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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183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7-12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2017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집 제1집을 간행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종’ 133위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세운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은 오늘의 우리 평신도에게는 언제나 모범 중의 모범입니다. 이에 자료집의 내용을 발췌 · 정리하여 게재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공부하고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포(內浦)의 사도”

 

지난 2014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발표회에서 흥미로운 논문이 발표되었다. 1791년 내포 지역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의 실상이 기록된 자료에 대한 소개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수기(隨記)』는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이 임금(정조)과 주고받은 편지를 그대로 옮겨 적어 놓은 필사본이다.

 

이 자료가 교회 안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내포의 사도’라고 알려진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가 활동하던 시기 충청도 천주교회의 여러 정황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이다. 특히 그동안 논란이 있던 이존창의 신분, 출생지, 입교 경위 등을 밝히는 데 주요한 자료로 평가되었다.

 

『수기』에는 총 105편의 편지가 실려 있다. 그 가운데 1791년 11월 20일부터 1792년 1월 3일까지 임금에게 보낸 10통의 편지에는 천주교에 관한 내용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때는 신해박해(진산 사건)의 여파로 천주교 확산에 대한 정부의 경계가 매우 날 서 있는 상황이었다. 박종악은 1792년 12월 2일 편지의 별책에 “대개 이존창은 본디 신창(新昌) 성덕산 집안의 사천(私賤)입니다. 이미 어려서부터 홍낙교와 홍낙민 형제와 함께 제법 과거 공부를 익혔는데 가장 먼저 사술(邪術)에 물들어 전념하여 학습하고 힘을 다해 미혹시켜 친한 사람은 요사하고 허탄한 말로 꼬드겨 따라서 배우기를 권하였습니다. 따라 배운 사람들이 깨우치기 쉬운 글을 뽑아 한문과 한글로 베껴 전하니, 점차 널리 알려져 따르는 사람이 날마다 찾아왔습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존창의 집에서는 지식을 채우고 원동지의 집에서는 배를 채운다”

 

박종악은 이존창의 본관은 경주였고, ‘단원’(端源)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었다며 그의 고향 여사울에 대해서도 기록해 놓았다. “이른바 호동(여사울)이라는 곳은 100여 호나 되는 큰 마을인데 두 고을의 땅으로 나누어집니다. 20여 호는 예산 두천면 호동리(현 예산군 신암면 두곡리)이고 80여 호는 천안 신종면 호동리(현 신암면 신종리)입니다. 그 중에 요술(妖術)을 하지 않는 자는 20호 안팎에 불과합니다. 예산 호동에서 요술을 하지 않는 자는 6~7호, 천안 호동에서 하지 않는 자는 10여 호입니다.”라고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한편 천주교를 배척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이재기(李在璣, 1759~1818)가 쓴 일기형식의 『눌암기략(訥菴記略)』에도 이존창의 기록이 있다. 신서파(信西派) 남인들에게 사흉팔적(四凶八賊)으로 불렸던 그는 “이존창이 사학을 배웠는데 점차 고명해져 충청도 사람들이 대주교라 불렀으니 참으로 이른바 청출어람이다.”라고 적었다.

 

이존창은 뛰어난 능력에 사람들 마음을 끄는 특별한 재능까지 겸비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날마다 교우 수가 늘어났고 이웃 모든 고을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는 바람에 그의 집은 항상 손님들로 넘쳐났다. 그래서 교우들은 “이존창의 집에서는 지식을 채우고 원동지의 집에서는 배를 채운다.”는 말들을 하곤 했다. 원동지는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 시 합덕읍 성동리) 출신의 원시보(야고보, 1730~1799)로 부유한 교우였으며, 모든 손님들을 후하게 대접하기로 유명했다.

 

 

진짜 사제의 탄생

 

“1791년 이후 그 이름이 널리 퍼져 있던 이단원(이존창)도…여러 번 괴롭힘을 당한 끝에 결국 공주에 갇혔다. 거기서 겪은 형벌은 모르지만 그도 흔들리고 말았다.” 이 대목에서 다블뤼 주교는 “오 참된 신앙의 증거는 얼마나 드문가!”라고 탄식했다. 박종악은 형조에 올리기도 전에 정조에게 이존창의 굴복을 알리는 「장계」를 베껴 보냈다.

 

정조는 박종악에게 “그가 완전히 돌아온 후에 석방하라.”고 하였으나 이존창은 12월 5일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존창은 배교를 뒤로하고 즉시 수계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천안 인근 지역에 너무 많이 알려져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다블뤼 주교는 『비망기』에서 “가족과 친척들과 작별을 고할 때 마을의 300여 가구의 주민들이 그에게 모여들었으며 저마다 아버지와 형, 친구를 보내는 듯했다.” 주교는 “마치 선교사를 떠나보내는 상황에 견줄 만하다.”며 감동적이고도 애통하다고 표현했다.

 

이존창은 열심을 되찾아 선교에 몰두했다. 주문모 신부를 만나 곁에서 얼마 동안 머물렀다. 신부는 그에게 “네 모든 악행, 그리고 권한도 없이 성사를 마구 집행하였으니(가성직제 당시 신부로 활동했다) 어떻게 죄를 속죄할 수 있겠는가. 순교만이 너를 용서받게 할 것”이라 말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벅차고 고된 일에 자신을 기꺼이 내맡겼으며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끊임없이 순교를 준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루도비코 곤자가는 다시 공주로 이송되어 감영 옥에 투옥되었다. 그런 다음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서울로 이송되어 의금부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같은 해 4월 10일(음력 2월 28일)에는 해읍정법(該邑正法,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여 그곳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의 명에 따라 공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배교하였으나 회심하여 탁월하고 열성적으로 살았던 평신도 가운데 한 명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여러 기록이 남아 있어 다행스럽다. 거기에 한 자료를 더 보탠다면 한국천주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남긴 편지이다.

 

“이존창의 집안이 처음에는 모르고서 가짜 사제를 냈으나 나중에는 진짜 사제를 내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집안의 딸들에게서 두 명의 사제(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탄생되었습니다. 그의 딸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조모이고, 저의 모친 이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입니다.”

 

[평신도, 2019년 여름(계간 64호), 글 · 정리 송란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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