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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아버지의 집, 아름다운 성당을 찾아서: 광주대교구 목포 산정동성당

69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1-18

[아버지의 집, 아름다운 성당을 찾아서] (33) 광주대교구 목포 산정동성당


전남 지역 복음화 요람, 한국 레지오 마리애 '산실'

 

 

목포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목포 산정동성당은 전남 지역 복음화의 요람이자 레지오 마리애를 한국에 처음 도입한 곳이다.

 

 

광주대교구 첫 본당, 전남 지역 첫 선교지, 한국에서 처음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한 본당. 목포 산정동본당을 가리키는 수식어들이다. 전남 지역의 신앙의 요람인 목포 산정동성당을 찾았다.

 

 

목포항 개항과 역사를 함께한 성당

 

목포역에 내려 목포 산정동성당 가는 길을 휴대폰으로 검색하니 도보로 17분 거리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야 역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나지막한 건물들과 양철 지붕으로 된 오래된 건물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왕래가 잦지 않다. 목포역을 중심으로 도보로 15분 거리 내에 교과서에서만 보던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과 최근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벽화거리, 목포의 명물 유달산 등이 있다.

 

유달산을 한가로이 오가는 케이블카를 바라보며 산정동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래된 도심을 지나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따라 5분 정도 숨을 헐떡이며 오르자 산정동성당(옛 이름 목포성당)이 멀리 보인다. 성당 마당에 들어서자 목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높은 건물들에 가려 목포항이 잘 보이지 않지만, 본당 초대 주임인 드예 신부는 이 언덕에 올라 바다와 항에 정박한 배들, 오가는 인파를 보며 지역 복음화를 머리에 그렸을 것이다.

 

본당 설립은 1897년 목포항 개항과 발을 맞춘다.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1896년 전라도 지역을 순방하면서 목포와 나바위본당 신설을 결정했다. 목포 지역의 공소들이 모본당인 수류본당과 너무 멀어 사목에 어려움이 있고, 개항으로 목포 지역의 발전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당시 목포 지역에는 100호도 안 되는 마을만 있었고 신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미래를 내다본 사목자의 과감한 사목적 결단이 지역 복음화의 초석이 된 셈이다.

 

- 산정동성당은 성전 내 기둥을 없애 신자석 어디에 앉더라도 제대가 보이도록 건립해 신자 간 소통을 높였다.

 

 

격동의 시대를 함께 한 본당

 

목포 지역 복음화의 못자리 역할을 한 첫 성당은 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점점 훼손됐고, 본당 공동체 역시 피로 신앙을 증거해야 했다. 태평양전쟁 끝 무렵인 1945년 5월, 성당이 일본군 사령부로 징발되는 아픔을 겪었다. 광복이 되어서야 성당을 되찾았지만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으로 성당이 다시 인민군 막사로 쓰이며 본당 공동체는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 한 달여 만인 1950년 7월 24일 인민군이 목포를 함락했다. 여러 차례 피난 권유를 받은 당시 광주교구장 브레넌 몬시뇰은 본당 주임 쿠삭 신부, 보좌 오브라이언 신부와 끝까지 성당을 지켰다. 인민군들은 저 굽고 좁은 언덕길을 따라 사제들을 잡으러 왔고, 사제들은 끌려 내려가며 신자들 걱정과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자 끊임없이 기도했을 것이다. 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가사처럼 신자들은 이별의 눈물을 흘리며 가슴 깊이 북받치는 서러움을 삼켰으리라.

 

성당 마당에는 세 목자의 순교 기념비가 그날의 슬픔을 증거하고 있다. 간첩 혐의로 체포된 사제들은 대전 목동 작은 형제회 수도원으로 강제 이송 후 9월 말 순교의 화관을 썼다. 애절한 추모시가 세 순교자의 굳은 신앙을 전하고 있다. “인내는 바다 같은 수량을 지니고 오로지 임을 향한 일편단심 하루같이 쌓아올린 성탑이여 하늘의 천사 날개 접고 절하리.”

 

- 최초의 산정동성당은 현재 성당의 건축 양식과 흡사하다. 본당의 첫 성당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등 격동의 현대사 속에 공동체의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했다.

 

 

시련 속에 핀 복음의 꽃

 

전쟁의 화마도 퍼져나가는 복음의 씨앗을 막을 수 없었다. 국군과 연합군의 목포 수복 후인 1951년 목포본당은 산정동본당과 경동본당 2개로 분리하며 지역 복음화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현 산정동성당은 제20대 주임 브라질 신부가 549㎡ 규모의 성당과 149㎡ 크기의 사제관을 지어 1966년 봉헌했다. 이때 신자 수는 5000명을 넘어섰다.

 

미카엘 대천사를 수호성인으로 모신 산정동성당은 목포성당 당시 모습과 유사하게 건립했다. 성당에 걸린 빛바랜 옛 목포성당 사진과 비교해도 다른 점을 찾기 쉽지 않을 만큼 닮은꼴이다.

 

성당은 콘크리트조 건물로 내ㆍ외벽이 흰색 칠로 마감돼 있다. 장방형 라틴 십자가 모양의 전통적 성당 건축 양식에서 벗어나 일자형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성당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벽에 걸린 대형 십자가가 눈에 띈다. 한국전쟁 당시 성당을 점령한 인민군이 십자가에서 예수님 상을 떼어내 산속에 팽개친 걸 거둬 본당 김금룡(가이오) 회장이 목숨을 걸고 자기 집 벽장에 몰래 숨겼다. 훗날 김 회장은 이 십자가를 교구장에게 전달했고, 새로 지은 성당에 모셔져 지금까지 신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자 확 트인 공간이 청량감을 준다. 성당은 내부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기둥을 없앴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제대가 훤히 보인다. 제단도 제대와 십자가만 꾸며놓을 만큼 단순화해 소박한 절제미로 시선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회중석에 앉아 좌우를 살펴보니 3개의 고해실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눈을 감고 묵상하니 본당의 희로애락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 첫 도입지

 

목포 산정동성당은 경동성당과 더불어 한국에서 처음으로 레지오 마리애가 시작된 곳이다. 1953년 5월 31일 당시 교구장 현 하롤드 헨리 주교 지도로 산정동본당에 ‘치명자의 모후’와 ‘평화의 모후’, 경동본당에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이 설립됐다. 성당 건너편에는 목포 선교 100주년ㆍ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산정동성당을 둘러봤다면 건너편에 자리한 가톨릭 목포성지를 꼭 순례하길 권한다. 성지 내 박물관에는 레지오 마리애와 광주대교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돼 있다.

 

1937년에 지은 이 건물은 첫 광주교구청으로 사용했다. 교구의 초기 역사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선교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돼 2012년 등록문화재 제513호로 지정됐다. 지상 3층 건물로 내부 목조 계단, 천장 석고 장식 원형을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전남 지역 복음화의 요람인 산정동성당은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올해 가톨릭 목포성지 내 산정동 레지오마리애기념성당을 완공하면 새 성당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월 19일, 백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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