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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황요한 · 안여집 요한 사도

185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0-09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약전


황요한 · 안여집 요한 사도

 

 

황요한(1839~1866)

 

황요한은 수원 초평리(현 경기도 의왕시 초평동)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부모 때 천주교에 입교했다. 다블뤼 주교에게 성사를 받고 1867년 서울에서 순교한 황빈첸시오가 그의 형이다.

 

황요한의 가족은 수차례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이주하면서 가난해져 궁핍하게 생활했다. 그가 혼인해 양지 은다라니(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앙지면 대대리의 응달안리)에 살고 있을 때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그는 잠시 한 비신자에게 아내와 재산을 돌봐 달라고 부탁한 뒤 다른 지역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 비신자는 황요한의 아내와 재산을 가로채고 포교에게 요한을 밀고했다. 황요한은 이러한 사정도 모른 채 피신처를 구한 다음 아내를 데리러 집으로 돌아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포교들에게 체포됐다. 그 자리에서 많은 매를 맞은 황요한은 한쪽 팔이 부러지고 거의 죽을 지경이 됐다.

 

수원 관아로 압송된 황요한은 1866년 12월 16일 옥에서 순교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안여집(요한 사도, 1822~1866)

 

안여집은 황해도 재령군 하방면 장미동에 살았으며 6남 2녀의 자녀를 뒀다. 그는 성품이 순하고 정직한 데다 의리가 있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군자’라고 불렸다.

 

안여집이 처음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평안도에 살면서 등짐장사를 하는 김상영이 장미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때였다. 김상영이 천주교의 참됨과 이단의 허망함,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하자, 안여집은 이를 진리로 여겨 입교했다. 이후 그는 아우 형제와 동네 사람 10여 명에게 교리를 전해 입교시켰다.

 

안여집은 이후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하기 시작했고, 점차 입교하는 이들이 늘어나자 교우들을 모이게 해 공소 예절을 가졌고, 베르뇌 주교를 모셔와 판공성사를 받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미동에 해주 감영의 포교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안여집은 이에 먼저 공소 신자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킨 뒤, 자기 처자식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면서 포교들을 기다렸다. 마침내 포교가 들이닥치자 그의 가족은 그들과 함께 점심을 차려 먹고는 해주로 압송돼 문초를 받았다.

 

그는 문초를 받으면서 “나는 하늘을 공경하고, 영혼을 구하는 데 힘썼으며, 나라를 사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도리를 실천해 왔는데 어찌 이것이 죄가 될 수 있느냐”며 항변했다. 또 감사가 “배교의 증언으로 하늘을 보고 욕하라”고 요구하자 그는 “천주교는 존비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신봉해야 할 도리”라고 말했다. 그러자 감사는 참수된 교우의 머리를 내보이면서 “배교하지 않으면 이처럼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그럼에도 안여집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이미 나의 목숨을 천주를 위해 바치기로 작정했소. 천주는 만민의 왕이요, 만민의 아버지이신데 어찌 백성이요 자식된 자로서 그분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죽기를 결심했으니 속히 처형해 주시오”라고 신앙을 증언했다.

 

안여집은 이후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은 후 1866년 12월 17일 백지사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의 시신은 거두어져 황해도 재령군 하방면 주암동에 매장됐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0월 6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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