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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사랑하는 아마존과 생태적 회심: 안식일과 예수 - 생태적 회심에 대한 신학적 고찰

177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9-19

[경향 돋보기 - 「사랑하는 아마존」과 생태적 회심] 안식일과 예수


생태적 회심에 대한 신학적 고찰

 

 

‘기후 위기’, 이는 오늘날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중대한 생태 문제다. 최근 한국 천주교회도 기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지난 5월 8일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기후 위기 성명서 “기후 위기, 지금 당장 나서야 합니다”를 발표했고, 6월 5일에는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가 환경의 날 담화문 “성장 신화를 넘어 지속 가능한 세상으로”를 발표했다. 두 문헌 모두 생태 문제는 사회, 경제 체제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통합 생태론’의 관점에서, 성장 신화를 벗어나 지속 가능한 세상을 추구하라고 촉구한다(「찬미받으소서」, 4장).

 

지난해 10월의 ‘아마존 시노드’와 후속 교황 권고 「사랑하는 아마존」도 통합 생태론을 바탕으로 아마존의 자연과 토착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했다. 아마존 열대우림의 보전 없이 토착민은 안녕할 수 없으며, 토착민 문화의 보전 없이 열대우림은 제대로 보전될 수 없다. 통합 생태론은 우리가 “환경 위기와 사회 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당면”했음을 알려 준다(「찬미받으소서」, 139항).

 

‘성장’은 오늘의 세계를 만든 산업 문명의 패러다임이고 개발은 성장의 다른 이름이다. 성장과 개발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가 세계화되자, 자연 생태계 훼손도 세계 전역에서 심해졌다. 아마존 열대우림의 파괴, 기후 위기, 코로나19를 비롯해 부쩍 늘어난 바이러스 창궐은 자연이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다. 이대로 성장을 지속할 수 없으니 ‘지속 가능성’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라는 것이다.

 

이는 현대 세계의 근간인 대량생산, 유통, 소비, 폐기 체제의 일대 전환을 요구한다. 근원적이고 전면적이다. 우리가 생존하려면 피할 수 없는, 하지만 대단히 어려운 과제다. 대개는 익숙한 기존의 패러다임에 안주하여 어떻게든 그 안에서 해결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문제의 근본을 직시하고 그 심각성은 제대로 인식하려면 무엇보다 내면의 변화가 선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개인의 변화와 관계 사회적, 제도적 변화도 반드시 끌어내야 한다. “사회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적 선행의 총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협력망을 통해 해결”(219항)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식일 전통과 지발적 자기 제한

 

성경의 ‘안식일’ 전통은 우리에게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변화를 일구어 내는 데 필요한 소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성경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탈출 20,11)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한다. 히브리어 어원에서 ‘안식’은 ‘멈춤’을 뜻하므로 엿새 동안 날마다 창조 끝에 반복된 “보시니 좋았다”라는 후렴은 하느님의 안식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멈추어야 제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행위를 멈추시고 매일의 창조 결과를 보고 ‘좋다’고 느끼신 것이다. ‘이렛날’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전체를 멈춰 서서 음미하신 안식일이다(창세 2,2 참조).

 

하느님의 안식은 “관상하는 안식”이다(「찬미받으소서」, 237항). 하느님의 안식에 참여하여 활동을 멈출 때, 우리는 세상의 존재들을 우리의 필요나 욕구를 채울 자원이 아닌 피조물로 보게 된다. 멈출 때, 우리가 하는 일을 제대로 보게 된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 그토록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지 깨닫는다. 그러므로 안식은 활동과 대립하거나 “비생산적이며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안식은 우리의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또 다른 방식의 활동”(237항)이다. 안식은 활동의 완성이다. 우리는 안식으로, 세상을 “일구고 돌보”(창세 2,15)는 활동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을 벗어나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안식은 “공허한 행동주의”와 “배타적 개인적 이득”만을 추구하는 “끝없는 탐욕과 고립감”을 방지한다(「찬미받으소서」, 237항). 이런 까닭에 안식은 진정으로 우리에게 축복이자 거룩한 시간이다(창세 2,3 참조),

 

성경은 안식일의 배경으로 이집트 탈출 사건도 언급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은 기억하여라”(신명 5,15). 안식일 정신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인간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해방이다. 안식일에 주인이 쉬도록 하여 주인보다 사회적 약자인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이방인”에게 최소한의 존엄과 평등을 보장한다. 안식일은 “소와 나귀, 집짐승”에게도 적용되어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고 돌보도록 권고한다(14절).

 

또 성경은 안식일을 안식년과 희년으로 확대한다(레위 25,2-13 참조). 안식년은 ‘휴경’으로 땅의 휴식을 보장하고, 묵힌 땅에서 나오는 소출은 모두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희년은 안식년 규정을 포함하며 빚 탕감과 땅 무르기로 해방과 원상회복을 꾀한다. 안식년과 희년은 이웃과 지구와의 관계에서 균형과 공정을 보장한다(「찬미받으소서」, 71항). 안식일 정신은 개인의 선의에만 호소하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규정하는 십계명의 일부로서 사회의 근본 규범이 되었다. 오늘날 안식일은 성장과 개발의 이름으로 끝없는 확장을 거듭하려는 세상의 강력한 제동장치, 울부짖는 지구와 가난한 이들의 따뜻한 보호 장치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이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237항 참조).

 

 

예수님과 안식일 정신

 

‘일’을 더 할 수 있지만 멈추는 안식일 정신은 타자를 위한 ‘자발적 자기 제한’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안식일 정신의 모범은 나자렛 예수이다. 육화와 십자가 죽음은 모두 ‘자기 비움’의 사건이다(필리 2,6-8 참조). 예수님은 육화에 충실한 삶을 사셨고 십자가 사건은 그 삶의 귀결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로운 해”, 곧 희년을 선포하셨다(루카 4,19).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연대는 안식일 정신의 실천이었으며 따라서 모든 피조물을 아우른다.

 

 

안식일 정신과 생태적 회심

 

희랍어 메타노이아(μετανοια)의 어원으로 보면 ‘회심’은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삶이 기준인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예수님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행동 양식으로 행동하려는 노력과 결단이다. 안식일 정신, 곧 자발적 자기 제한의 모범인 예수님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회심은 우리와 세상 전체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생태적 회심이 될 것이다(「찬미받으소서」, 217항 참조).

 

프란치스코 성인은 “피조물과 맺는 건전한 관계가 인간의 온전한 회개의 한 차원”(218항)임을 보여 주었다. 생태적 회심은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커다란 보편적 친교를 이루고 있다는 사랑에 넘치는 인식”(220항)을 포함하고, 우리는 세상은 “모든 피조물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89항) 있는 공동의 집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생태적 회심으로 우리는 끝없는 자기 확장의 추구를 거부하고 “적은 것이 많은 것”(222항)임을 받아들인다. 단순과 절제와 검약의 삶으로 나타나는 생태적 회심은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거센 흐름에 희생되는 자연과 사회적 약자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짓이 될 것이다. “서로를 돌보는 작은 몸짓”은 고요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균열을 일으키는 전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사회 규범과 정책으로 구현될 때, 인식일 정신은 “사회적 사랑”(231항)으로 작용할 것이다.

 

 

생태적 회심과 좋은 삶(buen vivir)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고유한 삼위일체 구조”(239항)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은 삼위일체를 가장 빼닮은 피조물이다.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ωρησιs, 상호 내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가 서로 완전한 개방과 신뢰와 의탁으로 일체를 이루는 상태를 말한다(요한 14,20; 17,23 참조).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1요한 4,16)이시다. 사랑은 상대를 향해 나를 비우게 만든다. 비울수록 채워지는 삼위일체의 역동성을 닮은 우리도 자신을 비울수록 충만해지는 역설적 존재다.

 

라틴어 어원으로 자기 밖에(ex) 서는(stare) 존재인 인간 ‘실존’(existence)도 인간의 역설적 역동성을 암시한다. 자기 비움이 인간 내면의 역동성이라면, 타자를 위한 자발적 자기 제한과 검약과 절제의 삶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하고 완성한다(「찬미받으소서」, 223항 참조). 자기 확장에 몰두하는 탐욕은 인간 정체성의 부정이고, 자발적 자기 제한은 인간 정체성의 긍정이다. 자발적 자기 제한은 하느님, 이웃, 다른 피조물,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좋은 삶(buen vivir)으로 이어진다(「사랑하는 아마존」, 8항 참조).

 

지난 5월 16일에서 24일까지 프란치스코 교종은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5주년을 맞아 ‘찬미받으소서 주간’을 지냈다. 반포 5년만에 본인의 회칙을 기념하는 것은 오늘의 생태적 현실에 대한 교종의 절박함을 빼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교종은 이 ‘주간’을 통해서 우리의 생태적 회심을 요청하고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구한 것이다. 주간을 마치는 날, 교종은 ‘찬미받으소서 특별 기념의 해’를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교황청 ‘온전한 인간발전 촉진을 위한 부서’는 향후 7년간의 행동 계획을 제시한다. 기후 위기라는 초유의 비상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닌가.

 

이제는 우리가 생태적 회심을 요청하는 교종의 절박한 호소에 응답할 때다. 깊은 생태적 회심으로 아마존의 ‘생태적 꿈’이 세상 곳곳에서 이루어지도록 행동할 때다.

 

* 조현철 프란치스코 – 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교수이며 ‘녹색연합’ 상임 대표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20년 8월호, 조현철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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