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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설정 100주년 맞는 원산대목구의 어제와 오늘

121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7-07

설정 100주년 맞는 원산대목구의 어제와 오늘 (상)


서울 떠나 함경도에서 선교 꽃 피운 ‘성 베네딕도회’

 

 

중세 독일의 히르사우수도원을 모델로 지어진 덕원수도원과 덕원신학교(아래) 전경. 동아시아 서양식 근대건축에서 예술적으로나 사상사로나 걸작으로 평가를 받았다. 왼쪽 아래는 원산대목구 초대 대목구장이자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장인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75년을 공산 치하에서 현존하는 ‘침묵의 교회’. 앞선 25년조차도 일제 강점 아래서 선교해야 했던 ‘수난의 교회’. 하지만 그 오랜 수난과 피의 박해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려는 신앙으로 지켜온 ‘순교의 교회’, 북녘땅 원산대목구다. 그 빛나는 전통을 이어온 교회, 원산대목구가 오는 8월 5일로 설정 100주년을 맞는다. 이를 기억하며 세 차례에 걸쳐 원산대목구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본다.

 

 

성 베네딕도회와 원산대목구

 

1920년 8월 5일, 함경남ㆍ북도에 원산대목구가 설정됐다. 서울ㆍ대구대목구에 이어 한국 천주교회의 세 번째 가지로, 서울대목구에서 분리ㆍ설정된 것이다. 선교를 맡게 된 주역은 한국에 들어온 지 11년밖에 되지 않은 성 베네딕도회 서울 백동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의 돌 하나, 나무 하나까지 자신의 몸 같이 여겼던’ 백동수도원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는 왜 서울을 떠나 원산대목구 선교를 맡았을까? 그것도 한반도에서도 가장 척박한 땅 ‘관북’ 함경도 일대를 선교지로 선택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성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목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1909년 2월 25일, 성 베네딕도회는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요청으로 한국에 진출한 첫 남자수도회로 서울 백동에 자리했다. 교육 사업을 위해 진출한 베네딕도회는 1910년에 기술학교인 숭공학교를, 1911년에 사범학교인 숭신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조선인에 대한 고등교육을 못마땅해 했던 일제의 방해로 숭신학교는 개교 2년 만에, 숭공학교는 개교 11년 만에 문을 닫았다.

 

베네딕도회은 이에 본당 사목으로 눈을 돌렸으나, 당시 서울대목구 사목을 맡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수도승들이 본당을 맡는 데 반대했다. 그때 선교적 돌파구로 제시된 것이 바로 원산대목구의 분리였다.

 

뮈텔 주교는 평안도를 베네딕도회 포교지로 제시했으나, 평양 일대에는 이미 개신교가 우세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에 사우어 아빠스는 당시 발전 가능성이 컸던 원산을 선택했고, 교황청도 뮈텔 주교와 베네딕도회 간 협의를 받아들여 함경도를 베네딕도회에 위임했다. 사우어 아빠스는 이어 그해 8월 25일 원산대목구장에 임명됐으며, 이듬해인 1921년 5월 1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주교아빠스로 성성됐다. 또한, 1921년에는 간도(연길)선교지와 북만주 동부 의란선교지까지 위탁받아 한때는 전체 선교지가 총길이 1100㎞, 총면적 20만 5000㎢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기에 이르렀다.

 

걸어서 공소에 다니는 일이 힘에 부쳤던 선교사들은 독일에 모터를 단 자전거를 보내달라고 요청해 이를 받아서 사용하였다. 사진에 등장하는 선교사는 비트마로 파렌코프 신부인데, 그의 자전거에도 모터가 달려 있다.

 

 

함경도 복음 전래사

 

함경도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게 된 건 1801년 신유박해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해로 경기 양근 출신 한학자 조동섬(유스티노)이 유배돼 신앙생활을 한 것을 시작으로 함경도로 몸을 피한 신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된다. 1863년 5월께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함경도 신자들에게 세례를 줬다는 기록도 보인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로 영흥에서 19명이 체포돼 순교했고, 함경도 공동체는 사실상 와해됐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1880년 첫 개항지 원산이 문을 열게 되면서 1887년 7월 함경남도(현 북강원도) 원산에 첫 본당이 설정돼 원산 선교가 본격화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5월 원산 인근에 안변본당이 설정됐으나 1896년 내평본당이 설정되면서 폐쇄됐고, 원산대목구가 설정되기까지 원산과 내평, 2개 본당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 함경도교회의 중심은 원산본당으로, 1890년 67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가 1899년이 되면 486명으로, 9년 만에 7배나 늘어나는 폭발적 증가세를 보였다.

 

덕원수도원 농장과 작업장의 목가적 풍경.

 

 

덕원수도원과 신학교

 

함경도를 선교지로 선택했지만, 베네딕도회원들은 서울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수도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또 교구 연락처로 서울에 최소한의 거점을 남기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서울대목구에서 완전 철수를 강력히 요구해 어쩔 수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베네딕도회는 원산 시내에서 4㎞ 떨어진 덕원(함남 덕원군 부내면 어운리)으로 수도원을 옮긴다. 그 기간이 무려 7년이나 걸렸다.

 

“여러분이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원산에서는 더 훌륭하게 할 수 있습니다.”

 

1920년 10월, 백동수도원을 찾은 주일 교황사절 피에트로 푸마소니 비온디 대주교의 격려는 특히 베네딕도회원들에게 큰 힘이 됐다. 오롯이 주님께만 의탁하며 베네딕도회 공동체는 1922년 수도원 건설에 들어가 440㏊(440만㎡)에 이르는 넓고 수려한 부지에 1927년 11월 덕원수도원을, 1927년 12월 덕원신학교를, 1931년 12월 덕원수도원 성당을 각각 완공했다. 유명한 중세 수도원인 독일 히르사우(Hirsau) 수도원을 다시 보는 듯한 로마네스크풍의 덕원 수도원은 이로써 함경도 선교의 신기원을 열었다.

 

사우어 주교아빠스는 기존 원산ㆍ내평본당과 연길선교지의 용정ㆍ삼원봉ㆍ팔도구본당을 인수, 베네딕도회원을 주임으로 임명했다. 교구 인수 당시 함경도 신자 수는 함경북도에 40명, 함경남도에 600명 등 총 640명에 불과했다. 이에 사우어 주교아빠스는 함경북도 선교 거점으로 회령과 청진에 본당을 신설했고, 수도원이 들어설 덕원에도 본당을 신설, 3개 본당이 새로 만들어졌다.

 

또한, 함경도 선교의 핵심적 역할을 할 조선인 사제 양성이 맨 먼저 시작됐다. 베네딕도회는 1921년 11월 폐교한 숭공학교 건물에서 원산대목구 신학교를 개교하고, 원산과 내평, 간도에서 온 학생들 33명을 대상으로 라틴어와 교리교육에 들어갔다. 교장은 원장인 안셀름 로머 신부, 사감은 부원장인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가 겸직하다가 1926년 세바스티아나 슈넬 신부가 전담했으며, 1927년 말 신학교가 완공되자 덕원으로 신학교를 옮겼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7월 5일, 오세택 기자]

 

 

설정 100주년 맞는 원산대목구의 어제와 오늘 (중)


해성학교·덕원의원 등 다양한 선교로 교세를 넓히다

 

 

- 1929년 봄부터 당국의 인가를 받아 외과와 내과 진료를 할 수 있는 진료소 덕원의원을 개원한 요셉 그라하머 수사가 환자들과 함께 수도원 현관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원산대목구 선교의 견인차, 해성학교

 

“내가 원산에 온 지 14년이 됐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개항 이후 가톨릭은 원산에서 40년이나 선교했는데도 신자 수는 150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이 도시엔 이제 가톨릭 신자가 1500명이나 되고, 예비신자 또한 800명이나 된다. 교회와 직ㆍ간접으로 연관된 사람은 1만여 명이나 된다.…”

 

원산의 가톨릭 교세가 급격히 늘어난 비결은 뭘까? 1921년 베네딕도회 선교사들과 함께 원산에 왔던 해성학교 부교장 오병주(요셉)는 이렇게 교세가 늘어난 원동력이 “학교에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학교 교육을 통한 장기적 선교 계획이 세워졌고, 본당마다 세워진 해성학교는 선교의 결정적 견인차가 됐다.

 

1921년 5월 원산 해성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1923년이 되면 36개 학교에 2080명이 재학했다. 1940년 함흥대목구와 덕원자치수도원구가 분리되기 이전 마지막 원산대목구 교세 통계를 보면, 인가학교 12개교에 남녀 학생 5159명(신자 913명)이, 미인가 15개교에 1425명(신자 723명)이 재학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 국내 학교 중 가장 많은 박사 학위 소지자를 보유했던 덕원신학교는 사제ㆍ수도 성소 발굴과 함께 교육 활동에도 활발하게 나섰다.

 

학교 운영과 더불어 시약소와 병원을 중심으로 한 의료사도직도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5년 11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의 요청에 따라 원산에 파견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는 ‘시약소’를 통해 병자들을 돌봤고, 본당 내 야학과 노인ㆍ아동을 위한 교리강습소, 농아학교, 해성유치원 등을 통해 본당 사목에도 협력했다. 이뿐 아니라 1928년 5월 요셉 그라하머 수사와 김재환(플라치도) 수사를 주축으로 덕원수도원에서 개원한 ‘덕원의원’은 1년 만에 1만 8800여 명을 치료하는 성과를 거뒀고, 1930년대 중반엔 덕원의원을 증축, 진찰실과 전기 방사선실, 수술실, 병실, 입원실 등도 갖추고 의료 사목을 본격화했다.

 

- 1930년대 초 덕원인쇄소에서 일하는 루도비코 피셔 수사와 강 세바스티아노 수사 등. 1929년 소련이 소ㆍ만국경에서 분쟁을 일으키자 의란 자치 선교구에서 성당을 건축하던 일데폰소 플뢰칭거 수사가 덕원수도원에 돌아와 성탄을 앞두고 교회 광고지를 인쇄한 것이 덕원인쇄소의 시작이었다.

 

 

수도원 이전 후 출판·농공 선교 전개

 

덕원으로 수도원을 이전한 뒤 출판, 인쇄를 통한 선교도 전개됐다. 덕원인쇄소는 등사판 「미사 통상문」(1932년)과 한글판 「미사규식」(1933년), 「미사경문」(1933년) 등을 발간했고, 기타 성사 안내서와 시간전례서(성무일도서), 기도서, 교리서, 신심 서적 교리교재도 다양하게 간행함으로써 선교의 밑거름이 됐다. 1933년 6월 창간한 「가톨릭청년」지는 선교와 함께 한글애용ㆍ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고, 이 때문에 창간 3년 만에 폐간되고 만다.

 

농공 활동 또한 눈부셨다. 서울 백동수도원에서 기초를 닦은 목공장과 철공장, 농장은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와서도 그대로 유지됐고, 제분소도 들어섰다. 육림과 원예, 양봉 사업과 함께 자물쇠공장, 칠공장도 새로 운영했다.

 

원산대목구는 이처럼 활발한 선교로 1927년 8월이 되면, 14개 본당, 176개 공소에 신자 수 1만 4000여 명, 예비신자 또한 1000명을 헤아렸으며, 성직자도 28명, 수도자도 50명이나 됐다.

 

원산대목구 주교좌 원산본당 미사 전경. 1938년에 신축된 원산성당은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성당을 참조해 설계됐는데, 내부에 기둥이 없어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성당 뒤쪽에 앉은 신자들도 제대를 잘 볼 수 있었다.

 

 

연길 · 의란 선교지의 분리

 

그러나 원산대목구의 활력은 상당 부분 연길ㆍ의란 선교지의 활력에 힘입은 바 컸다. 특히 연길 선교지는 1928년∼1929년 사이 성직자 수 15명에 신자 수 1만 2000여 명, 예비신자 582명, 본당 8곳, 공소 147곳이나 됐다. 의란 선교지도 부금, 가목사 2개 본당에 1272명이 신앙생활을 했다. 연길과 의란 지역 신자 수는 함경도 신자 수보다 5∼6배나 많았다. 이에 사우어 주교아빠스는 이 지역을 분할하기로 하고, 관련 자료를 교황청에 제출했다. 이에 따라 교황 비오 11세는 1928년 7월 3일 자로 중국 흑룡강성 일대를 ‘의란 지목구’로 설정하면서 사우어 주교아빠스 관할 아래 뒀고, 같은 해 7월 19일 자로 북간도를 연길지목구로 설정, 원산대목구에서 분리했다. 이어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은 1933년 9월 1일 자로 의란 지목구를 티롤의 카푸친회 북부관구에 위임했다.

 

연길ㆍ의란 선교지가 분리됐음에도 사우어 주교아빠스는 당시 늘 부족한 재정으로 노심초사했다. 1929년 「경향잡지」(통권 제23권)를 보면, 당시 원산대목구 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은 태산과도 같습니다. 수도원과 수녀원, 신학교, 해성보통학교 건물은 완공했지만, 덕원수도원 성당과 원산대목구 주교좌 성당, 나남과 청진 등지에도 성당을 지어야 합니다. 또한, 해성보통학교 여자부 교실도 신축해야 할 터인데, 자금이 궁핍합니다. 교구 신자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교우가 기구와 희생으로 도와주시길 간청합니다.”

 

앞선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으로 모원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이 어려움에 처한 데다 1920년대 말에 불어닥친 세계 공황으로 원조가 줄어든 것이 원인이었다.

 

두 선교지 분리 이후 원산대목구는 1929년 6개 본당에 2252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에도 원산대목구는 영흥(1931년)ㆍ고원(1933년)ㆍ북청(1935년)ㆍ흥남(1935년)ㆍ나남(1936년) 본당을 차례로 설립해 다시 선교에 박차를 가한다. 이 무렵 주교좌인 원산본당에선 신자 수가 증가하자 1938년에 새 성당을 신축했으며, 청진본당에선 1931년에, 흥남본당에선 1936년에 각각 성당을 신축했다.

 

1940년이 되면, 원산대목구는 총 11개 본당에 89개 공소, 신자 수 1만 1064명에 이른다. 연길ㆍ의란 선교지 분리 이후 7분의 1에 가깝게 줄었던 교세가 12년 만에 다시 5배가 늘어나는 폭발적 증가세를 보인 것이다. 성직자 수 또한 16명에서 35명으로 늘었는데, 이 중에는 한국인 사제도 5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1937년 3월과 4월에 사제품을 받은 임화길ㆍ김보용ㆍ최병권 신부와 1940년 3월에 사제품을 받은 이재철ㆍ구대준 신부가 그 주인공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7월 12일, 오세택 기자]

 

 

설정 100주년 맞는 원산대목구의 어제와 오늘 (하)


공산당의 박해 끝에 월남… 왜관에 정착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6ㆍ25전쟁 중 원산 수복(10월 10일) 뒤 원산본당 출신의 최명화(베드로) 부제가 폐허가 된 수도원 성당에서 어린이들을 지휘하며 성가를 부르고 있다.

 

 

원산대목구의 분리

 

1940년 1월 12일. 비오 12세 교황은 원산대목구를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로 분리한다. 덕원자치수도원구는 함경남도 원산시와 안변ㆍ덕원ㆍ고원ㆍ문천군을 관할하는 독립 수도원구로 지정돼 원산ㆍ덕원ㆍ고원ㆍ고산 등 4개 본당을 운영하게 됐다. 또한, 함흥대목구는 수도원 구역을 제외한 함경남ㆍ북도 대부분을 관할하며, 회령ㆍ청진ㆍ함흥ㆍ영흥ㆍ북청ㆍ나남ㆍ흥남 등 7개 본당을 운영하게 됐다. 원산대목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는 덕원자치수도원장 겸 함흥대목구장 서리로 임명됐다. 이로써 원산대목구는 사라지고, 분리된 덕원자치수도원구는 한국 교회의 첫 면속대수도원구로 출발했고, 함흥대목구는 독자적 한국인 교구 설정을 준비하게 됐다. 그러나 함경도 교회는 실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었다. 모든 본당 사목 책임자도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이었고, 한국인 성직자가 본당 주임을 맡은 것도 1943년 이후였다.

 

 

일제 강점하 교회의 수난

 

일제 강점 말기는 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다. 일본과 독일은 동맹국이었지만 말뿐이었다. 일본 경찰은 모든 외국인을 간첩으로 의심했다. 전쟁 막바지엔 여행증 없이 원산으로 갈 수조차 없었다. 본당에 연금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매달 덕원수도원에서 열리던 사목회의도 중단됐고, 해마다 열리는 선교사들 피정만 겨우 허용됐다. 1942년 2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가 폐교되자 신학생들은 덕원신학교로 편입했지만, 결국은 덕원신학교도 일본군에 징발됐다.

 

그런 상황에서 선교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1940년 분할 직후 11개 본당에 공소 89개소, 신자 1만 1064명, 성직자 35명(한국인 성직자 5명 포함), 수사 37명, 수녀 51명이던 것이 1944년 해방 직전이 되면 덕원자치수도원구가 4개 본당에 공소 35개소, 신자 5370명, 성직자 23명, 수도자 73명이 됐고, 함흥대목구도 9개 본당에 공소 31개소, 신자 5474명, 성직자 16명, 수도자 20명으로 기록돼 교세는 현상유지 수준이었다.

 

- 1940년 1월 12일 분리된 함흥대목구의 주교좌본당으로 예정돼 있던 함흥성당(왼쪽)과 사제관 봉헌식에 신자들이 모여 있다.

 

 

해방 후 시작된 북한의 박해

 

하지만 일제 강점하 교회의 수난은 해방 이후 수난에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1945년 8월 21일, 소련군 진주에 계림 준본당으로 피했던 회령본당 주임 비트마로 파렌코프 신부가 성당이 불탔다는 소식에 회령으로 갔다가 이튿날 소련군에 피살됐다. 1946년 3월 5일 발효된 ‘북조선 토지 개혁령’으로 덕원수도원은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건물과 대지를 제외한 435㏊의 토지를 몰수당하고 5㏊만 남았다. 이어 이듬해 단행된 북조선 화폐 개혁으로 경제적으로 더 큰 어려움에 부닥쳤다.

 

 

북한 공산당의 체포와 투옥

 

1949년 5월 초까지는 형식적이나마 종교 자유가 보장됐다. 하지만 이에 앞서 1948년 말로 접어들며 박해 손길이 서서히 옥죄어왔다. 1948년 12월 1일 덕원수도원 경리 책임자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가 포도주를 불법으로 제조하고 탈세했다는 이유로 체포됐고, 1949년 4월 28일 덕원인쇄소 책임자 루드비히 피셔 수사가 ‘불온물 인쇄’ 혐의로 체포됐다. 이어 한 달 뒤인 그해 5월 9일 밤 공산당 정치보위부는 덕원수도원을 점령, 72세 고령에 와병 중이던 사우어 주교아빠스를 비롯해 루치오 로트(덕원수도원장) 신부, 아르눌프 슐라이허(덕원수도원 부원장) 신부, 루페르트 클링자이스(덕원신학교 철학 교수) 신부 등 4명을 체포 투옥했다. 이튿날인 5월 10일 밤 11시, 정치보위부원들은 또다시 수도원에 침입, 안셀름 로머(덕원신학교 교장) 신부 등 독일인 신부 8명과 수사 22명, 김치호ㆍ김종수ㆍ김이식ㆍ최병권 신부 등 4명의 한국인 신부를 체포했다. 이들 수도승과 한국인 사제들은 평양 인민교화소와 관문리 수용소, 옥사덕 수용소, 함흥 인민교화소 등에 수용됐다. 또한, 한국인 수사 26명과 신학생 73명 등 총 99명을 수도원과 신학교에서 내쫓고 몰수했으며, 포교 성 베네딕도수녀회 원산수녀원도 5월 11일 폐쇄됐다.

 

이 무렵 원산ㆍ고원ㆍ고원ㆍ고산ㆍ영흥ㆍ흥남ㆍ함흥본당에서도 신부와 수사들이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됐다. 6ㆍ25전쟁 발발 직전까지 교회를 돌본 이재철ㆍ김봉식ㆍ이춘근 신부 등도 전쟁 직전 체포돼 피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 이로써 30년간 함경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는 완전히 폐쇄되고 만다.

 

- 4년간의 수난을 겪고 귀국한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과 슈바이클베르크수도원 수도승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에서 체포 투옥된 외국인 신부와 수사, 수녀 67명은 평양 인민교화소 등에 갇혔다가 옥사덕 강제수용소로 이송돼 4년간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 와중에 1950년 10월 ‘죽음의 행진’에 이어 중노동을 하며 수도자 중 25명이 희생됐고, 42명만이 생존, 1954년 1월 12일 독일로 송환했다. 이들 중 1949∼1952년 북한 공산 정권에 체포돼 순교했거나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 베네딕도회 남녀 수도자들과 헌신자, 덕원자치수도원구, 함흥교구, 연길교구 소속 사제들 38위는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동료 37위’라는 이름으로 시복이 추진돼 현재 교황청 시성성에서 심사 중이다.

 

 

왜관수도원의 설립

 

월남한 베네딕도회원들을 중심으로 왜관수도원을 세웠다. 1952년 5월 덕원수도원 출신 티모테오 비테를리 신부가 사우어 주교아빠스의 뒤를 이어 덕원자치수도원구장 서리와 함흥교구장 서리에 임명됐고, 대구대목구장 최덕홍 주교의 제안으로 베네딕도회가 왜관에 정착, ‘왜관수도원 시대’를 열게 된다. 1954년 4월 9일에는 연길대목구장 서리도 비테를리 신부에게 위임됐고, 이때부터 비테를리 신부는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 이어 1955년 수도원이 완공되면서 독일로 송환됐던 선교사들이 다시 한국에 들어왔고, 1964년 12월 대수도원으로 승격했다. 이어 1981년 이동호 아빠스가 덕원자치수도원구장 서리와 함흥교구장 서리를 25년간 맡았다. 이후 2005년부터 춘천교구장이 함흥교구장 서리로 겸직하게 됐다. 덕원자치수도원구장은 왜관수도원장이 그대로 유지해 이형우 아빠스에 이어 박현동 아빠스가 맡고 있고, 함흥교구장 서리는 장익 주교를 거쳐 현재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가 겸직하고 있다.

 

이 같은 원산대목구 100년의 수난과 보람, 영광의 발자취는 이제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의 기도와 함께 새로운 100년의 복음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7월 19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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