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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독도는 우리 땅 표기한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

105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0-01

"독도는 우리 땅” 표기한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


최근 소장본 추가로 발견, 독도 별칭인 ‘우산도’ 기재

 

 

-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 독도를 우산도로 표기했다. 당진시 제공.

 

 

최근 대전교구와 당진시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朝鮮全圖)가 파리국립도서관에 기존에 알려진 것 외에 추가로 소장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김대건 성인의 조선전도에 실린 독도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김대건 성인의 ‘조선전도’는 대동여지도보다도 16년 앞선 1845년 제작한 지도다. 샤를르 달레 신부가 쓴 「한국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성인은 서울 한성부(漢城府)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지도를 참조해 조선전도를 제작했다고 한다. 성인은 지도를 제작한 후 체포 직전 중국어선에 넘겼고, 중국 상하이의 선교사들에게 지도가 전달됐다.

 

특히 이 지도가 주목받는 것은 독도의 별칭인 ‘우산(Ousan)도’가 울릉도와는 별도의 섬으로 명백히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인의 지도는 만주지역과 울릉도,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1978년 고(故) 최석우 몬시뇰이 파리국립도서관에 성인의 지도가 소장된 것을 확인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한 지도는 성인의 지도뿐 아니라 여러 선교사들의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초 중국에 진출한 서양 선교사들과 중국인들이 중국과 인근 나라의 지도를 그린 황여전람도의 조선전도(1721년)는 서양에서 제작된 지도에 울릉도와 독도가 최초로 등장하는 지도다. 반면 1736년 샤를르 보아 신부가 작성한 「일본역사」 중 ‘일본제국전도’에는 독도가 그려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동해가 ‘조선해(Mer de Coree)’로 기록돼 있다.

 

달레 신부의 「조선 천주교회사」 전 2권 중 제1권에 첨부된 지도(1847년), 한불자전의 ‘조선쟈뎐’에 실린 조선전도(1873년), 로네 신부의 ‘ALTAS DES MISSIONS’의 조선전도(1889년) 등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남긴 조선지도들도 공통적으로 독도를 ‘Ousan’이라는 지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성인의 지도는 독도 표기 이외에도 서구 사회에 우리나라 지명을 소개한 첫 번째 지도로 의미가 크다. 성인은 우리말의 로마자 표기로 지명을 작성했는데, 1855년 성인의 지도가 파리국립도서관에 입수되면서 프랑스 지리학회지에 발표, 6개 국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조선전도를 찾아낸 고(故) 최석우 몬시뇰은 1996년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라면서 “그 첫째는 김 신부가 이미 이전에 독도가 우리 땅임을 기록한 지도를 보고 조선전도에 독도를 표기했고, 또 김 신부 자신이 이를 인지하고 독도를 그려 놓았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가 현 시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처음으로 서구 사회에 알린 지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톨릭신문, 2019년 9월 29일, 이승훈 기자]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를 찾아서


해외에 조선 알린 첫 지도… 심층적 연구 이뤄져야

 

 

한일 간 영토 분쟁이 불거질 때마다 언급되는 것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조선전도’(朝鮮全圖)다. 하지만 조선전도는 독도 영유권이 조선에 있었다는 증거 사료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지역 교회와 관련해 사목적, 교회사적, 문화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대전교구 이용호 신부(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주년 기념관 건설 추진위원회 위원장)는 10월 12일 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 제4회 연구발표회에서 조선전도에 대해 새로 발견된 사실들을 정리하고 미진했던 학술적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제안했다. 발표문을 바탕으로 ‘조선전도’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살펴 보고, 그 의미와 과제들을 정리한다.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 제작

 

김대건 신부의 부제 당시 서한과 샤를르 달레(Claude-Charles Dallet)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등에 의하면, ‘조선전도’는 그가 부제품을 받고 입국에 성공한 1845년 1월 15일부터, 스승 리부와 신부에게 2장의 조선지도를 보냈다는 서한을 쓴 4월 7일 사이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故) 최석우 몬시뇰은 1978년 파리국립도서관을 방문해 필름 촬영을 한 후 이를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처음 확인했다. 최 몬시뇰은 당시 지도의 하단 공백에 있는 설명과 도서카드에 적힌 입수 경위를 토대로, 이 조선전도가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 원본을 따라 그린 것이고, 당시 상하이 프랑스 총영사였던 드 몽티니(de Montigny)가 입수해 프랑스로 가져와 1855년 파리국립도서관에 기증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따라 최 몬시뇰이 국내에 소개한 지도는 원본이 아니라, 원본이 작성된 이듬해에 원본을 모사한 사본으로 추정된다.

 

김대건 신부에 의해 그려진 「조선전도」 원본(1846년 이전), 수사본, 117×64㎝.



김 신부는 1845년 4월 7일자로 스승 리부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조선전도 제작 사실을 전했다. 조선전도는 한성부서관에 보관된 공식 지도를 참고해 제작됐는데, 선교사들의 입국로 개척을 위해서 산과 강 이름을 빼고 전국의 주요 관부와 병영, 만주 봉황성에서 의주까지 들어오는 도로와 남해안 해로 등을 수록했다.

 

이후 조선전도는 리델(Felix-Clair Ridel) 주교가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입수한 조선해도를 참고로 보완했고, 달레 신부는 교우촌을 첨가하고 프랑스 해군성 지도를 참고해 조선 해안선 일부를 수정해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했다.

 

 

‘조선전도’ 원본과 추가 사본

 

2021년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대전교구와 당진시는 이 뜻깊은 해를 더욱 의미 있게 맞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 왔다. 그 일환으로 제안된,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존돼 있는 성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 대여 전시 가능성을 타진하는 과정에서 지도의 원본과 추가 사본이 있음이 확인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파리외방전교회 등 유관 기관들과의 협조 하에, 대전교구와 당진시는 수 차례의 현지 방문을 통해 파리국립도서관에 사본 1부, 프랑스 르망의 고문서 지도부에 원본과 또 다른 사본 1부가 보관돼 있음을 확인했다. 르망의 고문서 지도부에 소장된 지도는 열람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파리국립도서관 지도부로부터 이미 최석우 몬시뇰을 통해 한국에 소개된 사본은 물론, 원본과 추가 사본을 고화질 디지털 사본으로 제공받기로 했다.

 

아울러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지도부에서도 또 다른 사본의 존재를 확인했고, 이 역시 2020년 3월에는 고화질 디지털 사본으로 추가 제공받기로 했다.

 

이로써 현재까지 확인된 조선전도는 원본과 3종의 사본이다.

 

- 「조선전도」 제1복사본 1(1854년 이전 추정), 수사본, 123×75㎝. 1854년 9월 중국 프랑스 영사 드 몽티니에 의해 알려졌다.

 

 

‘조선전도’의 의미와 연구 전망

 

김대건 신부는 대부분의 산과 강 이름을 삭제했음에도 울릉도 동쪽에 독도를 그리고 로마자로 ‘Ousan’이라고 뚜렷하게 표기해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리델 주교는 1869년 ‘한중일 지도’를 제작하면서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를 참고로 해 독도를 명기했고, 달레 신부 역시 1874년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를 보완해 제작한 자신의 ‘조선지도’에 독도를 조선 땅으로 표기했다.

 

이처럼 ‘조선전도’는 독도의 영유권이 조선에 있었음을 밝히는 명백한 증거다. 하지만 조선전도는 동시에 ‘사목지도’며, 중대한 교회사적, 문화사적 의미를 지닌다. 최석우 몬시뇰이 조선전도를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한 1978년 가톨릭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최 신부는 ‘선교사 영입과 사목을 위해 작도된 김대건 신부의 「사목지도」는 지리학적인 의미보다 역사학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강조했다. 윤지충의 고향이었던 진산, 윤지충의 재판 시전극 감사와 배석했던 임피군수가 있던 당시의 군소재 ‘임피’ 등이 표기돼 있는 것은 교회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김대건 신부가 답사한 금강과 자신이 체포된 순위도 및 서해안 일대가 상세히 표기돼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사목역정을 나타낸 김 신부의 사목지도’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본지 1978년 11월 5일자 1면)

 

이용호 신부는 내포교회사연구소 제4회 연구발표회 발표문에서, “조선전도를 통해 김대건 신부의 조국애와 사상을 새롭게 신학화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조선전도에 대한 연구가 심층적으로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조선전도」 제2복사본(1855년 이전 추정), 수사본, 112×57㎝. 중국 프랑스 영사 드 몽티니가 기증, 1855년 1월 11일 파리국립도서관에 등록된 것으로, 고(故) 최석우 몬시뇰에 의해 국내에 소개됐다.

 

 

이 신부는 특히 이 지도가 “유럽의 신학문을 처음으로 접했던 김대건 신부가 알파벳으로 지명 이름을 표기해 조선을 해외에 알리게 된 첫 번째 지도”라며 “문화사적으로 새롭게 조명돼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 신부는 또 조선전도에 표기된 “동북 3성에 대해서도 연구가 이뤄져 만주교회사에 대한 재정리, 그리고 중국교회와의 교류와 협력을 위해서도 양국 교회사가 이 지도를 통해서 연구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대전교구와 당진시는 조선전도 대여 전시와 김대건 신부의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파리국립도서관과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전도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 등을 볼 때 조선전도 원본 대여 전시 가능성은 높은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 신부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등재를 위한 신청서는 이미 제출돼 11월경 파리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총회에서 최종 확정된다.

 

[가톨릭신문, 2019년 10월 20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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