭田制) 또한 민중중심의 역사관을 견지할 수 있게 해주는 큰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위정자의 상향식 추대나 여전제 실시 등의 주장은 서학서에 실린 교황 선출이나 가톨릭 수도회의 재산공유, 공동노동, 계획노동, 균등분배의 삶에서 크게 영향받은 것으로 추론할 수 있으며, 신약성경 사도행전의 초기교회 신앙공동체의 모습이나 공상적 사회주의 이상향에 근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교황, 주교, 사제, 수도회 장상 등 통치자 계층의 현명한 지도력과 이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면서도 그들이 일정한 자기희생을 감수하고 민중을 위한 공복(公僕)으로 봉사할 것을 강조한 서학서의 내용들은 ‘민중적 지식인상’에 가까운 다산의 ‘사대부 역할론’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와 같은 1801년 이전에 형성된 다산의 역사관은 18년간의 강진 유배를 계기로 그 개혁적 진보적 사고가 상당히 후퇴하여, 결국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오던 전후시기에 작성된 그의 대표적인 사회개혁 총서인 일표이서(一表二書)에서는 현실적으로 실천 불가능한 급진적, 공상적 방법론을 지양하는 대신에 온건한 개량주의적 현실주의적 제도의 개선과 함께 위정자의 백성에 대한 온정주의적 임무를 강조하는 형태로 탈바꿈하게 된다. 《경세유표》의 정전제(井田制) 논의와 《목민심서》의 사민구직론(四民九職論)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원자료, 번역물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Vol.1, 2, Paris, Librairie Victor Palme Editeur, 1874

최석우 · 안응렬 역주, 《韓國天主敎會史》(상·중·하 ; 1980~1981, 한국교회사연구소)

다블뤼 주교(Mgr Antoine Daveluy 1818~1866, 安敦伊),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e(《朝鮮殉敎史備忘記》

이기경(저), 《闢衛編》/ 이만채(편), 《벽위편》(국제고전교육협회, 1984)

정규영, 《俟菴先生年譜》, 1921

정약용, 《여유당전서》, 1934

황사영, 《백서》

서종태 · 한건 엮음,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 재판기록》(상)(국학자료원, 2004)

《推案及鞫案》〈辛酉邪學罪人李家煥等推案〉

《邪學懲義》/ 《秋官志》/ 《正祖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마테오 리치 지음, 송영배 · 임금자 · 장정란 · 정인재 · 조광 · 최소자 옮김, 《천주실의》(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5)

유은희 수녀, 역주본 《진도자증》 《교회와역사》 (제325호~342호 총18회에 걸쳐 연재됨)

윤민구 역주,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자료집》 제4집 〈이 베드로가 북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

 

2. 저서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다섯수레, 1993)

《정다산과 그 시대》(열음사, 1986)

《다산학의 탐구》(민음사, 1990)

고승제, 《다산을 찾아서》(중앙일보사, 1995)

금장태, 《다산실학탐구》(태학사, 2001)

금장태, 《정약용》(성균대학교출판부, 2002) 

김영일, 《정약용의 상제사상》(경인문화사, 2003)

김옥희, 《한국천주교사상사 Ⅱ -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연구 -》(순교의맥, 1991)

송재소, 《다산시 연구 - 부 다산연보 -》(창작사, 1986)

원재연, 《조선왕조의 법과 그리스도교》(한들문화사, 2003)

장승구, 《정약용과 실천의 철학》(서광사, 2001)

정병련, 《다산 四書學 연구》(경인문화사, 1994)

차기진,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2002, 한국교회사연구소)

홍이섭,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연구》(한국연구도서관, 1959)

 

3. 논문

 

姜在彦, 〈丁茶山의 西學觀〉, 《茶山學의 探究》(민음사, 1990)

금장태, 〈다산의 사상에 있어서 서학의 영향과 그 의의〉, 《서원 방용구박사 화갑기념 논총》(동 발간위원회, 1975)

김상일, 〈정다산의 자연관과 서학의 창조신앙〉, 《기독교사상》 19권(대한기독교서회, 1975)

김영호, 〈여유당전서의 텍스트 검토〉, 《다산학 연구의 현황》(민음사, 1985)

김용섭, 〈18~19세기 농업실정과 새로운 농업경영론〉, 《한국근대농업사연구》(일조각, 1975)

김정상, 〈다산 정약용의 서학수용에 관한 일연구 : 「천주실의」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인하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1998)

나일수, 〈다산 실학의 서학적 배경〉, 《다산학》 3집(다산학술문화재단, 2002)

박동옥, 〈牧民心書에 나타난 茶山의 西學觀〉,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 - 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 -》(김옥희 수녀 편, 1993.10, 다섯수레)

박동옥, 〈목민심서에 나타난 다산의 서학사상〉, 《성심논문집》 26집(성심여대, 1994)

배현숙, 〈17,8세기에 전래된 천주교 서적〉, 《교회사연구》 3(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배현숙, 〈조선에 전래된 천주교 서적〉, 《한국교회사논문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손홍철, 〈조선후기 천주교 수용의 학술사적 의미 고찰 - 다산 정약용과 신서파, 공서파를 중심으로-〉, 《다산학》 9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6)

신용하, 〈개회토론 - 다산학의 의의 -〉, 《다산학의 탐구》(민음사, 1990)

신용하, 〈다산 정약용의 여전제 토지개혁사상〉, 《정다산 연구의 현황》(민음사, 1986)

심상태, 〈이벽의 죽음과 순교문제에 대한 재조명〉,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연구》(2007.1, 양업교회사연구소)

원재연, 〈18세기 후반 북경 천주당을 통한 천주교 서적의 조선 전래와 신앙공동체의 성립 - 이승훈의 역할을 중심으로 -〉, 《동양한문학연구》 제30호(2010.2)

원재연, 〈순암 안정복과 광암 이벽의 서학 인식〉 《교회사학》 4집(2007, 수원교회사연구소)

원재연,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 활동과 신앙 고백 - 순교 여부와 관련하여 -〉 《한국 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 창설 주역의 순교와 그 평판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2010.1)

원재연, 〈1791년 진산 천주교도의 폐제분주사건과 조선왕조의 형률〉, 《조선왕조의 법과 그리스도교》(한들출판사, 2003)

원재연, 〈다산 여전제의 사회사상적 배경에 대한 일고찰〉, 《교회사연구》 제10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이성배, 〈광암 이벽에 대한 신학적 고찰〉,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연구》(2007.1, 양업교회사연구소)

정석종, 〈정조 순조연간의 정국과 다산의 입장〉 앞의 책《정다산과 그 시대》(민음사, 1986)

정인재, 〈서학과 정다산의 성기호설〉, 《다산학》 7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5)

조광, 〈丁若鏞의 民權意識 연구〉, 《아세아연구》 제19집(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6)

조광, 〈다산 정약용의 사상〉, 《조선후기 사상계의 전환기적 특징》(경인문화사, 2010)

조광, 〈정약용의 민권의식 연구〉, 《조선후기 사상계의 전환기적 특징》(경인문화사, 2010)

차기진, 〈星湖學派의 西學 인식과 斥邪論에 대한 연구〉(1995.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차기진, 〈다산의 서학 인식배경과 서학관〉(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논문집 8집, 1993),

최석우,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다섯수레, 1993)

하우봉, 〈丁茶山의 西學關係에 對한 一考察〉, 《교회사연구》 제1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77.5)

한영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우리 역사와의 대화》(을유문화사, 1991)

한형조, 〈다산과 서학 : 조선주자학의 연속과 단절〉, 《다산학》 3집(다산학술문화재단, 2001)

 

4. 발표문

 

원재연, 〈다산 정약용의 서학/천주교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2012년 11월 23일 한국교회사연구소 주최,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 기념 심포지엄” 발표문

 

……………………………………………………………………………………

 

1) 본고에서는 논지전개의 편의상 ‘서학’이라는 용어를 ‘천주교’ 또는 ‘천주학’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서양과학기술을 포함하고자 할 때는 ‘광의의 서학’이라는 용어로 표기했다.

 

2)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다섯수레, 1993)은 다산 서학과 관련된 여러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묶어놓은 대표적인 단행본(공저)이다. 이외에도 서학을 비롯한 다산의 학문을 포괄적으로 다룬 《정다산과 그 시대》(열음사, 1986), 《다산학의 탐구》(민음사, 1990) 등 단행본 공저가 있다. 한편 단독 단행본으로는 홍이섭,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연구》(한국연구도서관, 1959) ; 김옥희, 《한국천주교사상사Ⅱ-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연구 -》(순교의맥, 1991) ; 고승제, 《다산을 찾아서》(중앙일보사, 1995) ; 정병련, 《다산 四書學 연구》(경인문화사, 1994) ; 금장태, 《다산실학탐구》(태학사, 2001) ; 금장태, 《정약용》(성균대학교출판부, 2002) ; 장승구, 《정약용과 실천의 철학》(서광사, 2001) ; 김영일, 《정약용의 상제사상》(경인문화사, 2003) 등이 있다. 다산의 서학과 관련된 연구논문으로는 강재언, 〈정다산의 서학관〉, 《조선의 서학사》(민음사,1990) ; 차기진, 〈다산의 서학 인식배경과 서학관〉(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논문집 8집, 1993) ; 김정상, 〈다산 정약용의 서학수용에 관한 일연구 : 「천주실의」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인하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1998) ; 금장태, 〈다산의 사상에 있어서 서학의 영향과 그 의의〉, 《서원 방용구박사 화갑기념논총》(동 발간위원회, 1975) ; 김상일, 〈정다산의 자연관과 서학의 창조신앙〉, 《기독교사상》 19권(대한기독교서회, 1975) ; 하우봉, 〈정다산의 서학 관계에 대한 일고찰〉, 《교회사연구》 1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 박동옥, 〈목민심서에 나타난 다산의 서학사상〉, 《성심논문집》 26집(성심여대, 1994) ; 한형조, 〈다산과 서학 : 조선주자학의 연속과 단절〉, 《다산학》 3집(다산학술문화재단, 2001) ; 나일수, 〈다산 실학의 서학적 배경〉, 《다산학》 3집(다산학술문화재단, 2002) ; 정인재, 〈서학과 정다산의 성기호설〉, 《다산학》 7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5) ; 손홍철, 〈조선후기 천주교 수용의 학술사적 의미 고찰 - 다산 정약용과 신서파, 공서파를 중심으로 -〉, 《다산학》 9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6) ; 조광, 〈다산 정약용의 사상〉, 《조선후기 사상계의 전환기적 특징》(경인문화사, 2010) ; 조광, 〈정약용의 민권의식 연구〉, 《조선후기 사상계의 전환기적 특징》(경인문화사, 2010) ; 원재연, 〈다산 여전제의 사회사상적 배경에 대한 일고찰〉, 《교회사연구》 제10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및《조선왕조의 법과 그리스도교》(한들문화사, 2003)에 재수록) 등이 있다.

 

3) 자세한 내용은 원재연, 〈다산 정약용의 서학/천주교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2012년 11월 23일 한국교회사연구소 주최,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 기념 심포지엄” 발표문 참고.

 

4) 차기진,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2002, 한국교회사연구소) pp.175-177 ; 이 단행본은 그의 박사학위논문 〈星湖學派의 西學 인식과 斥邪論에 대한 연구〉(1995.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을 보강한 것이다. ; 이에 의하면, 외형적 연구의 경우 1797년 〈변방사동부승지소(辨訪辭同副承旨疏)〉(일명 自明疏) 이후 천주교와 단절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한때 배교 후 천주교로 회귀했다고 보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으며, 내면적 연구의 경우는 첫째, 다산의 경학(經學, 經典硏究)은 서학(西學)과는 무관하게 유교(儒敎)에서 출발하여 독창적인 학문해석과 연구과정을 거친 산물(産物)이라는 입장, 둘째, 다산의 경학은 탈주자학(脫朱子學)의 입장에서 공맹시대(孔孟時代)의 수사학(洙泗學, 원시유학)에 그 기반을 두고 전개되었으며 다산 자신도 모르게 천주교 교리들이 그의 내면에서 취사선택되어 이론화되는 과정에서 서학적 요소와 아울러 반서학적(反西學的) 요소도 아울러 포함하게 되었다는 입장, 셋째 다산사상에는 천주교 교리서와 서양철학의 영향이 들어 있으며 그 결과로 다산의 창의적인 이론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입장 등으로 견해가 나뉜다.

 

5) 필자 외에도, 다산의 경세학(개혁사상)과 서학과의 관련성을 논한 이왕의 연구논저는 다음과 같이 여러 편 있다. 조광, 〈정약용의 민권의식 연구〉, 《아세아문제연구》 56집(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6) ; 하우봉, 〈丁茶山의 西學關係에 對한 一考察〉, 《교회사연구》 제1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77.5) ; 姜在彦, 〈丁茶山의 西學觀〉, 《茶山學의 探究》(민음사, 1990) ; 박동옥, 〈牧民心書에 나타난 茶山의 西學觀〉,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 - 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 -》(김옥희 수녀 편, 1993.10, 다섯수레) ; 차기진,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2002, 한국교회사연구소) 등. 이중에서 차기진의 논문(p.177)에 의하면, “서학의 요소는 우선 수기(修己)[本]를 위한 경학 연구와 상관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치인(治人)[末]을 위한 경세론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여 다산의 경세론(개혁사상)과 서학의 관계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6) 원재연 앞의 글(1995, 2003)

 

7) 각주2)의 논문들 중에서 강재언(1990), 김정상(1998) 등이 이에 해당된다.

 

8) 다산의 생애를 1801년을 기점으로 크게 2분하여 파악한 논문은 정석종, 〈정조 순조연간의 정국과 다산의 입장〉 앞의 책 《정다산과 그 시대》(민음사, 1986) 및 신용하, 〈개회토론 - 다산학의 의의 -〉, 《다산학의 탐구》(민음사, 1990) 등이 있다. 다산의 생애를 3분하여 검토한 연구논문도 있다. 김영호는〈여유당전서의 텍스트 검토〉, 《다산학 연구의 현황》(민음사,1985)에서 다산 저작을 기준으로 30대까지의 수학 · 관료시대(1762~1801), 40~58세까지의 강진유배시대(1801~1818), 58세 이후 임종 때까지의 마현귀향시절(1818~1836) 등으로 구분한 바 있고, 최석우 몬시뇰은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 앞의 책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다섯수레, 1993)에서 다산의 서학적 생애를 활동기(1784~1795년), 배교기(1795~1811년), 회심기(1811~1836년)으로 3분하였다. 조광 교수는 앞의 글〈다산 정약용의 사상〉에서 출생이후 과거를 준비하던 시기(1762~1783년),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1801년 신유교난으로 체포되던 시기(1783~1801년), 강진 유배기(1801~1818년), 유배에서 풀려나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시기(1818~1836년) 등 4단계로 구분하였다.

 

9) 원재연 앞의 글(1995, 2003)

 

10) 조광 교수는 앞의 글에서 다산의 토지제도 개혁사상의 경우 전론(田論, 1798년)이 작성되던 여전제 단계와 《경세유표》에서 정전제를 주장하던 두 단계로 구분된다고 하였다. 위 단행본(2010년) p.467.

 

11) 《與猶堂全書》 第一集 詩文集 第十六卷 文集 / 墓誌銘 / 自撰墓誌銘 壙中本 ; …… 氏 武承旨和輔女也 旣娶游京師 則聞星湖李先生瀷學行醇篤 從李家煥李承薰等 得見其遺書 自此留心經籍 旣上庠 從李檗游 聞西敎見西書 丁未以後四五年 頗傾心焉 辛亥以來 邦禁嚴 遂絶意.

 

12) 〈俟菴先生年譜〉(정규영, 1921년) *본고는 송재소, 《다산시 연구 - 부 다산연보 -》(창작사, 1986) pp.193-358에 이 자료를 번역하여 게재한 〈사암선생연보〉를 참고하였다.

 

13) 《與猶堂全書》第一集 詩文集 第十五卷 文集 / 墓誌銘 / 先仲氏墓誌銘

 

14) 《與猶堂全書》第一集 詩文集 第十六卷 文集 / 墓誌銘 / 自撰墓誌銘 集中本

 

15)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 p.8. 최석우,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 앞의 책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다섯수레, 1993) p.27에서 재인용.

 

16) 이점에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가 언급한 1783년은 1784년의 착오로 보인다.

 

17) 송재소 역주, 앞의 자료 〈사암선생연보〉 같은 책 p.199

 

18) 배현숙, 〈17,8세기에 전래된 천주교 서적〉, 《교회사연구》 3(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 배현숙, 〈조선에 전래된 천주교 서적〉, 《한국교회사논문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9) 이승훈의 북경 천주당 세례 및 천주교 서적의 조선 전래와 관련해서는 원재연,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활동과 신앙 고백 - 순교 여부와 관련하여 -〉《한국 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 창설 주역의 순교와 그 평판 -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2010.1) 및 원재연, 〈18세기 후반 북경 천주당을 통한 천주교 서적의 조선 전래와 신앙공동체의 성립 - 이승훈의 역할을 중심으로 -〉, 《동양한문학연구》 제30호(2010.2) 등을 참고.

 

20) 윤민구 역주,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자료집》 제4집 pp.97-99 〈이 베드로가 북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는 1789년 말경에 쓰여졌다.

 

21) 물론 당시의 세례식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체험한 예식을 모방했지만 완전할 수는 없었고 그가 북경에서 선물로 받아 온 《요리문답》이나 《성교절요》등의 내용을 토대로 수행한 것이었다. 윤민구 역주 앞의 책 pp.23~32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2월 24일자 편지 발췌문(SOCP67, 336-344), 같은 책 pp.33~35 〈쁘아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18일자 편지 발췌문(SOCP67, 363), 같은 책 pp.43~53 〈빌라 신부가 쓴 편지(SOCP 67, 435-436)〉이어서 이승훈은 명례방으로 그들의 집회장소를 옮겨서 세례식이나 교회서적 강습회를 자주 개최하여 김범우, 최창현 등에게도 세례를 베풀기에 이른다.

 

22) 원재연, 앞의 글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 활동과 신앙 고백 - 순교 여부와 관련하여 -〉(2010.1) 참고

 

23) 이벽의 순교에 대해서는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연구》(2007.1, 양업교회사연구소)에 실린 이성배 〈광암 이벽에 대한 신학적 고찰〉 및 같은 책에 실린 심상태〈이벽의 죽음과 순교문제에 대한 재조명〉을 참고.

 

24) 이승훈에게 불법적 성사집행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 신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유항검, 권일신, 이가환, 정약전 등 당시 이승훈과 함께 가성직단의 일원으로 성사를 집전하던 이들 중의 한 명일 것이라고 연구자들에 의해서 추정되어 왔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원재연 앞의 글(2010.1) 참조.

 

25) 《與猶堂全書》第一集 詩文集 第九卷 文集 / 疏 / 辨謗辭同副承旨疏丁巳 ; … 臣於所謂西洋邪說 嘗觀其書矣 然觀書豈遽罪哉 辭不迫切 謂之觀書 苟唯觀書而止 則豈遽罪哉 蓋嘗心欣然悅慕矣 蓋嘗擧而夸諸人矣 其於本源心術之地 蓋嘗如膏淸水染 根據枝縈而不自覺矣. …

 

26) 앞의 주 10)번 《與猶堂全書》 第一集 詩文集 第十六卷 文集 / 墓誌銘 / 自撰墓誌銘 壙中本 참고

 

27) 이만채(편), 《벽위편》(국제고전교육협회, 1984) 〈丁未泮會事〉

 

28) 원재연, 〈순암 안정복과 광암 이벽의 서학 인식〉, 《교회사학》 4집(2007, 수원교회사연구소) pp.17-21

 

29) 이는 무지로 시작한 ‘가성직제도’의 불법성을 인식하게 된 때문이다. 관련 내용은 앞의 주 24) 참고

 

30) 원재연 앞의 글(2010.2) 〈18세기 후반 북경 천주당을 통한 천주교 서적의 조선 전래와 신앙공동체의 성립 - 이승훈의 역할을 중심으로 -〉 ; 이에 의하면 교회설립(1784년)부터 1794년까지 평신도들만의 교회시절 약 10년간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서적은 “西學凡, 聖年廣益, 盛世芻蕘, 十誡, 天主聖敎日課, 二十五言, 聖經直解, 眞道自證, 敎要序論, 萬物眞源, 聖敎切要, 袖珍日課, 聖敎淺說 등 모두 10여 종에 이른다.

 

31) 원문에 이렇게 되어 있는데, 《성세추요(盛世芻蕘)》의 오기(誤記)이다.

 

32) 〈草土臣李基慶上疏 十一月十三日〉, 《闢衛編》(이만채 편) 권2 ‘辛亥珍山之變’

 

33) 송재소 앞의 역주문 〈사암선생연보〉

 

34) 이와 같은 맥락의 표현은 위의 글 〈사암선생연보〉 1791년 조에도 보인다. “정미년 이후로 임금의 총애가 더욱 두터웠을 때에도 자주 이기경의 강정(江亭)으로 나아가 서학을 공부했다”.

 

35) 신해 진산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원재연, 〈1791년 진산 천주교도의 폐제분주사건과 조선왕조의 형률〉, 《조선왕조의 법과 그리스도교》(한들출판사, 2003) pp.157-200 참고

 

36) 강재언, 앞의 글(1990) p.218

 

37) 《推案及鞫案》 〈辛酉邪學罪人李家煥等推案〉 p.21

 

38) 송재소 역주, 앞의 글 〈사암선생연보〉 p.242

 

39) 황사영, 《백서》 제17행 ; 李家煥丁若鏞李承薰洪樂敏等若干人 … 外雖毒害聖敎 中心尙有死信

 

40) 마테오 리치 지음, 송영배 · 임금자 · 장정란 · 정인재 · 조광 · 최소자 옮김, 《천주실의》(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5) 참고

 

41) 원재연, 앞의 책(2003.1) 제1부 2장, 〈다산 여전제의 사회사상적 배경에 대한 일고찰〉

 

42) 원재연 같은 책 pp.94-100

 

43) 한영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우리 역사와의 대화》(을유문화사, 1991) p.211 ; 원재연, 앞의 책(2003. 1) p.75, 99 ; 특히 〈田論〉의 경우 초고본과 가필본이 있는데, 만년에 기록된 가필본의 서두에 “이는 기미년간(=1799년)에 지은 것으로 나의 만년 논의와는 같지 않으므로 이에 기록해둔다”는 메모가 있다. 김용섭, 〈18~19세기 농업실정과 새로운 농업경영론〉, 《한국근대농업사연구》(일조각, 1975), 신용하, 〈다산 정약용의 여전제 토지개혁사상〉, 《정다산 연구의 현황》(민음사, 1986) 등의 견해에 의거한다.

 

44) 유은희 수녀는 《진도자증》이 한국에 전래되어 많은 실학자들과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들에게 읽혀졌던 주요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유은희 수녀, 역주본 《진도자증》 《교회와역사》 제325호~342호 총18회에 걸쳐 연재됨.

 

45) 본고에서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영인본 《진도자증》 등을 대본으로 활용하여, 유은희 수녀의 위 역주본 《진도자증》을 참고하였다.

 

46) 물론 〈탕론〉과 〈원목〉에서 각각 말한 폭군방벌론(暴君放伐論)이나 선위(禪位)의 제도는 중국 고대의 수사학(洙泗學) 또는 공맹유학(孔孟儒學)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러한 논의나 제도의 내용을 고구(考究)하게 해준 서학서의 영향력 또한 전적으로 배제하기가 어렵다.

 

47) 《진도자증》 권3, 〈박의인거(駁疑引據)〉 論道確據 제3, 昇天後據 ; … 世主之外 別有宰道之共君 無世襲惟憑盛德而立 專以治道爲任 名曰敎皇 … ; 조광, 〈丁若鏞의 民權意識 연구〉, 《아세아연구》 제19집(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6)에서도 다산의 민권의식을 분석하면서 그의 국민주권론, 참정권, 평등의식, 민중저항권의 고취 등에 대하여 상술하였다. 필자가 본고에서 주장하는 내용의 거의 대부분은 이미 조광 교수의 36년 전 논문에서 일찍부터 거론이 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와는 달리 《천주실의》나 《진도자증》과 같은 서학서의 내용과 다산의 개혁사상을 구체적으로 비교하지는 않고, 다만 다산 개혁사상의 요소가 그의 서학공부에서 유래하였을 가능성만을 조심스럽게 거론했다. 그러면서도 다산의 개혁사상은 서학적 영향보다는 유학(경학) 공부와 비판적 현실인식을 통해서 자득(自得)한 결과였을 가능성이 보다 더큰 것으로 보았다.

 

48) 《진도자증》 권2, 事道 人類(下) 구세지사(救世之事) ; … 此時貴賤不分 貧富無別 惟以善惡是區 …

 

49) 《진도자증》 권3, 〈박의인거(駁疑引據)〉 敎之經綸 第一 敎之經綸 ; … 論平於人 … 蓋人乃同出一原 同爲一祖所生 共有是心而共有是向 故無論大小遠近富貴貧賤之不同 皆當以愛體之 不特於其生其名其利

 

50) 《진도자증》 권3, 〈박의인거(駁疑引據)〉 敎之經綸 第一 敎之經綸 ; … 於天主 則屈而敬於無上 於人 則平而愛於無私 …

 

51) 위와 같은 곳 ; 故當忠則忠 當孝則孝 當順則順 當敬則敬 當愛則愛 或當以財輸 而卽以財輸之 或當以力給 而卽以力給之 上下不紊其名分 … : 《진도자증》 권3, 〈박의인거(駁疑引據)〉論道確據 제3, 昇天後據 ; … 富不驕而貧不貪 貴不欺而賤不抗 富者爲貧人之帑藏 貧者爲富人之股肱 …

 

52) 《진도자증》 권3, 〈박의인거(駁疑引據)〉 前道於理無不合 ; … 或曰 旣如此也 降生胡不在我中國也 曰孔子生於魯而不生於秦楚 何歟 總之生存一方 道可行於天下也 況救世之道 乃萬民之公道 本當通行萬國 至論中國 自古以來 薄海不通 往來有禁 使萬國之要道而藏於玆 中華以外 其何以見焉

 

53) 《여유당전서》 제1집 권13, 〈送韓校理致應使燕序〉

 

[학술지 교회사학 vol 9, 2012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원재연(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190674&Page=13&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파일첨부

0 1,189 0

추천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