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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장사광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 부부

182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6-11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3)


양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장사광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 부부 (상)

 

 

조선후기 양근은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전역과 광주시 일부분에 해당한다. 양근은 한국천주교회의 요람으로서 초기교회 당시 서울과 경기 일원의 신앙공동체를 충청도와 전라도로 널리 확산시킨 전국적 복음전파의 요충지였다. 1801년 전후까지만 해도 경기지역 신자의 90%는 양근을 비롯하여 여주, 이천, 광주 등 남한강 일대에 살고 있었고, 이 중에서 다시 대략 반 정도는 양근에 몰려 살고 있었다. 이곳 양근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이미 정조에 의해서 서울의 최제공, 내포의 이존창과 함께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우두머리로 낙인 찍혀 ‘선참후계령’으로 위협당하며 배교하라고 협박을 받았던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생장하고 활동하던 곳으로서, 왕성한 교세에 걸맞은 탁월한 지도자를 배출한 고장이었다.

 

그러나 1792년 권일신의 순교에 이어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그의 형 권철신 암브로시오, 조동섬 유스티노 등 고을의 주요 지도자들이 순교한 후에는 교세가 상당히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기해박해 직전인 1836년경, 여전히 양근은 구교우와 예비신자만으로 대략 140~150명의 신자집단을 이루고 있던 경기 동북부 지역의 신앙중심지 기능을 했으며, 서울에서 이주한 장사광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 부부와 같은 저명한 순교자를 배출해낼 수 있었다. 또한, 1837년 4월,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두 명의 선교사가 지방 최초로 합동 부활절 미사를 봉헌한 곳이기도 하다. 기해박해 때는 권철신의 손자인 권황과 권탁 형제가 관아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양근의 신자들은 기해박해를 지나 병인박해 때까지 관아의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았지만 여전히 능말, 추읍, 마당재(지평) 등 산골로 옮겨가서 신앙공동체를 존속시켰고, 다수의 신자는 서울, 개성, 은이, 음성 등 다른 고을로 이주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2019년 6월 2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4)


양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장사광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 부부 (하)

 

 

장사광 베드로(1787~1839)는 서울 출신 양가(良家)의 자손이었고, 손 막달레나(1784~1839)는 서울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회장 손경윤 제르바시오의 딸이다. 1792년 이전에 장사광은 양근의 한감개로 와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가, 권일신이 죽고 1801년 신유박해가 닥치자 곧바로 냉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부인 손 막달레나가 남편의 회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다시 신앙을 갖도록 간곡히 권면한 결과, 1828년경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장사광은 보다 확실한 믿음살이를 하기 위해서 집안의 제사를 폐지하고 위폐를 불살랐을 뿐 아니라, 유교적 제사를 강조하는 향교(鄕校)의 명단에서 스스로 자기 이름을 삭제했다. 그리하여 그는 양반의 체모(體貌)를 버리고, 술을 완전히 끊는 등 절제의 삶을 살면서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집중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입국하자 장사광 부부는 곧바로 성사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신앙심이 더욱 굳건해져서 신자의 본분을 힘써 지켜나갔다.

 

이들의 소문을 들은 양근군수는 1839년 8월 장사광과 손 막달레나는 물론이고 그의 두 아들까지 모두 체포하여 배교할 것을 강요하였다. 군수가 부부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이에 장사광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인정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며 아이들의 괴로움은 저희의 괴로움보다 백배나 더 고통스럽지만, 이 때문에 천주님을 배반하지는 못하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신앙을 고백했다. 군수는 감사의 지시를 받고 그들 부부를 고문하고 협박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아이들은 배교하여 석방되었지만, 부부는 음식 제공조차 금지당한 상태에서 문초와 형벌을 참아 받다가, 장사광은 1839년 12월 18일(음 11월 13일), 손 막달레나는 이보다 4일 후인 12월 22일(음 11월 17일)에 각각 52세, 55세의 나이로 옥중순교했다. 이들 부부의 신앙고백은 구약성경에서 외아들 이사악마저 서슴지 않고 하느님 제단에 바쳤던 아브라함의 항구한 믿음을 연상하게 한다.

 

“하느님의 종 장사광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 부부시여, 하느님을 만유 위에 가장 높이 사랑하신 당신들의 믿음을 저희 모두가 본받게 하소서. 아멘.” [2019년 6월 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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