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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교부들의 신앙: 죄 고백 - 죄의 고백과 하느님 찬미

54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7-29

[교부들의 신앙 - 죄 고백] 죄의 고백과 하느님 찬미

 

 

“주님, 당신이 지으신 한 줌 피조물, 이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합니다”(아우구스티노, 「고백록」, 1,1,1.).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짓는 죄가 무엇일까요? 우스갯소리이지만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일 듯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상처들과 죄악들, 그것들을 직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기억들을 다시 꺼내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숨기고 묻어 두려 합니다. 때로는 그런 죄들을 하느님께 고백하기가 망설여 집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죄를 감추다 보면 더 악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고해하고 나와도 여전히 어두운 얼굴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잠언 1,7)입니다. 주님을 옳게 두려워한다는 것은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는”(마태 10,28)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솔직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하고 약속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죄를 기억하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3대 저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고백록」은 말 그대로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는 책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죄의 고백이 아니라, ‘죄의 고백은 하느님 찬미’라는 깊은 의미를 담은 책입니다. 그래서 「고백록」은첫 시작에서부터 “주님, 당신이 지으신 한 줌 피조물, 이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합니다.”라는 찬미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라는 가면 뒤로 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냅니다. “일자(一者)이신 당신을 등지고 다자(多者)를 향해 스러지면서 제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청소년 시절 저는 저 밑바닥 것들로 허기를 채우는데 몸을 불살랐으며, 다채롭고 그늘진 애정 행각에 우거지게 뒤얽혔으며, 그러는 사이에 제 용모는 시들고, 저 스스로 만족하게 즐기고 사람들의 눈에 들기를 꾀하다 보니 당신 눈앞엔 썩어 문드러지고 말았습니다”(2,1,1.).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지르고 넘어간 제 패악과 육체적 부패를 저의 영혼에서 기억해 내려고 합니다. 그것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서입니다. 당신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그 일을 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는 그 쓰라림 속에 제가 걸은 사사스러운 길들을 되새김으로써 당신께서 제게 감미로움을 주시게 하려는 뜻입니다. 속임수 없는 감미로움, 행복하고 안전한 감미로움, 분산되지 않게 저를 가다듬는 감미로움 말입니다”(2,1,1.).

 

성인의 이 고백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 기억들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분의 사랑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는 일은 쓰라린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감미로움으로 바꿔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믿음입니다.

 

 

주님께로 향한 올바른 두려움

 

루카 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작은아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는 죄를 지었고 아버지의 심판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아버지를 피해 더 멀리 도망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임을 깨달았습니다. 두려웠지만 아버지께로 향했습니다. ‘올바른 두려움’이 그를 다시 살린 것입니다. 곧 죄의 고백이 하느님 찬미였던 것입니다.

 

한때 잘나가던 시절에는 떵떵거리며 허세를 부렸던 작은아들이 낯선 땅에서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돼지죽조차도 맘껏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된 자신을 한탄하면서 죽음을 결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작은아들을 다시 살게 했던 것은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과 자신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정말 나를 기다리실까?’ 하는 의심과 불안 때문에 돌아가는 발걸음을 머뭇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15,21)라고 고백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저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15,22-24)며 꼭 안아줄 따름이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선택하시고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어떤 면을 보시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선택하셨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셨고, 우리에게 당신 자비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이유가,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셔야 할 이유가 더 많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을 구석입니다. 이는 곧 올바른 두려움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고백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고백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찬미의 기도로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이 지으신 한 줌 피조물, 이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합니다.” “저지르고 넘어간 제 패악과 육체적 부패를 저의 영혼에서 기억해 내려고 합니다. 그것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서입니다. 당신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그 일을 합니다.”

 

* 김현웅 바오로 - 성아우구스티노수도회 신부로 착한의견의성모수도원 수련장을 맡고 있다.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 아우구스티노 교부학 대학원에서 교부학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19년 7월호, 김현웅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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