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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홍) 2020년 7월 5일 (일)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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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인물]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491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5-31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1)

 

 

하느님의 벗이라고까지 불린(2역대 20,7)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오늘날 이라크 땅에 있던 고대 수메르 도시 우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이름 테라만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외경 희년서는 어머니의 이름 에드나도 함께 기록하고 있으며,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하느님께서 이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십니다.

 

테라는 집안을 이끌고 우르를 떠나 오늘날 터키 땅에 있던 도시 하란으로 가는데(창세 11,31), 이 이동의 이유를 신앙 때문으로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테라는 히브리어로 ‘테라흐’라 하는데, 달을 뜻하는 ‘야레아흐’에서 파생되었다고 추정합니다. 이것은 테라가 ‘그를 비롯한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라는 여호 24,2의 말씀처럼 달의 신을 숭배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이름입니다. 달의 신은 테라가 살던 우르의 주신(主神)이었습니다. 우르에서 발견된 달의 신 난나에게 봉헌된 거대한 신전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달의 신을 주신으로 섬긴 이유는 우르가 농업을 기반으로 형성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3000년경의 ‘우르의 깃발’에는 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르에서 기원전 8000년경 제작된 질그릇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곡물을 저장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 전승도 테라가 우상을 숭배했다고 합니다. 한 전승에 따르면, 테라는 하느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조각해서 생계를 꾸렸습니다. 하느님을 믿던 아브라함은 반대했지만 테라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아브라함이 집에 혼자 있을 때 도끼로 우상 조각들을 모두 부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분노한 테라가 아브라함을 불 속에 집어넣었는데, 그가 불길 속에서도 무사한 것을 보고 회개하여 다시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전승은 성경이 밝히지 않는 테라가 우르를 떠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회개한 테라가 우상과 완전히 결별하기 위해 달의 신이 다스리는 도시 우르를 떠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하란에도 달의 신을 섬기는 거대한 신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르와 하란 사이에는 여러 도시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달의 신을 주신으로 섬기는 도시는 없었음이 수메르어로 기록된 점토판의 발굴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르를 떠난 테라는 하필이면 달의 신을 섬기는 하란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테라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에 따라 가나안으로 떠날 때도 함께 가지 않고 하란에 남았습니다. [2020년 5월 31일 성령 강림 대축일(청소년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2)

 

 

테라가 우르를 떠난 이유에 대한 다른 해석이 있는데, 기후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테라의 시대로 추정되는 우르 제3왕조 때 근 백 년에 걸친 대기근이 들어 많은 이들이 그곳을 떠나 우르 왕조가 붕괴할 정도였습니다. 이때 테라도 기근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하란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란은 중동지방의 곡창지대를 가리키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 안에 있어서 풍요를 누렸을 뿐 아니라, ‘길목’이라는 그 이름의 뜻처럼 동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서쪽의 이집트를 잇는 국제무역로 상에 있어서 고대 상업의 중심지로도 번성했습니다. 하란에서 발굴된 18,000평이 넘는 규모의 왕궁이 당시의 성세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창세기 15,7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 그를 우르에서 데려내 오셨다고 합니다. 테라가 가족을 데리고 원래 가려고 했던 곳도 하란이 아니라 가나안이었습니다. 즉, 테라가 기근 때문이든,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로 우르를 떠났든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라고 하지만, 사실 가나안 땅은 대부분이 석회석 산지에 비도 많이 내리지 않는 곳입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비옥한 땅과 비교하면 척박하기만 한 땅입니다. 민수기 16,13은 가나안이 아니라 이집트를 가리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물질적 차원에서는 나일강의 축복이 있는 이집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은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수 있을까요? 시편 19,10과 119,103은 하느님의 말씀을 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66,11에는 젖이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상징으로, 요엘서 4,18에는 하느님 은총의 상징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볼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은총을 받는 곳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체험할 가나안은 분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이다.

 

창세기 12장은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2-4의 스테파노의 말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만난 곳은 우르입니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아브라함이 테라가 죽은 뒤 하란을 떠났다고 하지만, 창세기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테라는 7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고(창세 11,26),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났으니까(창세 12,4), 이때 테라는 145세였습니다. 테라는 205세에 죽었으니(창세 11,32), 그가 살아 있을 때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2,1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스테파노가 이 부분을 착각했거나, 테라가 145세에 죽었다고 기록한 사마리아인들의 오경을 읽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2020년 6월 7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3)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란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가야 할 곳은 가나안인데, 직선거리로도 약 700㎞나 떨어진 우르에서 살던 아브라함은 그곳을 알지 못합니다. 이 미지의 장소로 가기 위해 아브라함은 자기 땅, 친족,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합니다. 익숙한 곳, 안전한 곳, 생계가 보장된 곳, 친밀한 관계가 있는 곳,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합니다. 이런 일은 보통 포로로 끌려가는 이들이 겪던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에 한 마디 불평도 없이 하란을 떠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받게 될 네 가지 은총을 약속하십니다.(창세 12,1-2) 땅, 후손, 축복, 명성입니다. 그렇지만 이 선물 보따리 때문에만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떠났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선물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하느님을 만난 때는 기원전 21세기로 추정하는데, 이때는 하란의 전성기였기에 아브라함도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지금 눈앞에 있는 풍요로움을 버리고 아직 실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약속을 향해 떠난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이끄신 가나안에서 보게 된 것은 온갖 곡식이 무르익고 과일이 풍성하게 열린 것이 아니라 기근이 들어 황폐해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갔을 때, 파라오가 사라를 탐내는 일이 벌어집니다. 고대 사회에서 부족장이 아름다운 여성을 여럿 거느리는 것은 권력의 상징이었고, 그를 위해 다른 부족의 여성을 약탈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유다 전승은 이집트 여인들의 까만 피부와 달리 흰 피부를 가진 사라는 매우 매력적이었다고 전합니다. 미드라시는 아브라함이 사라를 상자에 숨겨 이집트에 들어갔는데, 이집트인들이 상자를 열 것을 요구하여 뚜껑을 열자 사라에게서 비치는 광채가 온 이집트를 뒤덮었다고까지 합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사라를 차지하기 위해 파라오가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합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리라고 굳게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험의 목적은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이집트에서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지 못했지만, 자신과 함께하시며 도우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앙의 성숙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그라르 임금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또다시 누이로 소개하는 것이 이를 보여줍니다. [2020년 6월 14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4)

 

 

아브라함은 이집트를 떠나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때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결별하게 됩니다. 창세기 12,5(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과 창세기 13,1(아브람은 아내와 자기의 모든 소유를 거두어 롯과 함께 이집트를 떠나 네겝으로 올라갔다)의 단어 나열 순서를 비교하면 창세기 12,5에서는 롯이 재물 앞에 오는데, 창세기 13,1에서는 롯이 재물 뒤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재물이 아브라함과 롯 사이를 갈라놓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양과 소를 치는데 필요한 목초지와 우물이 부족해지자 아브라함은 롯을 분가시킵니다. 그런데 이 분가는 평화롭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창세기 13,8의 아브라함의 말은 롯에 대한 비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3,7은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히브리어로 ‘리브’)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브라함은 창세기 13,8에서 싸움(히브리어로 ‘므리바’)이라고 합니다. ‘므리바’는 주로 이스라엘 백성이 지도자나 하느님께 불평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 모세와 하느님께 ‘므리바’하였습니다(탈출 17,7). 그러니 아브라함은 롯의 배은망덕을 탓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롯을 떠나보내는 아브라함의 결정에는 이 같은 감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짐작해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함으로써 그가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의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셨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할 때만 복을 나눠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을 떠난 롯의 운명이 어찌 되겠습니까? 창세기 13,13은 롯이 선택한 땅이 악인들과 죄인들의 땅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앞으로 롯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으로부터 자기 몫으로 받은 땅을 조카에게 나눠준 것도 아닙니다. 롯이 선택한 요르단의 들판(창세기 13,11)은 가나안 땅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롯이 제 의지로 선택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브라함이 축복의 땅 밖으로 롯을 추방한 셈이 되었습니다.

 

롯이 떠난 뒤 뒤늦게 자기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아브라함은 조카와 헤어지게 만든 땅을 떠나 헤브론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리고 조카에 대한 사랑과 가문의 수장으로서의 의무감 외에 후회와 미안함의 감정도 나중에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기 위해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큰 군대에 맞서는 무모한 행동을 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지요. [2020년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5)

 

 

아브라함 시대에 요르단 지역의 다섯 도시국가(소돔, 고모라, 아드마, 츠보임, 벨라 혹은 초아르)는 아시리아 지역의 네 도시국가(신아르, 엘라사르, 엘람, 고임)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가 아직 제국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흐르는 땅의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강한 국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요르단 지역의 국가들이 아시리아 지역의 국가들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키지만 패배합니다. 이 당시 이미 아시리아 지역에서는 고대에 오늘날의 탱크와 같은 위력을 자랑하던 말이 끄는 전차를 사용했을 정도로 전투력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의 패배로 소돔에 살던 롯도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318명의 병사로 다섯 도시국가의 연합군도 당하지 못한 당시 근동 지방 최강의 네 도시국가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적인 승리는 아브라함 스스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닙니다. 멜키체덱 임금은 아브라함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창세 14,20).

 

이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많은 자손과 가나안 땅에 관한 계약을 맺으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표징을 원합니다(창세 15,8). 금방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한 아브라함의 태도가 이상합니다. 하지만 표징을 요청하는 것은 불신앙의 증거가 아닙니다. 남 유다의 임금 아하즈는 오히려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사야 예언자에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이사 7,11-14). 이는 아하즈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연합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미 아시리아에 원군을 요청해 두었기 때문입니다(2열왕 16,7-8). 이 경우를 볼 때, 표징을 청하는 것은 자신이나 다른 무엇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신뢰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표징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맺은 계약 자체입니다. 이 계약은 ‘피의 행진’이라 불린 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계약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두 계약 당사자가 반으로 자른 제물 사이를 8자를 그리며 지나가서 서로의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을 어기면 반으로 잘려 피를 쏟고 죽은 제물과 같은 운명이 되겠다는 맹세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계약을 맺는다는 히브리어 ‘카라트 버리트’에는 쪼갠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34,18에도 이런 형식의 계약이 나옵니다: “나는 내 계약을 어긴 사람들을, 곧 내 앞에서 송아지를 두 토막으로 가르고 그 사이로 지나가면서 맺은 계약의 규정들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그 송아지처럼 만들어 버리겠다.” [2020년 6월 28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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