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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65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1-14

[레지오 영성]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두려움에는 4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1)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를 잘 이겨내지 못합니다.

 

2) 무력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하여 존재가 불안해지고 안전하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3) 중독과 같이 통제력을 잃는 두려움입니다. 자신에 대한 통제력, 타인에 대한 통제력,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고,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완전히 무너질 것으로 보입니다.

 

4) 쓸모없고 무가치하고 불필요한 존재로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4가지의 두려움을 모두 간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 앞입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죽음, 또한 누구나 무조건 한 번은 맞이해야 하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두려움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희망을 품고 더욱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그래서 죽음을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하시지요. 즉,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삶을 약속하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두려움으로 힘들어하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젠가 책에서 남극에 사는 펭귄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펭귄은 무리를 지어서 생활합니다. 추운 남극에 먹을 것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먹이를 구하고 새끼를 잘 키울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옮겨 다닙니다.

 

이 펭귄 무리가 빙판 끝에 다다랐습니다. 이제 건너편 빙판으로 가야 하는데, 바다 속에는 범고래나 바다표범 등 펭귄을 위협하는 천적들이 득실거립니다. 만약 건너가지 않으면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를 땅으로 갈 수 없지요.

 

모든 펭귄은 주저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최초로 바다에 뛰어드는 펭귄이 있습니다. 이 최초의 펭귄이 먼저 용기를 내어 뛰어들면 다른 펭귄들 역시 줄줄이 바다로 뛰어듭니다. 이렇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선구자 역할을 하는 이 펭귄을 ‘더 퍼스트 펭귄’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신앙인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우리 신앙인 바로 이 ‘더 퍼스트 펭귄’과 같은 선구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두려움,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희망을 전하고 기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희망을 어떻게 전하고 또 기쁨을 세상에 펼칠 수 있는지를 묵상해 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오늘을 사는 사람과 마지막 날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오늘을 사는 사람의 모습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남은 이 세상 삶이 일주일밖에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주일 동안 열심히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직 이 세상 삶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몫입니다. 일주일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 아마 사람들과의 관계 회복에 이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간의 부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겠지요. 이제까지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누렸던 모든 것들의 소중함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없음’이 있어야 ‘있음’의 소중함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성녀들이 없음의 삶을 강조하셨나 봅니다. ‘없음’을 깨닫지 못하면, 지금 누리는 ‘있음’에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없음’에 불평불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없음’에 더 깊은 묵상과 함께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없음’을 깊이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건설하는 법, 원하는 것을 창조하는 법,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살아 있는 신자들과 죽은 신자들 간의 영적 결합, ‘통공 교리’

 

높고 웅장한 건물을 짓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터를 먼저 닦아야 합니다. 크고 높은 건물일수록 터를 더 깊고 넓게 파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이 겸손이 없다면 절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멋진 건물을 내 안에서 이루어질 수가 없기에, 주님의 겸손을 먼저 배우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건물은 이 세상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있음’에 집착하고 욕심과 이기심에 뒤덮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의 ‘없음’에 집중하면서 겸손의 덕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11월은 우리보다 먼저 주님의 곁으로 가신 모든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입니다. 교회 안에는 아주 특별한 교리가 하나 있지요. ‘통공 교리’입니다. 교회 구성원들 즉 살아 있는 신자들과 죽은 신자들 간의 영적 결합을 의미하며, 지상과 천국, 연옥 등에 있는 모든 성도의 공로와 기도가 서로 통한다는 가톨릭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통공(通功)이란, 공(功)이 서로 통(通)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사는 신자들과 천국에 있는 영혼들 그리고 연옥에서 단련을 받는 영혼들 모두 교회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기도와 희생과 선행 등으로 서로 도울 수 있게 결합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은 신자들의 영혼을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를 통해 죽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달이지만, 바로 지금을 사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희망의 사도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내딛는 우리의 한 걸음이 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11월호,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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