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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홍) 2020년 6월 3일 (수)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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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이병교 레오​

191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4-27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약전 <끝>


이병교 레오

 

 

이병교(레오, 1813~1879)

 

이병교는 서울 차동(일명 수렛골, 현 서울시 중구 순화동ㆍ의주로)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교리를 배워 1836년 초에 입국한 모방 신부에게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또 1845년 입국한 다블뤼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그의 복사로 활동했다. 그는 최지혁(요한) 등 여러 교우와 교류하면서 전교와 신앙생활에 열심했다.

 

1856년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입국하자, 이병교는 홍봉주(토마스) 집에서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후 리델 신부의 복사로 활동했다.

 

이병교는 조선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보살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박해를 피해 여러 해 동안 숨어 지내야만 했다. 그는 가산을 모두 잃고 어렵게 지냈지만, 신앙생활은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이병교는 1868년부터 최지혁 등과 선교사 영입 운동에 앞장섰다. 그 결과 1876년 5월 8일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가, 1877년 9월 24일 리델 주교가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리델 주교와 상봉한 이병교는 당시 피신해 있던 충주 서촌 방축리(현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서 진잠(현 대전시 유성구 원내동)으로 이주했다.

 

1877년 음력 8월 최지혁이 진잠에 살던 이병교에게 연락해 드게트 신부가 거처할 집을 구해 달라고 하자 그는 용인 공수동(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독성리)에 집을 마련해 교우들과 함께 드게트 신부를 모셨다. 이때부터 얼마 뒤 드게트 신부는 이병교의 아들 이경빈(요한)을 복사로 삼아 교우촌들을 방문하며 사목을 했다.

 

1878년 초 리델 주교와 신자들이 체포되자 이병교는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니다가 공주 서림촌에 은신했다. 그리고 얼마 뒤 드게트 신부를 서림촌으로 모시고 와 함께 생활했다. 하지만 1879년 5월 16일 밀고자를 앞세운 서울 포교와 공주 포교가 서림촌을 덮쳐 신자들을 체포한 뒤 드게트 신부와 이병교, 김덕빈(바오로), 이용헌(이시도로) 등을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했다.

 

이병교는 체포된 직후 집안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보게 했고, 서울로 압송될 때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강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때 함께 가던 아들 이경빈이 만류하자, 그는 “내가 다른 때에는 생명이 아까워서 못했지만, 지금은 무서울 것이 없다. 주님의 명으로 이렇게 체포되어 서울로 가니 즐겁다”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아들에게는 도망갈 것을 권유했다.

 

이병교는 2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굶주림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주식이라고는 작은 밥사발에 아무런 간도 하지 않은 밥을 담아 아침저녁으로 먹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들어올 때는 튼튼하고 건장한 신자들도 20일이 지나면 뼈와 살이 달라붙은 꼴이 된다. 그래서 옥에서 굶어 죽는 이들이 많았다. 옥졸들은 밤낮없이 옥에 갇힌 신자들을 괴롭히고 두들겨 패기를 즐겼다. 또 아무리 아픈 환자가 생겨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병교는 긴 옥살이에 병이 걸리고 말았다. 감옥은 위생이 나빠 피부병과 장티푸스 등 전염병이 만연했다. 이병교는 보는 이들이 측은할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누워 십자성호를 그으며 목숨을 연명했다. 그러다 1879년 8월 8일 옥에서 순교했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4월 26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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