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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신약] 성서의 해: 넷이며 하나인 복음서

491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6-07

[2020년 사목교서 ‘성서의 해 II’ 특집] ‘넷’이며 ‘하나’인 복음서

 

 

신약성경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네 권의 책을 우리는 ‘복음’ 또는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사실 ‘복음(福音)’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에우안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을 번역한 것인데, 이는 ‘기쁜 소식’ 또는 ‘기쁜 소식을 선포함’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시작에 갈릴래아로 가셔서 이렇게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처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결정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통해 실현되고 완성에 이르기 때문에, ‘복음’ 선포는 결국 그분의 파스카 신비(십자가 죽음과 부활)를 전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장됩니다(1코린 15,3-8 참조).

 

이러한 기쁜 소식으로서의 ‘복음’이 기원후 2세기 중엽부터 서서히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담은 ‘기록’이나 ‘책’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시에 그런 기록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자) ···에 의한 복음”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들을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사도들과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은 그분의 행적과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기기보다는 구두(口頭)로 전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읽어야 할 어떤 기록을 남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이 늦어지고, 또 사도들과 목격한 증인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그분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증언을 글로 써 놓아야 할 필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구두로만 전해지던 예수님에 대한 전승들이 점차 기록으로 전해지게 되었고, 마침내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만나게 되는 복음서의 형태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기원후 60년대 말에서 1세기 후반까지).

 

그런데 신약성경에 있는 복음서는 한 권이 아니라 네 권이고, 저자도 각각 다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각 복음서의 저자라 여겨져 온 인물들의 이름을 따서 이들을 마태오 복음, 마르코 복음, 루카 복음, 요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은 그 구성이나 내용 및 순서에 있어 서로 공통되는 부분이 많은데, 이들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며 함께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공관(共觀) 복음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반면에 요한 복음은 앞의 세 복음서와 비교할 때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예를 들어, 공관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단 한 번 올라가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요한 복음에는 네 번으로 되어 있습니다(2,13; 5,1; 7,10; 12,12). 이러한 차이점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은 공관 복음서 사이에서도 무수히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마르코 복음에 존재하지 않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의 이야기가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 나타나는데, 이들 역시 서로 다른 줄거리를 따르고 있고(마태오는 ‘요셉’ 중심의 이야기; 루카는 ‘마리아’의 이야기), 내용에서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한 분이신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은 하나로 일치해야 할 텐데, 어째서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요?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전승들을 토대로, 본인의 고유한 신학적 관점에 따라,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책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의 집필 목적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의 세부사항을 정확히 재구성하는 데에 있지 않고, 독자들이 예수님을 믿어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이 목적을 뚜렷하게 밝힙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나 전기가 아닙니다. 사실 복음서 저자마다 예수님의 신비에 대해 강조한 점과 신학적 의도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해석한 예수님의 모습 또한 조금씩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서 저자들이 성령의 영감(靈感)을 통해 “예수님은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넷’이 아닌 ‘하나’의 복음을 읽게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2020년 6월 7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인천주보 3면, 정천 사도 요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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